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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불교다 라고 규정하지 말라.

장백산-1 2021. 4. 23. 15:00

이것이 불교다 라고 규정하지 말라.


온 우주만물의 본래 바탕은 불성으로 '하나'다 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불교가 아니다. 온 우주만물의 본래 바탕은 불성으로 '하나'다 라고 주장을 한다면 온 우주의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의 다양성은 쉽게 무시될 것이다. 그렇다고 불교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도 아니다.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면 우주의 전체성, 귀일성이 무시되고 말 것이다.

온 우주만물의 본래 바탕은 하나도 아니고, 하나가 아닌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하기를 좋아하는 중생의 속성상 불교는 도대체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불교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거나, 어느 한 가지 가르침을 따르거나, 어느 한 가지 진리만을 주장하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에서는 그 어떤 극단적인 선택이나 극단적인 주장이나 극단적인 집착이 없다. 사람들에게 어떤 특정한 가르침만을 강조하지도 않고 강요하지 않는다. 불교는 일원론인가 다원론인가 아니면 유신론인가 무신론인가 범신론인가 범재신론인가 하는 그 어떤 단어에도 불교를 가둘 수는 없다. 불교를 가두고 규정짓는 순간 이미 그것은 불교가 될 수 없다. 심지어 가장 뛰어난 최고의 진리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불교다'라고 규정하는 순간 불교는 사라지고 만다.

불교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느냐 마느냐'의 종교가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의 종교라고나 할까. 다만 세상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뿐, 있는 그대로 보는데 무슨 이름이나 규정이나 선택이 필요한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일 뿐 어떤 것을 특별히 강조할 것도 없고, 지적할 것도 없고, 규정지을 것도 없다. 다만 볼 뿐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어떤 특정한 진리를, 어떤 특정한 요점을 강조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불교는 너무 어렵고, 불교는 도대체 어떻게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삶의 본질을 살피고자 한다면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을, 사물을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한다.

언제나 생각이나 사고의 영역에서는 어떤 한 가지를 선택하기를 바랄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하고, 그 중 어느 한 가지를 강조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 언뜻 보기에 그것이 쉬워 보이니까.

그러나 생생한 삶을 지켜보라. 생각이나 사고를 잠시 쉬게 하고 삶이 저절로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고 다만 지켜본다면 그 어떤 관념도, 사상도, 진리도, 견해도 심지어 극단적인 서로 다른 사상이라도 실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생각을 만들어내면 생각에 속박당하고, 견해를 만들어내면 견해에 속박당하며, 진리를 만들어내면 진리에 속박당한다. 심지어 부처라는 방편, 즉 깨달음이라는 방편을 만들어내면 부처라는 방편, 즉 깨달음이라는 방편에 속박당하고 마는 기막힌 아이러니가 있다. 생각이나 관념 속에 있는 부처나 깨달음은 어디까지나 그저 부처나 깨달음에 대한 허망한 생각이고 허망한 관념일 뿐 부처나 깨달음이라는 방편의 말이나 글이 부처나 깨달음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부처는 이러한 것'이다 '깨달음은 이러한 것이다. 라고 규정짓고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幻想)을 좇아다니면서 그것이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착각(錯覺)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부처라는 상(相)을 만들면 부처에 이르지 못한다. 깨달음이라는 상(相)을 만드는 순간 깨달음은 없다.

관념으로 생각으로 불교를 공부하고자 애쓰는 모든 노력은 방편의 공부는 될 지언정 궁극(窮極)에 대한 공부는 되지 못한다. 모든 관념과 모든 생각과 모든 애씀과 모든규정과 모든 노력과 모든 편견과 모든 선택을 내려놓아버리고 다만 삶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모든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일 뿐이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