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하착과 관수행 - 연기법의 생활실천(4)
방하착(放下着, 집착을 놓아버림)
연기법(緣起法)에 의하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실체적이거나 고정되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만 인연(因緣) 따라 끊임없이 변화(變化)할 뿐이다. 존재도 존재가 만들어내는 현실세계도 전부 다 인연(因緣) 따라 잠시 만들어져서(生), 머물고(住), 변화(異)하며, 결국에는 사라지는(滅) 것일 뿐이다. 덩치가 아주 큰 우주(宇宙)는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존재는 생주이멸(生住異滅)하며, 인간은 생노병사(生老病死)한다. 이러한 연기적인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붙잡을 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인연(因緣) 따라 잠시 내게로 왔다가 인연(因緣)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끊임없이 ‘내 것’으로 붙잡는다. 내 것이라고 붙잡아 집착(執着)하고 나서는 인연(因緣)이 다해 내 것이라고 붙잡아 집착하던 그것이 소멸(消滅)될 때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세상 모든 것은 언젠가는 떠날 것이 분명하다면 그것들을 붙잡아 집착(執着)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붙잡아 집착(執着)한다. 사람들이 인생을 사는 목적이 어쩌면 끊임없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붙잡아 집착(執着)함으로써 ‘내 소유(所有)’를 늘려 나가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것도 붙잡아 집착(執着)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붙잡아 집착(執着)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얼마나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인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괴로워 하는 것이다. 붙잡아 집착(執着)하는 것은 결국 괴로움을 남길 뿐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 모든 것을 붙잡아 집착(執着)하는 것을 도저히 멈추지 못하는 것이 인간(人間)이다.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집착(執着)에서 온다. 허망하여 꿈같고, 신기루 같으며, 환영 같은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집착하고 붙잡으려 하는데서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시작된다. 모든 괴로움을 소멸(消滅)시키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집착(執着)을 내려놓으라. 내 것으로 붙잡으려는 모든 소유와 집착의 대상을 해방시켜 주라. 행복(幸福)은 집착(執着)을 놓아버리는 마음에서 온다.
연기법(緣起法)이 끊임없이 설하고 있는 사실이 바로 이 세상 모든 것은 집착(執着)할 것이 없다는 자각(自覺)이다. 인연(因緣) 따라 잠시 생겨난 것을 내 것으로 붙잡으면 남는 것은 괴로움 뿐이다. 연기(緣起)의 이치를 이해하는 삶이란 방하착(放下着)하는 삶, 즉 집착(執着)을 버리는 삶이다. 인연(因緣) 따라 잠시 생겨난 것은 인연(因緣)이 다하면 사라질 뿐이니, 오면 오는대로 받아들이고 가면 가는대로 받아들이되, 자유(自由)롭게 오고 갈 수 있도록 놓아줄 수 있어야 한다. 인연(因緣) 따라 내게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인연(因緣) 따라 가면 가는 대로 받아들이라. 온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간다고 슬퍼할 것도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인연(因緣) 따라 그렇게 왔다가 인연(因緣) 따라 그렇게 가는 것일 뿐이다.
인연(因緣) 따라 오고 가는 모든 것을 허용하라. 인연(因緣) 따라 내 존재 위를 잠시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 내버려두되 어떻게 오고, 어떻게 머물다가, 어떻게 가는지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라. 있는 그대로 지켜보았을 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지혜(智慧)가 생긴다. 지켜보았을 때 본래 머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상 모든 것들이 나를 스쳐 흘러갈 수 있도록 나를 활짝 열어주라. 세상의 모든 여행자들이 잠시 왔다가 몸을 쉬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도록 자비로운 여관방이 되어 주라. 세상 모든 존재가 잠시 들러 쉬었다 떠날 수 있는 간이역이 되라. 인연 따라 오는 것들이 내게 와서 오래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말라. 인연 따라 오는 것들이 종착역(終着驛)으로서 나에게 오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 그 어떤 존재도 나에게 종착(終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라.
인연 따라 오는 모든 것은 잠시 머물다가 인연이 다하면 떠나갈 뿐이다. 그것을 거역하지 말라. 인연 따라 잠시 왔다가 인연 따라 가야할 때가 되면 떠나게 내버려 두라. 수행자가 방하착(放下着), 즉 집착(執着)을 놓아버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축복이자 선물이다.
관(觀) 수행, 깨어있는 관찰(觀察)
그렇다면 석가모니 부처는 어떻게 연기법(緣起法), 즉 연기(緣起)의 이치를 깨달으셨는가.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상의상관적(相依相關的)으로 연관되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깨닫게 되셨을까. 연기법(緣起法)을 깨달은 것은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철저한 관찰(觀察), 관조(觀照)에 의해서다.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치우침 없는 관찰(觀察)에 의해서다. 이 세상의 이치를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치우침 없는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관(觀)하는 수행(修行)이 필요하다. 앞으로 팔정도(八正道)와 사념처(四念處) 강의에서 별도의 설명이 있을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간단한 소개만을 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연기법(緣起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지만 설명만으로는 연기법(緣起法)을 온전히 이해 할 수도 실천할 수도 없다. 연기법(緣起法)이 그대로 내 삶의 방식이 되고, 내 삶이 고스란히 연기법(緣起法)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알음알이, 즉 지식(知識)만으로는 부족하다. 연기법(緣起法)에 관한 몇 백 권의 책을 내고 읽는다 해도 연기법(緣起法)을 깨닫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연기법(緣起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수행이 필수적이다. 불교적인 깨달음, 연기의 깨달음은 지식(知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 수행으로 얻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 불교의 수행은 고도의 정신적인 능력이 있는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실천되어질 수 있는 고난도의 고행이나 묘기가 아니다. 아무리 똑똑한 지식인(知識人)들이라도 한 발조차 내딛지 못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무리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자일지라도 성큼 성큼 앞서갈 수도 있다. 연기법(緣起法)을 깨닫기 위한 수행, 지혜에 대한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바로 관(觀)에 있다. 관(觀) 수행이야말로 나와 내 밖의 우주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을 가져다 준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러나 이것은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내 식(識)대로 왜곡해서 보고, 편견(偏見)과 선입견(先入見)에 걸러서 본다. 똑똑한 지식인(知識人)일수록 현실을 바라볼 때 자기가 알고 있는 온갖 지식(知識)과 견해(見解)라는 색안경(色眼鏡)을 통해 본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는 사람, 순수한 사람일수록 왜곡해서 볼 내 안의 지식과 견해와 판단이 없다.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자기만의 가치관이 뚜렷하거나, 세상 일을 판단해 낼 수 있는 가치판단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만의 생각과 견해에 빠져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편견과 선입견, 지식과 아집이야말로 이 공부에서 버려야 할 첫 번째 것들이다.
아무런 편견과 선입견도 없이,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 난생 처음 바라보는 것처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옳고 그름, 선과 악 등의 일체의 분별(分別)을 비워버리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보기만 하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내 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내 마음과 느낌과, 감정을 지켜보라. 세상에 처음 태어나 첫 호흡을 내쉬는 갓난아이처럼 천진한 비춤으로 호흡을 지켜보라. 나와 내 밖의 세상이 어떻게 마주치며, 접촉하고, 느끼고, 흘러가는지 다만 보기만 하라.
보는 것에 그 어떤 이름도 붙이지 말라. 관 수행이라거나, 위빠싸나라거나, 지관이니 정혜(定慧)니 하는 모든 이름을 지워버려라. 관 수행을 통해 연기법을 깨닫겠다는 생각도 놓아버리라. 내가 수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 이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는 바람, 수행이 잘 되고 있다는 혹은 잘 안 된다는 모든 착각을 버리라. 그리고 다만 분별(分別)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보기만 하라. 봄, 깨어있는 관찰, 알아차림, 지켜봄, 비추어 봄, 관, 주의집중, 마음모음, 그 어떤 용어에도 걸리지 말고 다만 볼 때, 연기(緣起)의 이치가 드러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연기적(緣起的)인 존재들임을 이해하게 된다.
2009.03.27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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