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境界)는 아무 잘못이 없다. - 법상스님
경계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경계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텅 비어 있어 고요합니다. 경계는 여여(如如)하고 여법(如法)합니다. 그런 경계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경계에 잘못된 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분별심(分別心) 때문입니다.
경계에 집착해서 좋아함 싫어함이라는 휘둘리는 분별심 또한 내가 만들어낸 허깨비일 뿐, 경계는 본래 분별심에 휘둘리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맑은 하늘에 인연(因緣) 따라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듯 텅 비어 고요한 본래자리에서 인연(因緣) 따라 이런 저런 경계가 잠시 잠깐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좋은 경계 싫은 경계가 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분별(無分別)의 경계가 꿈처럼 허깨비처럼 잠시 잠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텅 비어 고요한 본래자리에서 인연(因緣) 따라 이런 저런 경계가 일어날 때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면 경계는 있는 그대로의 경계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분별심(分別心)은 그런 경계를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경계를 있는 그대로 편견없이 바라보지를 못합니다. 잠시 잠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물거품같은 경계에 허망하게 이름을 붙이고, 허망하게 모양을 짓고, 허망하게 좋다 싫다는 분별심(分別心)을 일으킵니다.
그런 다음에 좋아하는 분별심(分別心)엔 애착[탐(貪)]하는 마음을, 싫어하는 분별심(分別心)엔 성내는 마음[진(嗔)]을 일으킵니다. 그런 애착하는 마음, 화내는 마음 두 가지 분별심이 생기는 원인은 본래(本來) 나도 공(空)하여 실체가 없고 경계도 공(空)하여 실체가 없어 허망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치(癡)]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모든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경계는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아무런 분별이 없음을 밝게 깨쳐 알 수만 있다면 꿈, 허깨비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은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경계에 휘둘리며 괴로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한 여름에는 너무 더워 짜증이 나고 화도 나고 그럽니다. 그러나 ‘더위’는 그냥 더위일 뿐입니다. ‘더위는 그냥 있는 그대로 더위’일 뿐 좋다 싫다는 분별이 없습니다. 더위는 나쁘다 착하다 하는 분별, 좋다 삻다 하는 분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텅 비어 고요한 더위라는 경계에 사람들은 온갖 분별을 하고 그렇게 스스로 지은 분별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 합니다.
한 여름에 땀을 뻘뻘흘리며 일을 할 때는 더위라는 허망한 경계에 ‘짜증난다’ ‘미치겠다’ ‘쪄죽겠다’ 하며 나름대로의 싫어하는 마음, 분별심(分別心)을 덧붙입니다. 그러다가 사우나에 들어가면 한 여름보다 더 심한 더위에서도 ‘시원하다’ ‘피로가 확 풀린다’ 하고 좋아하는 마음, 분별심(分別心)을 덧붙입니다.
‘더위’라는 경계는 본래 텅 비어 고요하기에 좋아할 것도 없고 싫어할 것도 없습니다. 더위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더위’ 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텅~빈 마음에서 좋다 싫다 하는 분별심(分別心)을 일으키고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은 분별심(分別心)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텅~빈 경계를 상대로 나의 분별을 하는 마음, 분별심(分別心)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일 뿐이지 내가 좋아하는 경계 싫어하는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이처럼 모든 경계는 아무 잘못이 없고, 분별이 없지만 사람들의 분별심(分別心)은 작은 경계에도 끄달리고 휘둘리고 그럽니다. 그러니 제 혼자 분별을 만들고 그렇게 만든 분별로 인해 제 혼자 괴로워 하고 그러는 기가 막힌 세상입니다. 그러니 이런 기가막힌 세상을 깨달은 이가 바라본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밤하늘의 달을 보면서 한없이 북받쳐 오르는 우울함에 어쩔 줄 몰라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달을 보면서 행복해 합니다. 똑같은 달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사람, 적적해 하는 사람, 행복해 하는 사람,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등 제각각입니다. 하늘의 달은 아무런 분별도 없고 잘못도 없습니다. 그냥 하늘에 떠 있는 달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텅~빈 마음에 과거 달과의 연관된 기억이나 추억들로 인해 좋고, 싫고, 우울하고, 그리워하는 등의 분별심(分別心)을 일으킵니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또한 달을 보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노동을 일이라고 생각하면 힘들고 고된 일이 되지만, 운동 삼아 하는 일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하게 됩니다. 육체노동은 힘든 것이고 운동은 즐거운 것이지만, 사실 이 두 가지는 똑같이 육신을 움직이는 것일 뿐입니다. 운동을 하려고 헬스크럽에 가서 일부러 애써 땀을 뻘뻘 흘리며 육체적 한계를 느낄 만큼 무거운 역기를 들고도 힘든 줄 모르고, 샤워 후엔 더없이 개운하고 시원해서 힘이 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육체노동을 할 때는 무거운 역기보다 더 가벼운 일을 하고도 쉽게 피곤해지고 노곤해져 일이 끝나면 녹초가 됩니다.
역기를 드는 운동이나 육체노동이나 똑같은 육체노동이지만 분별을 하는 마음 따라 일도 되었다가 운동도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마음 따라 괴로워 녹초가 되기도 하고, 오히려 힘이 펄펄 나기도 합니다. 육신을 움직인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육신을 움직인다는 경계는 같지만 텅~빈 마음에서 일이다, 운동이다 하고 분별하여 더 힘이 나게도 하고 녹초가 되게도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고 좋은 사람, 미운 사람 하고 분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누구라도 그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미운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미워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미운 사람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며, 내가 좋다고 해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미운 사람 좋은 사람 둘 다 내 분별심(分別心)이 만들어 놓은 허망한 분별일 뿐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고는 좋은 사람을 보면 애착을 하여 이별할 것을 미리 괴로워하고, 미운 사람을 보면 괴로워하여 만남을 괴로워하고, 그렇게 제가 만들어놓은 올가미에 제가 걸려 괴로워하는 겁니다. 기가막힌 중생놀음이라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욕을 먹으면 기분이 상합니다. 그러나 ‘욕’에도 좋아하는 욕 싫어하는 욕이 본래 없습니다. 내가 욕을 먹거나 나와 가까운 사람이 욕을 먹으면 기분이 상하지만, 미운 사람에게 누군가가 욕하는 것을 들으면 되려 통쾌합니다. 나와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즉 얼마나 중요한 대상인가에 따라 아상(我相 : 내가 있다고 착각하는 생각)이 같은 욕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천차만별로 변화합니다. 그러니 ‘욕’ 자체가 좋거나 싫은 것은 아닙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그럴듯한 욕은 참 듣기 좋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본래 정해진 바가 없기 때문에, 무유정법(無有定法)이기 때문에 인연(因緣 따라 좋아하기도 했다가 싫어하기도 했다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경계가 이와 같을진데 어찌 좋아한다 싫어한다 하는 분별이 본래 이미 따로 정해져 있겠습니까. 똑같은 경계라도 좋다고 분별할 수도 있고, 나쁘다고 분별할 수도 있으며,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으며, 힘 빠지는 일일 수도 있고, 힘 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실체가 없어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은 허망한 모든 경계에 뭣하러 끄달리고 괴로워합니까. 왜 아무 잘못도 없는 경계를 탓하는가 말입니다. ‘괴로움’ 하고 딱 정해졌다면, 절대적 괴로움이라면, 어쩔 수 없이 괴로움을 당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이라는 경계도 절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괴로움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한 것입니다.
괴롭다 즐겁다 하는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내가 선택하는 분별심인 것입니다. 경계는 아무런 분별도 잘못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택 또한 하나의 분별입니다. 그러니 그냥 놓아버리면 됩니다. 이 세상은 그냥 내버려 두면 그냥 그대로 자연스러운 세상입니다. 아무것도 잡지 않으면 그대로 고요한 세상입니다. 좋고 싫고 분별만 하지 않으면 그대로 해탈의 경계인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경계를 애써 좋다 나쁘다 분별하고, 행복하다 괴롭다 분별하여, 좋다고 잡으려 애쓰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느라 우리의 삶이 많이 힘들어지고 번거로워졌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평화로운데 말입니다. 그냥 놓아버리면 본래자리 그대로인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경계를 애써 탓하지 마십시오. 조건이 별로라고, 환경이 별로라고, 부모님이 별로라고, 남편이 별로라고, 자식 성격이 별로라고 탓하지 마십시오. 그것들 그들에게는 결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 분별심에게로 돌릴 일입니다. 내 분별하는 마음, 분별심(分別心)이 변하면 경계는 따라서 변하기 때문입니다.
싫은 경계를 잡으면 괴로움이라고 말하고, 좋아하는 경계를 잡으면 즐거움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분별심(分別心) 내려놓면 자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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