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언제나 어디서나 '아무 일 없다'

장백산-1 2021. 6. 27. 19:21

언제나 어디서나 '아무 일 없다'

 

모처럼 공주 마곡사에 갔다가 오는 길에 갑사(甲寺)에 들렀다. 시간의 여유를 갖고 떠나는 산사(山寺) 기행은 늘 마음에 맑은 바람을 한 줄기 던져 준다. 갑사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법당 앞 긴 의자에서 깜빡 잠이 든 스님. 내가 법당에 들어갈 때  그 스님은 바람을 바라보시는 건지, 이제 막 올라오는 매화꽃대를 바라보시는 건지, 그냥 그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긴 의자에 평화롭게 앉아 계시던 바로 그 스님. 아무 일 없다는 듯 영락없이 한가(閑暇)한 도인(道人)의 모습이다. 아무렴, 우리들의 삶에는 늘 아무 일이 없으니까...

스님을 바라보면서 문득 이 글귀가 안에서 피어오른다. '아무 일 없다'. 우리들 삶에 그 어떤 사건이 일어나건, 좋지 않은 사고를 당했건, 심지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우리들 삶에는 '아무 일 없다'는 명제만이 여여(如如)할 뿐이다.

텅 빈 사건, 사고, 일, 사람, 사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어떤 사건, 사고, 일, 사람, 사물들도 일어난 적도 없고 사라진 적도 없이 늘 여기 이자리에서 있어야 할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다. 이와 똑같이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조건이 바뀌었다고 해서,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해서, 내가 바뀐 것이 아니다. 본연(本然)의 나, 본래의 나, 진짜 나는 언제나 늘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그대로 환한 빛을 발산하며 그렇게 있을 뿐. 아무 일도 없이 그렇게 있을 뿐.

 

하늘이 무너진다고 두려워 할 건 없다. 세상에 종말이 와 목숨을 잃게 될 지라도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하늘이 무너져 목숨을 일는 그 순간에 조차도 법계(法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난 적이 없다. 내 안의 본래(本來) 존재(存在)는 우주가 무너져도 아무 일 없이 그냥 여여(如如할 뿐이다. 그러니 공연히 호들갑 떨 것 없다. 공연히 아파하거나, 미리 걱정하거나, 쓸데없는 분별로 스스로를 얽어맬 필요가 없다.

 

아무 일도 없는 중에 껍데기의 세계에서만 온갖 사건, 사고, 일, 사람, 사물들이 꿈처럼 일어났다 사라지고 있다. 환상(幻象)같은 그 껍데기 세계에서 목숨걸고 목매면서 살 일은 아닌 것이다. 바다의 깊은 심연은 항상 아무 일도 없이 고요하지만, 수면 위로 올라오면 올라 올수록 껍데기 세계인 바다표면에서는 항상 상황 따라 파도가 거세게 쳤다가 잔잔해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내 안의 깊은 심연에서는 항상 아무 일도 없는 깊은 고요만이 묵연하게 그냥 그렇게 있을 뿐이지만, 내 눈앞에 드러나보이는 껍데기인 표면적인 세계에서는 좋아하는 이도 싫어하는 일도 만들어내고, 옳은 일 그른 일도 만들어내면서 사람들을 꼭두각시 처럼 울고 웃게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보고 분명하게 아는 것을 불가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도 하고, 깨달음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설령 그와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분명하게 알고 못했더라도 그러한 진리(眞理)를 그러하게 받아들이고 살면 나 또한 그러해 지는 것 아닌가. 수행자는, 지혜로운 길을 걷는 수많은 인류의 길벗들은, 바로 그 심연의 깊은 고요에 삶의 중심을 뿌리내리고 살기 때문에 그 어떤 껍데기 세계의 표면적인 괴로움이나 즐거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도(中道)의 실천이 삶의 덕목이 된다.

사람들이 이번 생에 나올 때 우리에게 주어진 선천적인 능력이나, 외모나, 부유함이나, 살아가면서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위나, 집이나, 친구나 그 모든 것들은 모두 바다 표면에서 일렁이는 파도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거친 파도가 몰아치든 이내 잔잔해지든 그건 깊은 심연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 어느 때라도 심연은 항상 고요하기 때문이다. 파도에 휩쓸리고 살 것인가, 깊은 심연의 고요함에 뿌리를 내리고 살 것인가, 그 선택은 바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물론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은 없다. 선택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설사 파도에 휩쓸리고 사는 사람 조차 그 어떤 순간도 그 삶의 깊은 내면, 심연은 한 치의 흔들림이 없으니까.

글쓴이 :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