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

장백산-1 2022. 1. 16. 00:36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 : 말의 길이 끊어졌다. 불립문자(不立文字) : 글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두 용어는 모두 진제에 적용되는 말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방편의 말은 속제(俗諦)에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진제(眞諦)란 道/공/반야바라밀/여여/진여/법성/제일의제/승의제/불성 등의 방편상으로 사용하는 용어와 같은 의미로 쓰여진다. 진제(眞諦)는 진정(眞正)한 진리(眞理)라는 뜻이다. 진제(眞諦)와 같은 뜻의 제일의제(第一義諦)는 열반(涅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제(眞諦)란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에서 멸성제(滅聖諦)에 해당한다.

 

고집멸도(苦集滅道 :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라는 사성제(四聖諦): 4가지 성스러운 진리)에서 가장 진실한 진리(眞理)는 멸성제(滅聖諦)이지, 도성제(道聖諦)가 아니다. 도성제는 멸성제, 즉 열반에 이르게 도와주는 방법일 뿐이다. 멸성제(滅聖諦), 즉 열반(해탈, 자유)을 붓다가 설명하신 경전이 바로 반야경(般若經)이다. 600권이나 되는 방대한 경전인 반야경을 압축시켜 놓은 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이다.

 

반야경은, 진제 그 자체 즉 열반(해탈, 자유)를 설명한 경전이다. 그래서 열반, 즉 멸성제 다른 말로 하면 공(空)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반야경을 읽어봐야 전혀 이해가 안되는 말들일 뿐이다. 공(空)에 대한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반야경/반야심경/금강경을 비불설이라고 비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야심경 같은 이런 대승경전(大乘經典)을 비방하는 것은 곧 열반 그 자체를 비방하고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대승경전(大乘經典)을 비방하는 것은 중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여튼 진제, 즉 깨달음/열반/해탈/자유는 어떤 실체로써의 그 무엇이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 방편상으로 비유를 들어 텅~비어 있는 것을 곧 진제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불립문자(不立文字)이다. 깨달음의 요체인 진제/열반은 말(언어), 문자를 사용해서는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깨달음은 이게 뭐다..라고 말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진제가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불립문자(不立文字)라서 그냥 가만히 있으면 어찌 되겠는가? 그럼 중생들은 어찌 해탈하란 말인가?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즉 세간에서 사람이 사람을 서로 이해시키는 수단(手段)은 역 말과 언어, 글자 뿐이다. 이런 수단이 없다면 어찌 진제를 이해를 할 수 있으며 깨달을 수가 있을까?

 

그러면 진제를 설명할 방법은 무엇인가? 말과 언어, 글자로써 비유(比維)를 해야 한다. 오로지 비유를 해서 진제를 이해하게 하는 수 밖에 방법이 없다. 그래서 붓다는 말과 언어, 글자를 이용해서 비유를 들어서 중생들을 깨우치셨다. 이 진제, 즉 깨달음을 얻는 것에 대한 상세한 비유가 나와 있는 경전이 바로 능엄경이다.

 

진제는 훤한 밝은 달인데, 그 달을 곧바로 가르길 수 있는 손가락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말(언어) 문자로 비유를 들어 진제를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진제(깨달음)에 도달하게 하는 비유(比維) 중에 허공(虛空)과 먼지(塵)가 있다. 또 주인과 손님이 있다. 또 바닷물과 파도가 있다. 능엄경엔 이 보다 더 다양한 비유가 많이 있다.

허공은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지만 먼지는 바람에 날리면서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계속 반복한다. 중생들은 허공(虛空)을 쳐다 볼 때 허공은 보이지 않고 언제나 먼지를 먼저 본다. 찰라생 찰라멸하는 생각이라는 그 먼지를 나로 여긴다.

 

주인은 영원히 항상 그자리에 있다. 그러나 손님은 언제나 오고 가기를 반복한다. 이생각 저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듯 이 손님 저 손님이 왔다가 사라진다. 주인은 그러나 영원히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이다. 중생은 이렇듯 주인(主人)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매순간 오고 가는 손님, 즉 생각을 나로 여긴다. 생각이라는 손님이 너무나 왔다 갔다 하고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해대니까 주인이 안보여지는 것이다. 마치 하늘에 먼지가 너무 끼면 허공이 안보이고 먼지만 보이듯이.

 

출렁이는 파도는 생멸하는 마음인 생멸심(生滅心)이다. 이렇게 파도치는 마음이 가만히 멈추게 되어도 바다는 그대로 바다로 있다. 바다는 사라져버리는 게 아니다. 바다는 바다 그 자체로 있을 뿐이다. 인연이라는 바람에 생멸심이 출렁인다. 허공,주인, 바다라는 방편상의 말은 전부 진제(眞諦), 공(空)에 대한 비유들이다. 주인이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의미이지, 어떤 주인공을 뜻하는게 아니다. 한국불교에서도 이 주인공을 잘못 이해해서, 아트만(참나) 쪽으로 잘못 이해하게 만들 요소가 많다.

 

진제를 비유하는 여러 방편 중에서 가장 깨닫기 쉬운 것은 허공과 먼지의 비유이다. 그래서 공(空)이 허공 공, 빌 공 자(字)이다. 그러나 空은 허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해하면 안된다. 그저 비유이다. 空을 깨닫는 것은 마음 속에서의 일이다. 외부의 허공 따위에서 어찌 깨달을 수 있으랴. 허공과 같이 마음 그 자체가 텅 비어 있다는 의미로써 허공 공이라는 글자를 가져다 쓴 것이다. 글자가 아니라,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대승기신론에는 공(空)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어져 있다. 일심이문(一心二門) 하나의 마음에 두가지 문이 있다.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 문(門)은 마음(心)이다. 일심이문이니까. 그러므로 하나의 마음이 두가지 마음으로 구분된다는 뜻이다.

 

첫째, 찰라생 찰라멸하면서 이어지는 생멸문(生滅門), 즉 생멸심(生滅心)을 말한다.
둘째,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진여문(眞如門), 즉 진여심(眞如心), 진제를 말한다.

 

진제/공/반야바라밀/불성 역시 마음을 빗댄 방편상의 말이다. 그러나 생멸하는 생멸심이 아니고 부동하는 마음, 불생불멸하는 진여심(眞如心)이다. 진제는 움직이지 않기에 불생불멸심이다. 움직이기에 생멸심이다. 그러므로 열반이란 마음의 적정 상태를 뜻한다. 부동의 적정 상태의 마음!!! 그래서 적정열반(寂靜涅槃)이다. 그러므로 진제, 즉 깨달음/열반을 성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생멸심이다. 찰라생 찰라멸하면서 이어지는 그 생멸심이 멈추어야만 부동의 진여심이 드러난다.

 

이런 부동의 마음의 상태를 비유해서 방편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아래 것들이다. 허공과 먼지에서 허공, 깊은 바다와 출렁이는 파도,
주인과 손님.

 

부동의 마음 상태를 문득 깨닫는 것이 돈오이다. 진제/열반을 문득 깨닫는 것이다. 진제/열반/깨달음에는 그 어떤 실체로써 삼을 만한 것도 없고 또한 진제/열반/깨달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상태라서 말이나 언어 글자로써는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오로지 비유(比維)라는 방법을 이용해서 진제/열반/깨달음을 알게끔 도와주는 수 밖에 방법이 없다. 능엄경에 보면 이러한 비유로써 수많은 중생들을 깨닫게 하셨음을 알 수 있다. 단지 부처님의 설법, 즉 비유라는 수단을 통해 그 자리에서 깨달은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자기 내면의 부동심, 즉 진여불성을 깨달은 것이다.

 

중생의 입장에서는 마음에는 오직 생멸심(生滅心)만이 있는 줄 안다. 그리고 생겨나고 사라지는 마음 생멸심(生滅心) )그걸 나라고 여긴다. 불생불멸의 마음, 즉 부동의 진여심이 있는 줄 모른다. 움직이 없는 마음, 즉 진여심이 곧 불성이다. 불성도 마음이다. 윤회도 마음에서의 일이고, 열반도 마음에서의 일이다. 마음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근데 뭘 깨달을까?

적정이다. 아무것도 없다. 그저 텅 비어 있다. 적멸 상태이다. 그래서 사실은 깨닥고 보면 깨달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이걸 아는 것을 이 세속법에서는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으려면 생멸하는 마음이 쉬어야 한다. 생멸하는 생각이 계속 움직이면 적멸의 그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을 멈추라는 것이다. 생각을 쉬라는 것이다. 허공에 낀 먼지가 다 가라앉으면 청정한 허공만이 남아 있다. 

뭐가 깨닫나? 깨닫는 주체는 뭔가? 오온에서 수상행식(마음)으로 깨닫는가? 찰라생 찰라멸하는 수상행식으로는 부동의 진여심을 깨달을 수 없다.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단지 방해물이 사라져서 진제/깨달음/공이 저절로 스스로 드러났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생멸심이 멈추자 부동의 진여심이 저절로 드러난 것이다.

 

깨달음의 주체(我)라는 건 없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불생불멸의 진여심을 깨닫는 것이 돈오이다.  진여심은 언어나 말로 글자로 표현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나 언어 글자로써 비유를 해서 진여심을 깨닫는 길로 인도할 수는 있다.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이다비유의 핵심은 모두 다 부동의 진여심이다. 진여심/깨달음/진제는 안움직인다. 그 어떤 모습이나 형체를 가진 대상도 없다.

 

어리석은 중생들이 집착(執着)하는 것은 바로 대상, 모양, 모습(相)이다. 보여지고 들려지는 모습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성취하려고 하면서도 어떤 보여지는 대상이나 들려지는 대상으로써의 깨달음의 실체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못 깨닫는 것이다. 끊임없이 대상, 모양, 모습(相)으로서의 깨달음 그런걸 찾아봐야 헛수고일 뿐이다. 오로지 분별을 일 삼는 생각, 분별하는 마음이 쉬어야 깨달을 수  있다. 생멸하는 마음이 쉬어야 깨달 수 있다.

 

화두를 드는 것보다 더 좋은게 이러한 비유(比維)를 통해서 깨달음에 가장 가깝게 접근 한 후에 생멸하는 마음을 멈춰서 돈오하는 것일 것이다. 물론 각자 근기와 인연에 따라 다르겠지만... 종소리나 뭔 소리를 들었을 때 문득 깨닫거나, 막대기로 머리를 딱 맞았을 때 깨닫는다는 것은 바로 그 순간 분별을 일 삼는 생각, 생멸심이 끊겨서 부동의 진여심이 드러난 것을 말한다.

 

문득 깨닫는 수 밖에 방법이 없다. 그래서 돈오(旽悟)라고 말하는 것이다. 돈오란 그저 한번 순간적으로 진여심이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진여심/깨달음이 번쩍 드러난 것이다. 생멸심이 멈춘 바로 그 순간. 자아/에고는 생멸하는 마음(生滅心), 즉 분별을 일 삼는 생각을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게 멈추면 에고 역시 죽으니까... 그래서 생각이 멈추면 두려워지는 것이다.

 

윤회도 마음에서의 일이고, 열반도 마음에서의 일이다. 마음 이외에서 윤회나 열반을 찾는다면 찾을 수 없다. 마음에는 크게 두가지 마음이 있다. 생멸하는 마음, 즉 생멸심과 생멸하지 않는 부동의 마음, 즉 불생불멸심, 진여심이다. 찰라생 찰라멸 하는 이 생각 저 생각하는 생멸심을 멈추면 그때 불생불멸의 마음,즉 진여심/깨달음이 드러나는데 그때 지혜가 작용해서 깨달으면 된다. 

 

생멸심이 멈춘다고 다 깨닫는가? 그건 아니다. 다만 생멸심이 멈추는 그게 훨씬 깨닫는데 유리할 뿐이다. 그래서 선업, 즉 쌓은 공덕이 많아야 깨닫는다는 말도 있다.

 

모든 분들 다 깨달으시길 성불하시길...( )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글쓴이 : - 반야바라밀 -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