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진리(眞理)는 없다,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진리(眞理)이기 때문이다.

장백산-1 2022. 1. 18. 16:26

진리(眞理)는 없다,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진리(眞理)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 '예스' 라고 말하라.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의 세계는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 '옳다'. 그리고 '아름답다' 당신이 과거에 저지른 수많은 잘못들에 대해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괜찮다'고 말하라. 그리고 잘못들을 '용서하라' 지금 여기 이 순간 자리라는 삶의 매 순간은 그 매 순간 자체로 숭고하고 경이롭고 아름답다.

당신은 결코 '잘못'을 저지른다 거나, '죄'를 지을 수 없다. 당신 스스로 잘못을 저질럿다거나 죄를 지었다거나 그렇다고 여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주법계, 신, 붓다는 그 누구도 심판하거나 벌을 주지 않는다. 심판을 하고 벌을 주는 유일한 존재는 '나' 의 생각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잘못을 했음에도 불구하고,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남들을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술을 퍼 마심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매일같이 싸움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이고 나 밖에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본래 이미 아름답고 경이롭고 온전한 진리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있는 그대로의 그것들 자체로써 온전(穩全)한 '진리(眞理)'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당신으로써 살아가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당신의 삶은 온전한 진리이다.

당신은 아무 이유도 없이,그 무엇을 해야 할 필요도 없이, 계율을 지키지 않더라도, 절이나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신, 붓다를 섬기지 않더라도, 종교가 있거나 없거나, 직업이 있거나 없거나, 돈이 있거나 없거나, 그 어떤 이유도 없이, 그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아름다우며, 매 순간 진리로써 피어나고 있다.

 

삶에 실패란 없다. 실패처럼 여겨지는 삶의 공부가 있을 지언정, 삶에 실패는 없다. 사회가, 종교가, 법이,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강조해 왔던 말들, 이렇게 살아라' '이것을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살아야지만 착한 사람이다' '이 계율이나 율법을 어기지 말라' '이것을 어기면 지옥에 간다' '이런 행위를 신께서는 싫어한다'라고 말해왔던 사람들을 구속하고 제한하고 억압해 왔던 그 모든  말들의 사슬에서 자유(自由)로와지라.

이와 같이 나를 구속하고 제한하고 억압하며, 두렵게 만들어 왔던, 모든 고정관념이라는 틀로부터 자유로와 지라. 그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다르마의 속성이다.

진리라는 미명 하에, 종교라는 이름 하에, 특정한 가르침이나 율법 하에 사람들을 구속 제한 억압시켜 놓고, 그런 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거나, 최악의 과보를 받는다거나 라고 사람들을 기만해 왔던 그 모든 도그마를 이제는 놓아버릴 때가 되었다.

 

진리, 종교, 특정한 가르침, 특정한 율법 등 그러한 방편들에 구속 당하고, 제한 당하고, 억압 당하고, 꽁꽁 갇혀서 자유를뺏기고 살아 온 지난 날들을 생각해 보라. 방편(方便)은 사람들이 자유로와지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지만, 역사를 이어오며 많은 사람들은 그 방편에 스스로 갇힌 채 방편 뒤에 드넓고도 광활한 자유로운 진리가 있음을 보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당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야말로 참이고 진리이다. 그러니 다른 그 누구에게도, 어떤 사상이나 철학에도 의존하고 기대거나 얽매일 필요는 없다. 사상이나 철학을 배울 수는 있을 지언정, 사상이나 철학이나 거기에 속박되어 자신의 자유를 가두지 말라.

 

자유를 가르치는 학교에서 자유를 가르치기 위해 학생들을 통제하고 자유롭지 못하게 제한하는 각종의 규칙을 만들어 놓고, 그 틀 안에서 수업을 하며, 그 수업 속에서 자유에 대해 가르친다고 생각해 보라. 학교에서만이 올바른 자유를 가르쳐 줄 수 있으며, 학교에서만이 진정한 자유를 배울 수 있다고 억압하면서, 만약 학교를 벗어나게 된다면, 당신은 자유를 박탈당하게 될거라고 두려움을 조장한다.

 

이제 자유를 억압하고 두려움을 조장하는 그런 학교에서 자유롭게 뛰쳐나와야 할 때다. 학교 밖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 아니, 이미 학교에서 배울 필요도 없이, 나라는 존재 자체, 내가 살고 있는 이 우주법계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온전한 진리의 현현이었다. 당신은 학교에서 아무리 배운다고 할지라도, 학교가 가르쳐 준 도그마에 갇힐 수밖에 없다. 학교가 사람들에게 그 도그마 만이 진리라고 믿게 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왜 학교가 사람들을 그렇게 바보로 만드는 것일까? 사실은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고정된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 그 자체의 진리는 없다. 다만 내가 믿는 진리가 있을 뿐이다. 왜 그런지 아는가? 모든 것은 자기 규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규정하는 나의 진리가 있을 뿐, 그것 자체로써 온전한 객관적 진리는 없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核心)이다.

 

내가 이것이 진리라고 규정하는 나의 진리가 있을 따름이다. 방편의 진리가 있을 따름이다. 그동안 세상에서 이야기 해 온 진리라는 말은 진리가 아니었다. 석가모니 부처 입멸 후 500여 년 경 '나가르주나'라는 제2의 석가라는 보살은, 그러한 사실을 승의제, 제일의제라고 이름함으로써,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진리라고 설했다. 절에서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며, 가르칠 수 있는 진리는 그저 세속제, 즉 방편의 진리 밖에 없음을 역설하였다.

 

벽에 '낙서금지'라는 글을 씀으로써 벽에 낙서를 하는 것을 금지시킬 수 있는 방편은 될 수 있지만, 낙서금지라는 그 말 자체가 이미 낙서인 것이다. 낙서금지라는 말을 방편으로 받아들일지언정, 낙서금지라는 말을 따라 너도 나도 벽에다 '낙서금지'라고 낙서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까지 역사가 해 온 일, 종교와 사상가와 진리라고 들어온 모든 가르침이 해 온 일이 '낙서금지'라는 말의 덧칠에 불과했다.

이제 낙서금지라는 그 말을 분석하고, 따라 쓸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저 그 텅 빈 벽에 어떤 낙서도 하지 말라. 그저 텅 빈 채로 있으라. 그저 매 순간에 존재하고 있을 뿐, 어떤 방편의 글씨도 쓰려고 하지 말라. 우주법계는 그저 매 순간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그것이다. 붓다는 그저 매 순간 온전히 존재함이다. 신은 매 순간의 있음이다. 아무런 판단도 없고, 그 어떤 진리라는 생각도 없으며, 그저 존재 그 자체다. '낙서금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 그저 텅 빈 본질만이 남게 될 것이다.

 

떠들지 마!'라고 소리치지만, 사실은 그 말 자체도 소음에 불과하다. 이제 그런 말도 따라하지 말고, 그저 침묵으로 존재하라. 떠들지 않게 하기 위한 그 어떤 말도 사실은 다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기에 그 어떤 말도 진리 그 자체일 수는 없다. 소음일 뿐, 진리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진리는 없다. 진리가 없다는 말은 곧 모든 것이 진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는 없지만, 그렇기에 당신이라는 삶은 그 자체로 진리인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어떤 행위를 하든, 당신의 삶은 숭고한 진리이다. 그렇기에 진리는 없으며, 자기 규정, 자기만의 진리가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옳다. 자기 진리에서는 언제나 옳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리다.

붓다는, 신은, 진리는,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의지를 부여해 주었다. 붓다는 나를 통해 진리를 드러낸다. 신은 꽃 한 송이를 통해 진리로 피어난다. 산과 들과 꽃 한 송이와 당신과 나를 빼고, 별도의 신이나 붓다가 있다고 생각지 말라.

아무리 수준이 낮거나, 돈이 없거나, 계급이 낮거나, 능력이 없거나, 성격이 나쁘거나,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를 업신여기지 말라. 그는 그 어떤 높은 자리에 있는 그 어떤 고귀한 자리에 있는 성스러운 사람과 티끌 만큼도 다르지 않다. 그는 그 자신의 진리를 꽃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지위가 높다 낮다, 잘났다 못났다, 선하다 악하다는 등의 분별(分別)은 무명(無明)에 휩싸인 어리석은 인간이 행하는 차별심일 뿐, 진리는 그런 차별심, 분별심을 모른다. 진리는, 붓다는, 신은 오직 일체 모든 존재를 완전히 동등하게 사랑하며, 존귀하여 여기며, 찬탄할 뿐이다.

 

내가 남들보다 잘난 부분에 대해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다면 당신은 오히려 이 마음공부를 통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은 없다는 사실을 결국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나보다 높지 않고, 낮지도 않으며, 나보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신의 사랑을 더 많이 받거나 적게 받지도 않으며, 더 많이 깨달았거나 덜 깨달은 것도 아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온높고 낮지 않은 자기 자신의 온전한 진리의 길을 아름답게 걷고 있는 중이다. 우리 모두는 신이며, 붓다이고, 진리 자체로써 동등하다.

설사 나쁜 짓을 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 삶을 배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모두 아름답다. 가해자는 가해자의 몫을 통해 깨닫고, 피해자는 피해자의 몫을 통해 깨닫는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원한과 복수의 관계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깨닫게 해 주는 아름다운 스승이요, 사랑스런 도반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피해 받음을 통해, 핍박 받음을 통해 무언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었던 사람, 혹은 피해 받는 것을 스스로 원했던 사람이 이 세상이라는 연극 속에서 피해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을 뿐이다. 가해자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가해자 피해자라는 연극배우 양쪽 모두는 저마다 자신의 진리를 행위하고 있을 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용서받고 있다. 물론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를 빼고.

처벌이나, 죄의 과보는 언제나 나 자신이 원했을 때만 온다. 만약 내 안에서 온전히 그 모든 것을 용서했고, 그 모든 것이 다 완전했음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게 된다면 당신은 과보를 받을 필요가 없다. 업에 대한 과보는 무조건 기계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들의 근원(根源)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존재다. 그저 존재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니, 더이상 자기 자신을 구속하고 제한하고 억압하지 말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어떻게 잘못 되지 않을까 하고 염려하지 말라. 모든 사람들은 완전히 안심해도 좋다. 이 세상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 죽음 이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들의 근원(根源), 우주(宇宙)의 근원(根源)은 자비와 사랑이라는 에너지의 파동(波動), 그 파동 안에 넘실거릴 뿐이다. 넘실거리는 자비와 사랑이라는 에너지의 파동 거기에 악, 두려움, 근심, 걱정, 죄라는 분별심은 붙을 자리가 없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역사에서, 종교에서. 수도 없이 많은 각종의 학교에서 가르쳐 온 모든 방편들을 넘어 설 수 있어야 한다. 그 모든 방편들을 넘어 자기의 근원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온전한 존재함, 그저 '있음'으로 매 순간에 있는 것이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라는 매 순간에 행복하게 존재하고 있으라. 완전히 안심한 채, 어떤 두려움도 없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라는 매 순간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만 하라.

2013.08.29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