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전(눈앞)을 잘 살펴라 - - 경봉스님
누구든지 한 생각 한 생각을 바르게 하면 부처님의 경계로 들어가고, 한 생각 한 생각을 바르게 하지 못해 어두우면 고통받고 힘든 육도(六道 : 지옥세계, 아귀세계, 축생세계, 아수라세계, 인간세계, 천상세계)를 윤회(輪廻)하는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이 일으키는 한 생각은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다. 한 생각을 내는 주인공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여 조금도 여윈 때가 없다.
만약 한 생각을 잘 다스려 탐 • 진 • 치 삼독심의 번뇌 망상을 잘 극복하면, 얼마든지 행복하고 멋진 삶을 살 수가 있다. 잠시 한 생각을 돌이켜, 육신 이것 때문에 탐• 진• 치 삼독심이 일어나 인생을 망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몸뚱이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의 몸뚱이는 여러 가지의 인연(因緣)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허망한 것으로, 그 인연들이 다하면 사라져버릴 물건이다. 힘찬 울음소리를 터뜨리며 이 세상에 태어난 뒤로 '부모다, 부부다, 자식이다, 돈이다, 출세다, 명예다, 권력이다' 하면서, 단맛 쓴맛을 고루 겪다가 늙음이 오고 병마가 닥치면 자리에 누워 신음한다. 고통이 심해지고 신음이 높아지면 숨결도 가빠진다. 결국 숨 한번 되돌리지 못하면, 들어갔던 숨이 나오지 않으면 이 몸은 죽고 만다. 물론 가족들은 울고불고 야단법석을 떨며 슬퍼하지만, 이 죽은 물건(몸뚱이)을 오래 놓아 둘 수도 없다.
날씨가 좋다고 해도 죽은 시체는 5일이 되면 썩기 시작하고, 7일이 넘으면 썩는 독한 냄새와 함께 벌레마저 생긴다. 이렇게 되면 화장이나 매장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지금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 몸도 죽어서 화장을 하면, 한 줌의 재로 돌아가고 매장을 하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이 몸뚱이의 인연이 다하는 그 때를 자세히 그려보라, 그런데 육체가 죽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 몸뚱이가 지은 업(業) 때문에 다시 태어나야 한다. 과연 다음에 태어날 곳은 천상세계인가, 인간세계인가, 아수라세계인가, 축생세계인가, 아귀세계인가, 지옥세계인가?
나의 주인공이 무언지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면, 죽고 난 다음에 어디가 어디인지 조차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 몸의 무상(無常)을 느끼고 주인공을 찾는 공부를 지어가야 한다. 몸의 무상(無常)함을 느끼지 못하면 몸을 위하기에 바빠 제대로 정진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묻노니, 여러분은 죽은 다음 과연 어디로 갈 것으로 느껴지는가? 가는 곳을 분명히 알고 주인공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자 하면, 그리고 참으로 멋있게 살고자 하면, 다른 데 정신을 팔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눈앞을 잘 살펴야 한다.목전(目前, 눈앞,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 자리)을 잘 살펴야 한는 말이다. 과연 무엇이 있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뚜렷이 밝고, 지극히 신령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가? 이 소소령령(昭昭靈靈)한 공적영지(空寂靈知)한 이(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를 잘 살펴서 갈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참된 나를 찾는 지름길, 깨달음을 성취하는 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고행하신 까닭이 무엇이었겠는가? 바로 이것을 찾기위한 때문이었다. 이 소소령령한 마음자리, 깨달음의 자리, 참된 나의 자리,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그럼 참된 주인공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몸뚱이에 사로 잡혀 살거나 겉껍질을 씹으며 살아서는 안 된다. 겉껍질을 씹고, 겉모양에 집착한 채, 혼란한 정신과 암담한 마음으로 일상생활에 임한다면, 절대로 참된 주인공을 만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잘 살기나 하는가? 아니다. 그저 갈팡질팡할 뿐이다. 앞길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겉껍질과 겉모양에 집착한 채로 살다가, 한 생각 돌이켜 깨달음을 이룬 옛 도담 한 편을 살펴보자. 중국 당나라 때에 '신찬 선사'라스님이 있었다. 신찬은 고향에 있는 대중사라는 절로 출가하여 은사스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은사는 당시 중국 땅에서 크게 유행을 하고 있던 참선은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경전만을 보고 있었다. 은사스님은 경전을 보면서도 깊은 뜻은 새기지 않고 읽기만 열심히 하였기에, 신찬스님이 가끔씩 은사스님에게 읽고 있는 경전의 내용을 물으면 제대로 된 답을 주지 못하였다.
신찬스님은 생각했다. '저렇게 형식적으로 경전을 보아서는,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신 소식을 깨닫거나 생사를 넘어서는 해탈을 이루기가 힘들지 않을까? 나는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한데, 다른 선지식을 찾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이렇게 작정하고 은사를 하직하고, 대선지식이신 백장화상 밑에서 수행하여 깨달았다. 그리고는 대중사로 돌아오자 은사스님이 물었다.
"내 곁을 떠나 백장회해로부터 무엇을 익히고 왔느냐?" "아무것도 익힌 바가 없습니다." 이 대답에 살아있는 법문(法門)이 담겨 있건만 은사스님은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 뒤로 신찬스님이 사찰 내의 일을 돌보면서 은사스님을 살펴보니, 예전처럼 큰소리를 내어 열심히 경전을 읽고 있었다.
이에 신찬 스님은 '아, 은사스님은 여전히 문자에만 끄달린 채 조박만 씹고 있구나. '조박'은 깨로 기름을 짜고 남은 깻묵을 말하는데, 깊은 뜻은 체득하지 않고 문자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기름은 먹지 않고 깻묵만 씹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하루는 은사스님이 목욕을 하다가 신찬에게 '등을 밀라'고 하였다. 신찬은은사스님의 등을 밀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부처의 몸은 좋은데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 은사스승이 고개를 돌리며 신찬을 바라보자 신찬이 또 말하였다. "영험치 못한 부처가 광명은 놓을 줄은 아는구나." 신찬의 말 속에 뼈가 있는 듯 하였지만 은사스님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목욕을 마친 다음 평소처럼 경전을 읽었다. 그때 때마침 벌이 방으로 들어왔다가 문창호지로 막혀 있는 창문으로 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며 신찬선사가 게송을 지었다.
空門不肯出 (공문불긍출) 投窓也大痴 (투창야대치) 百年鑽古紙 (백년찬고지) 何日出頭期 (하일출두기)
열린 문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문창호지에 부딪히니 크게 어리석구나.
백년동안 창호지를 뚫는다 한들 어느 날에 문 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신찬의 게송은 공덕 삼아 형식적으로 경전을 읽어서는 생사해탈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은사스님도 눈치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목욕을 할 때 들은 말과 지금 읊은 게송을 새겨보다가 문득 느꼈다. "필시 신찬이가 깨달았나보다" 그리고는 읽던 경전을 덮으며 신찬에게 물었다.
"너의 말을 듣자하니 매우 이상하구나. 신찬아, 지난번에 나를 떠나 누구를 만났더냐?" "저는 백장화상으로부터 쉴 곳을 가르쳐 주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은사스님의 덕을 갚으려 할 뿐입니다." 이에 은사스님은 대중에게 공양을 차려 잘 대접한 다음 신찬 선사에게 설법을 청하였으며, 신찬은 법상에 올라 법문을 설하였다.
靈光獨露 (영광독로) 逈脫根塵 (형탈근진) 體露眞常 (체로진상) 不拘文字 (불구문자)
眞性無染 (진성무염) 本自圓成 (본자원성) 但離妄緣 (단리망연) 卽如如佛 (즉여여불)
신령스런 광명이 홀로 빛남에 육근과 육진을 멀리 벗어나 있구나
본체가 그 진상을 드러내 있거늘 어찌 문자에 구속되고 끄달리랴.
참된 성품은 더렵혀짐이 없어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져 있으니
다만 허망한 인연만 떨쳐 버리면 그것이 곧바로 그대로 한결 같은 부처이니라.
은사스님은 이 게송을 듣고 깨달아 크게 환희하였다. "내 나이 늘그막에 이런 지극한 법문을 들을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은사스님과 신찬의 이 이야기 속에는 두 개의 게송이 있다. 그중 '공문불긍출(空門不肯出)'로 시작하는 앞의 게송은, 스승의 수행을 경책 한 것과 동시에 우리의 삶을 꼬집고 있다. 기름을 짜다 남은 깻묵인 조박만을 씹는 삶을 살아서는, 절대로 행복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경책이다.
인생에는 4대의혹(四大疑惑)이 있다.
1. 내가 나를 모르고,
2. 자기의 소소령령한 것이 어느 곳에 있다가 부모태중으로 왔는지도 모르고,
3.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4. 죽는 날이 언제인지를 몰라 갈팡질팡 하고 있다.
자다가 다리가 가려워서 한참을 긁다가 도무지 시원치 않아 눈을 뜨고 보니, 옆 사람의 다리를 긁고 있었다는 것과 같이, 인생의 4대의혹들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의 삶도 남의 다리를 긁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우리가 인간의 몸을 받은 이 한 평생을 되는 대로 그냥그냥 산다면, 어느 날에 갇혀있는 방을 벗어나고, 어떻게 생사윤회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를 일깨워주는 게송이다.
이제 '영광독로(靈光獨露)'로 시작되는 두 번째 게송을 음미해보라. 뚜렷이 밝고 지극히 신령한 주인공은 조금도 감춤 없이 언제나 홀로 당당하게 드러나 있다. 주인공은 눈, 귀, 코, 혀, 몸, 뜻의 육근(六根)과 모양,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의 육진(六塵)을 모두 초월해 있는데 무슨 시절(時節)이 따로 있고 장소(場所)가 따로 있을 수 있겠는가.
아무런 망상 없이 늘 노출되어 있는 참된 주인공은, 어떠한 문자에도 걸림이 없을 뿐 아니라 생사에도 걸림이 없다. 또한 참된 주인공은 물듦이 없다. 흡사 연꽃에다 똥물을 붓고, 청. 황. 적. 백. 흑의 온갖 색깔을 부어도 연꽃이 물들지 않는 것과 같다. 닿기는 닿지만 조금도 물들거나 때묻지 않는다. 연꽃을 진흙에 박았다가 빼내어도 조금도 흙이 묻거나 더렵혀지지 않듯이, 우리 참된 성품(주인공, 진짜 나, 본래면목)에는 모든 더러운 것을 묻히려 해도 묻힐 수가 없다.
자기 스스로가 망상을 피우면 피웠지, 본래부터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는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라는 텅~빈 바탕자리(주인공, 본래면목, 진짜 나,깨달음, 본래성품)는 무한대로 너무나 높고 무한대로 커서 조금도 어리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만 허망한 인연만 떨쳐버리면, 한결 같은 부처가 온전히 드러나고 온전히 작용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라.'고 한다. 깊은 뜻은 잘 모르지만 본래성품(본성)에 관한 법문이기 때문에 통쾌해하고 즐겨 듣는 것이다. 하지만 뜻대로 마음대로 살려면 자꾸자꾸 닦아야 한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뜻대로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마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기에 마음대로 될 리가 없다. 마음대로, 뜻대로 되려면 참된 나(진짜 나)를 발견해야 하고, 참된 나를 찾으려면 정신을 통일해야 한다.
우리들의 생활은 무척 고되고 바쁘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마음을 찾아보겠다는 생각만 있으면, 정신통일을 시도해 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아홉 시간 일하고 다섯 시간 쉬고 여섯 시간 자면 네 시간이 남는데, 이 네 시간을 TV를 보거나 무료하고 한가하게 보낼 것이 아니라,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 마음을 한 데 모아 참선, 염불, 사경, 독경, 기도 등의 정진을 해야 한다. 매일 조금씩 정진을 계속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집중되며,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묘(妙)를 얻게 된다.
이렇게 하여 정신집중(精神集中)의 상태를 이끌어 가게 되면, 마침내는 일할 때나 잠잘 때나 밥 먹을 때나 쉴 때를 가릴 것 없이, 어느 때이고 정신이 집중되어 흐트러지지 않는 일념(一念)의 경지에 몰입하게 되며, 근본적으로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인생의 근본 문제인 생사의 윤회를 초월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생의 노선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있게 되어, 불안과 초조와 번민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뿐더러, 모든 어려움을 일시에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꼭 바른 한 생각으로 마음을 모아, 매일매일 참선, 염불, 주력기도, 사경, 독경들의 수행을 행하여 멋진 장부의 삶을 성취하기 바란다.
물고기는 천개의 강물에서 뛰놀고 용은 끝이 없는 구름 위를 오르누나. 어약천강수 (魚躍千江水) 용등만리운 (龍騰萬里雲)
"할!" 하시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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