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세계, 인식은 분리된 셋이 아닌 하나, 불이법(不二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생각하기에 여기에 '나'가 있고, 나 바깥 외부에 나와 분리된 독자적인 세계(대상)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여기기 때문에 내가 세상(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오늘 절에서 떡국을 먹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떡국이 짜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떡국이 싱겁다고 느낍니다. 싱겁다 짜다는 느낌은 떡국 속에 실체적으로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나에게 떡국의 간이 싱겁다 짜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떡국의 간이 나에게 그렇게 느껴질 뿐입니다.
내 바깥에 짠 떡국 싱거운 떡국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내가 그 실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짜다 싱겁다는 인식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느낌입니다. 다른 사람은 떡국의 간을 다르게 인식하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나와는 다른 떡국이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한 여인을 본다고 가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예쁘게 생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 밉게 생겼다고 합니다.
그 한 명의 여인은 사람에 따라, 인식에 따라, 인연에 따라 존재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쁜 여인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미운 여인으로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일러 인연가합(因緣假合)으로 있다, 가짜로 있다, 실체가 아니다, 무아(無我)다 라고 합니다.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식이 있을 때만 인식에 따라 그런 존재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그 여인 뒤쪽에 있던 자신의 여자친구를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여인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 한 존재, 하나의 대상은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사람의 의식에 따라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이것을 십이처, 십팔계가 공(空)하다고 합니다. 즉 나와 세계(세상)과 인식은 따로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내가 있고 저기 밖에 세상이 있고,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세상 인식 그 셋이 서로 연기적으로 인연화합할 때만 거짓으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육근(안이비설신의), 육경(색성향미촉법), 육식(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중에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그 대상(세상)은 인식이 되지 않습니다. 인연이 화합되어야지만 인연따라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있어야 저것도 있을 수 있기에, 이것은 저것을 근거로 해서 있을 수 있을 뿐입니다. 나와 세상은 따로 따로 독자적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세상은 서로 인연을 맺을 때만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떡국 맛을 보아야 싱거운지 짠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 입맛에는 싱거운 떡국이, 다른 사람에게는 짠 떡국으로 인식됩니다. 같은 떡국이지만, 서로가 다른 떡국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다른 세상이 연기된 것이지요. 자기 인식 속에서 만들어진 자신의 세계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러 만법유식, 유식무경, 삼계유심, 일체유심조 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십이처가 접촉할 때, 만들어진 그림자를 보고, 그 그림자를 진짜로 여기고, 진짜로 있는 것이라고 여겨서 그림자에 집착함으로써, 자기만의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짜고 싱거운 것은 떡국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인식에 있는 것처럼, 사실 세상(대상)은 내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인식이 대상을 접촉하는 인연으로 동시에 생겨납니다. 나와 대상은 동시생, 동시멸하는 허상일 뿐입니다. 대상을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은 둘이 아닌 하나, 불이(不二)입니다. 보는 자, 보는 작용, 보이는 대상, 이런 식으로 나누어 분별할 수는 있지만, 사실 보는 자, 보는 작용, 보이는 대상, 이 셋은 서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는 자가 곧 봄이고, 봄이 곧 보이는 대상이며, 보이는 것이 곧 보는 자입니다. 보는 자, 보는 작용, 보이는 대상, 이 셋은 동시에 생겨나고 동시에 사라집니다.
나와 세상이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유식불교에서는 보는 쪽을 견분, 보이는 대상을 상분이라고 해서, 하나의 의식을 중생들은 보는부분(견분)과 보이는 대상(상분, 보이는 모양)으로 둘인 것으로 착각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나와 세상은 둘이 아닙니다. 내가 곧 세상이고, 보는 자가 곧 보는 대상이며, 생각하는 자와 생각하는 것이 둘이 아닙니다.
꿈 속에서는 나와 세상이 따로 있는 것 처럼 느껴지지만, 꿈에서 깨어나고 보면 꿈 속에서의 나와 세상과 꿈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전부 하나의 꿈이었을 뿐임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곧 그것입니다. 그것이 곧 이것입니다. 내가 곧 세상입니다. 세상이 곧 나입니다. 보는 자가 곧 보이는 대상입니다. 다만 생각이 착각을 일으켜, 나와 세계를 둘로 나누어 놓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안목이 불이중도(不二中道)입니다. 둘이 아닌 실상입니다.
2019.06.04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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