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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 그 속으로 뛰어 들 때 답은 거기에 있다

장백산-1 2024. 8. 30. 15:15

괴로움 그 속으로 뛰어 들 때 답은 거기에 있다


삶은 괴롭다. 사랑 때문에, 미움 때문에 괴롭다. 미래의 불안감에 괴롭고, 사랑받지 못할까봐 괴롭다. 그러나 사실 그 어떤 괴로움일지라도 괴로움 그 속에 답이 있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고 괴로움 바로 거기에 보리(깨달음)과 열반도 함께 있다. 

사람들은 보통 괴로움이 생기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나를 찾아온 괴로움, 외로움, 불안, 미움, 번뇌를 버리고 새로운 행복, 충만, 사랑, 평안, 고요, 용서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어긋난다. 그것은 둘로 나눠놓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분별이기 때문이다.

둘로 나누면 그 중 하나는 선택받고 하나는 선택받지 못한다. 그래서 둘이 서로 싸워야 한다. 번뇌가 온 이유는 ‘번뇌즉보리’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함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길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포기하고, 괴로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괴로움과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충분히 괴로움이 마음껏 나래를 펴고 괴로움으로 발산될 때 오히려 괴로움은 머지않아 사라져 간다.

진흙에서 연꽃은 핀다. 괴로움이 나를 찾아 온 이유는 괴로움으로 발산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이 나를 찾아온 목적은 괴로움에 있는데, 내가 그 괴로움을 거부하려고 하거나 없애려고 애쓴다면 그 괴로움을 상대로 싸우자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괴로움과 나는 한판 싸움을 벌여야 하고 그 싸움에서 나는 언제나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다. 그 싸움은 삶 자체와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괴로움의 본래 목적인 괴로움이 나를 통해 자유자재하게 발산되기를 허용해 주어 보라. 괴로움을 환영하고 받아들여 괴로워해 주기를 허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괴로움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주려고 했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깨달음의 가능성도 함께 따라 오게 된다. 괴로움이 와야 깨달음도 오는 것이다. 번뇌즉보리는 곧 괴로움이 곧 깨달음과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괴로움을 거부하면 깨달음도 거부된다. 

사실 괴로움은 깨달음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숨기고 괴로움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환영이다. 괴로움이라는 가면이 힘을 발휘할 때는 사람들이 그 가면을 진짜라고 여기면서 거부할 동안 뿐이다. 그 괴로움의 가면이 진짜인 줄 알고 거부하게 되면 괴로움은 진짜인 것처럼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짓누르게 된다.

그러나 한 생각 돌이켜 괴로움을 받아들일 때 괴로움이라는 가면 뒤에 있던 진짜의 내가 모습을 보인다. 괴로움이 수용되는 순간, 곧장, 전혀 예상치 못했던 깨달음과 성장이 등장하면서 진흙에서 연꽃이 피는 것이다.  괴로움, 외로움, 불안, 미움, 번뇌를 버리고 행복, 충만, 사랑, 평화, 고요, 기쁨 등을 따로 찾으려 애쓰지 말라. 오히려 괴로움, 외로움, 불안, 고통, 번뇌, 아픔 속에 내가 그토록 찾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삶의 아이러니다. 극과 극은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하나인 것이다. 생사 속에 열반은 피어 있고, 중생 속에 부처는 있다. 색즉시공이며 공즉시색이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고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세상에 따로 따로 나뉘어진 것은 어디에도 없다. 행복과 불행은 둘이 아닌 한 몸이다. 미워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은 극단의 둘이 아니다. 그 둘은 연결되어 있는 하나다. 극단적으로 미워하거나 극단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가지지 말라. 어느 한 쪽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겨 그것만을 선택하려 하지 말라. 선택과 분별과 차별 속에 지혜는 없다.

이것 속에 저것이 있고, 불행 속에 행복이 있다. 삶은 이토록 아름답고도 장엄한 반전이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