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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2) - 정사(正思)

장백산-1 2024. 8. 29. 22:34

팔정도(2) - 정사(正思)


정사(正思)는 정사유(正思惟) 혹은 정지(正志)라고도 부르며, ‘바른 생각’ ‘바른 뜻’ 혹은 ‘바른 마음가짐’ 정도로 해석된다. 여기에서도 ‘바른’은 연기와 중도, 무아와 자비를 의미하는 것으로, 대상에 대해 사유할 때 실체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생각이다.

정사유란 생각하되 생각이 없는 것이다.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되 바르게 하라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것인가? 그 생각이 인연 따라 잠시 왔다가 가는 것임을 분명히 아는 연기적인 지혜다. 그러니 저절로 생각을 인연 따라 쓰기는 하되, 생각은 실체 없음을 자각하기에 그 생각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생각을 하되 생각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정사유다.

그렇기에 정사유는 특정한 방식으로 사유하는것이 아니다. ‘어떤 생각이 정사유’라고 정해진 것은 없다. 그 생각의 내용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의 본질이 연기이며 무아이기에 실체가 없는 허망함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이를 선(禪)에서는 생각이 나오기 이전 자리를 확인한다는 표현을 쓴다.

이렇게 되면 올라오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고, 생각이 올라온다고 해서 그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붙잡아 생각을 나와 동일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오를 때 ‘내가 똑똑하다’고 여기거나, 이기적인 생각이 올라올 때 ‘나는 이기적이다’라고 여김으로써 그 올라오는 생각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은 정사유 수행이 아니다.

연기,무아, 중도적인 사유라면 그 생각 또한 무아임을 알아서 그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실체화하지 않으며, 그 생각은 앞에서 오온과 십팔계에서 공부했듯이 십팔계가 촉함으로써 수상행이, 즉 생각과 느낌과 의지작용이 일어나는 것일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오온과 십팔계의 교리에서 본 것처럼 생각도 느낌도, 의지도 모두 인연 따라[緣起] 생겨난 것일 뿐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으며[無我], 그렇기에 어떤 특정한 생각에 치우쳐[中道]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정사유란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에도 생각이 비실체적인 줄 알아 생각에 집착하지 않고, 그렇기에 누구도 과도하게 미워하거나, 애착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분별없이 봄으로써 진정한 자비로움으로 상대방을 대하게 된다. 정사유를 실천하게 될 때 비로소 모든 대상에 대해 참된 자비심이 피어나게 된다.

『잡아함경』에서는 “어떤 것이 정사인가. 탐욕을 뛰어넘은 생각, 성냄을 없앤 생각, 해침이 없는 생각이다”라고 설한다. 즉 정사유를 실천하면 과도하게 애착하여 탐욕을 일으키지도 않고,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성내지도 않으며, 그 누구도 분별이나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자비로써 대하기에 해치려는 생각이 없다.

신구의 삼업 가운데 가장 중요하면서 근원이 되는 것이 바로 의업(意業)이다. 의업, 즉 생각이 바탕이 되어 말과 행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른 생각이야말로 현실을 창조하는 삼업 가운데 근원적이며 강력한 힘을 지녔다. 그래서 바른 생각이 중요하다. 사유가 바르지 못하면, 연이어 말과 행동 또한 바르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사유는 매우 중요한 ‘수행’이다. 이제 팔정도를 올바로 사유하고 공부한 수행자라면, 염불하고 독경하고 좌선하는 것 못지않게 바르게 생각하는 것, 중도적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분명한 수행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좌선도 오래 하고, 절이며 염불, 독경, 사경 수행도 많이 했지만 삿된 생각을 일으키고, 탐욕과 성냄과 남을 해치려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 사람의 수행은 올바른 수행이 아니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