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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無心) 마음은 없다

장백산-1 2024. 8. 27. 14:56

무심(無心) 마음은 없다


달마스님의 무심론(無心論)을 볼까요? 제자가 화상에게 묻습니다. “마음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화상이 답합니다. “마음은 없다”


불교에서는 보통 무심(無心) 즉 마음은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마음은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는데요, 첫째는 분별심, 번뇌망상심인 사람들의 중생심(衆生心)입니다. 두 번째로 마음은 자성청정심, 무분별심, 본래면목, 자성이라는 한마음 입니다.

즉 무심이라고 말할 때는 첫째, 중생심인 분별심도 없고, 둘째, 불성인 본래면목, 자성이라는 것 또한 없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분별심, 번뇌망상심이 없다고 한 것은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분별망상심은 실체로써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불쑥 불쑥 일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인연 따라 그 인연에 맞게 온갖 생각들이 올라오는 것이지요. 바다에 인연 따라 파도가 치듯, 인연이 화합하면 파도처럼 온갖 생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온갖 올라오는 생각들은 실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번뇌망상의 분별심인 생각들을 실체화시키지요. 하나의 생각이 올라오면 그것을 ‘내가 한 생각’이라고 여깁니다. 내 생각이라고 붙잡는 것이지요. 그 생각과 나를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저 바람 불고 파도 치듯, 인연 따라 잠시 잠깐 왔다가 사라져가는 것일 뿐, 붙잡아 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실체적이라는 말은 생겨났다가 사라지지 않는 고정불변하고 영원불멸의 실다운 본체를 말합니다. 생각은 당연히 고정불변하고 영원불멸의 실다운 본체 그런 것이 아니겠지요. 그러니 마음은 없습니다. 무심입니다.

우리는 이 분별망상심인 생각을 자기 마음이라고 여기면서 마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거나, 질투심을 느낀다거나, 욕심이 생길 때도, 혹은 남들에게 뒤떨어지거나 할 때 그러한 생각들이 올라온 것을 보고 ‘내 마음’이라고 여겨 그것이 진짜 나의 마음인 것으로 착각하여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면 그런 생각이나 판단으로 인해 괴로워할 이유도 없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성, 불성, 본래면목, 마음, 법이라고 불리우는 본래심, 자성청정심, 무분별심을 마음이라고 하는데요, 이 마음 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이나 선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선에서는 보통 자성을 깨달으라거나, 성품을 보라거나, 본래면목에 계합하라고 하는데, 이런 말들 때문에 사람들은 이러한 자성이나 본래면목이라는 것이 따로 실체적으로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본연의 마음이라는 어떤 것이 따로 존재한다고 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성이나, 본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방편일 뿐, 그것이 가리키는 어떤 물건이나 무엇은 없습니다. 그래서 무심(無心)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황벽스님은 “단능무심(但能無心)하면 편시구경(便是究竟)이라” 즉 “무심할 수만 있으면 곧 구경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무심론에서는 무심이 곧 진심이고 진심이 곧 무심이라고 했습니다. 즉 구경성불이라거나, 견성, 깨달음이라는 것은 곧 ‘마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무심, 곧 ‘마음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내가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또한 무심론에서는 연이어 물음에 답합니다.

“나에게 마음은 없으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다” “나의 이 마음 없음은 나무나 돌과 같지 않다. 마치 하늘북과 같아서 비록 마음은 없으나 저절로 여러 가지 묘한 법을 내어 중생들을 교화한다. 또한 여의주와 같아서 마음은 없으나 저절로 여러 가지 변화된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처럼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돌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니, 없으나 그 없는 가운데 일체 만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