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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5) - 정명(正命)

장백산-1 2024. 9. 1. 21:26

팔정도(5) - 정명(正命)


정명(正命)은 ‘바른 생활’ 혹은 ‘바른 생계’, ‘바른 직업’ 등이 정명(正命)이다. 떳떳하지 못한 생계수단으로 영위하는  생활태도를 버리고 정당하고 바른 생활을 정당한 직업과 생계로써 해 나가라는 뜻이다. 정견을 가지고 정사, 정어, 정업이라는 삼업청정으로 정당한 의식주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다. 출가자에게는 바른 생활수단을, 재가자에게는 바른 직업을 의미한다.

출가자들의 정명을 『중아함경』에서는 “만족스럽지 못할지라도 여러 가지 축문을 써서 삿된 생활을 존속하지 말라”고 했고,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점을 봐주며 살아가는 것” 또한 바른 생활수단이 아님을 설하고 있으며, 『잡아함경』에서는 “정명이란 의복, 음식, 침구, 탕약을 법에 맞게 구하고 법에 맞지 않는 것은 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한다.

이 세상은 내가 지은 업대로 그 결과를 받을 뿐이지 부적을 써서 지니고 다니는 등의 요행을 바라거나, 사주를 보고 피해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인과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의 삶일 뿐이다. 과거에 나쁜 업을 많이 지어 업장이 많다고 할지라도 매 순간의 현재에 마음을 돌이켜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살아가게 된다면, 기계적인 업보를 넘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주나 관상이나 점이 모든 것을 말해 줄 수는 없다. 더욱이 사주와 관상을 보게 되면, 그 말에 휘둘리고, 오히려 그 말에 얽매여 있지도 않은 사주의 결과를 진짜로 받게 될 수도 있다. 내 마음에서 관상가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게 됨으로써 그 두려운 마음이 오히려 두려워하는 결과를 끌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과거나 미래보다 매 순간의 지금 여기 현재를 중요시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재가자가 출가자에게 보시하는 것으로 의복, 음식, 침구, 탕약 네 가지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 또한 법에 맞게 구할 것을 요구한다. 법에 맞는다는 것은 곧 연기적으로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온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억지로 보시 받기 위해 요구하거나, 구걸하거나, 점이나 관상을 나쁘게 봐 줌으로써 복을 지어야 한다고 겁박하거나, 자신의 깨달음이 높은 것처럼 꾸며 보시를 하도록 유도하는 이런 것들은 모두 법에 맞지 않는 것이다.

재가자를 위한 정명(正命)도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에는 “무기를 사고 파는 것”, “술이나 고기나 독극물 등을 사고 파는 것” 등이 정명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맛지마 니까야』에는 “사기를 치는 것”, “남을 배신하는 것” 등을 설하고 있다.

무기를 사고 파는 것은 생명을 해치는 도구이기 때문이고, 술이나 고기, 독극물 또한 지혜와 자비의 종자를 끊는 것들이기 때문이며, 사기치고 배신하는 것 또한 타인을 해치는 자비롭지 않은 것이다.

연기와 자비의 가르침은 요즘 대그룹의 그룹윤리와 그룹 경영 방침에도 적용되고 있다. 대그룹과 중소기업은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비즈니스를 앞세우기 보다는 함께 성장, 발전해야 할 동체적인 동반자로 생각하는 상생경영, 동반성장이 많은 대기업들의 주요 경영 방침이 되고 있다. 이것이 연기적인 직업윤리이며, 정명의 실천이 아닐까.

또한 중도적인 정명의 정치는 보수나 진보 어느 한 쪽을 선택할지라도, 어느 하나에 극단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상대 진영은 전부 틀렸고, 나는 전부 옳다고 여기는 극단을 떠나 자비와 상생, 지혜의 정치다.

『법구경』에서는 “마치 저 벌이 꽃의 꿀을 모을 때 그 꽃의 빛과 향기를 다치는 일이 없이 다만 그 맛만을 가져가는 것처럼 비구가 마을에 들어갈 때도 그러하다”라고 한 것처럼,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일체 모든 존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모두가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의식주에 만족하며, 나를 위해 상대방을 다치게 하거나, 나의 이익 때문에 상대의 이익을 줄이는 것이 아닌 모두가 함께 정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공존, 공생의 조화로운 삶의 실천인 것이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