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없다
17. 분별하는 습관이 일으킨 착각
분별심으로 세상 보던 습관 멈추면 마음속 갈등도 문제도 없어
분별심 내려놓고 착각에서 벗어나면 번뇌 없다는 진실에 항상 밝아
사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 길 목적지에 이미 도착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은 마치 서울역에서 어떻게 하면 서울에 도착할 수 있느냐고 역 안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과 같다. 이것은 바다 안에 사는 물고기가 어느 길로 가면 바다를 만날 수 있냐고 묻는 것과 같고, 오른손 엄지가 좌우로 스스로를 움직이면서 자기가 오른손을 만나고 싶다고, 오른손이 대체 어디에 있냐고 하는 이야기와 같다.
이 도리를 ‘대승기신론’에서는 본래부터 우리는 부처와 똑같이 항상 깨어 있다고 해서 본각(本覺)이라고 이름을 하였고, 의상 스님의 ‘법성게’에서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고 해서 처음 깨닫고자 마음을 낸 초발심의 때가 바로 바른 깨달음을 얻은 때와 같다고 이야기했다. 선종에서는 깨달음을 막고 있는 관문이 사실은 없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무문관(無門關)이라 했다. 깨닫기 위해 내가 통과해야 하는 관문은 애초부터 아예 없었다는 기막힌 진실을 세 글자로 함축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실을 일반인은 믿지 못한다. 본인은 아직 부족한 점이 많고도 많은 중생이라고 굳게 믿고, 몸이라는 제약과 마음이라는 한계 속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생을 살면서 세상과 분리된 ‘나’라는 존재가 따로 있다고 철석같이 믿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자꾸 고민하고, 나를 타인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지켜나가야 한다고 여긴다. 더불어,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생각이나 느낌을 본인 것이라고 동일시하면서 다른 생각이나 느낌을 가진 사람들과 갈등한다.
온 세상과 분리된 독립된 내가 따로 있다고 여기면 이 세상 만물도 각각 따로 또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 하늘과 구분되는 구름이 따로 있고, 땅과 다른 나무가 따로 있고, 각각의 건물, 자동차, 국가, 민족, 성별, 종교, 인종, 가치관, 정치적 성향,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 따로 존재한다고 여기며 분별한다. 이런 차별 세계 안에 내가 있다고 느끼게 되면 그 세계 안에서 자기 입장에서 더 좋은 것과 싫은 것으로 분별하게 되고, 그 분별은 좋은 것을 더 가지지 못해서, 또 싫은 것은 멀리하지 못해서 마음이 괴롭게 된다. 분별은 대립과 갈등을 끊임없이 낳게 되고, 심지어는 폭력과 전쟁을 일으킨다.
괴로움이 극에 달했을 때 어느 순간 이런 마음의 고통에서 좀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게 된다. 세상이 바뀌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아무리 정치 민주화가 되고 경제 선진화가 되어도 본인이 느끼는 행복도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느낀다. 그때부터 세상으로 향하던 시선을 자기 내면으로 돌려 내 마음이 우선 편하지 않으면 세상이 아무리 좋게 바뀌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시기에 대승불교와 인연이 있는 사람은 마음의 분별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든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가르침을 배우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생각으로 분별하기 때문에 각각의 존재감을 갖게 되지, 그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것들이 전체 세상과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지 않았음을 차츰 보게 된다. 대상에다 이름을 각각 붙이면서 분별을 하면 다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지만, 이름을 다 떼어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보면 전체와 분리되어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눈앞의 세상이 분별되지 않는 한판으로 보이게 되고, 그 한판 안에 지금까지 따로 있다고 여겨왔던 ‘나’도 들어와 있다.
평생 생각과 짝하고 살면서 생각을 통해 본 세상이 진실이라고 여겼는데, 생각이 쉬어 버리니 그 무엇과도 짝하지 않는 단일한 실상이 눈앞에 보이게 된다. 세상은 그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생각에 미혹되어 분별로 세상을 보던 습관이 멈추니 마음속 갈등이나 문제가 없고, 생생하게 살아 있지만 생각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하나의 실상이 이렇게 펼쳐져 있을 뿐이다. 이 실상은 이 사실에 밝았을 때도 그랬고, 생각에 미혹해서 온갖 감정으로 들끓을 때도 그랬다. 실제로는 항상 여여했지만 생각으로 분별하던 습관이 지금까지 착각을 일으킨 것에 불과했다. 이젠 착각에서 벗어나니 원래부터 세상엔 아무런 번뇌가 없었다는 진실에 항상 밝다.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744호 / 2024년 9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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