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랑찰랑 감정 명상
무엇을 경험하든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자각을 놓치지만 않으면 그 자체가 바로 수행
몇 주 전 서울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끌리는 전시라서 설렜다. 역시 복잡한 서울은 참 낯설었지만,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예명은 ‘무나씨’였다. 불교의 ‘무아’를 상징하는 이름이라 한다. 전시 제목은 ‘~찰랑’이다. 작품들을 오래오래 보았다. 반가사유상이 떠오르기도 하고 숨 명상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 안의 다양한 감정들이 보이는 그림들이 있었다.
내 안의 감정들과 타인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결국 빛나는 마음이라고 귀히 여기는 모습들을 그림에서 볼 수 있었다. 인연이 중첩되어 그 관계에서 내면의 일렁임, 찰랑거림 그리고 평온하고 그윽한 반가사유의 미소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마음임을 보여주었다.
작품집의 글도 참 좋았다. “마음속에서 예기치 못한 기분의 출렁임이 평온한 나를 흔들어 당황케 하기도 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나의 감정을 당신의 뜨거운 마음에 동조한 기분이 녹여 주기도 합니다…어떻게 해서 나와 당신의 기분 일부가 이토록 서로 동조될 수 있는지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으며, 당신으로 인해 나의 마음이 비로소 흐르고 맑게 희석되어 찰랑찰랑 건강하게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는 생각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소리나 시각적 대상에 주의를 집중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을 주시함으로써 생각의 오고 감을 자각할 수 있다. 또 그렇게 하면서 이 모든 생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마음의 본바탕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생각은 마음의 자연스러운 활동이며, 어떤 것이든 창조해 내는 마음의 무한한 능력의 표현”이라 하였다. 생각을 주시하는 일은 생각을 중단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단순히 생각을 알아차림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생각을 아주 견고한 무엇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것들에 집착하거나 두려워한다. 어느 쪽이든 더 강하게 믿을수록 우리는 그것들에 더 많은 힘을 주게 된다. 하지만 생각을 알아차림하기 시작하면 그 힘도 사라지기 시작한다.
명상은 생각보다 훨씬 쉽다. 무엇을 경험하든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자각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그 자체가 수행이다. 이해를 경험으로 탈바꿈하는 일이다. 명상을 계속하면 자신의 경험이 매일매일 그리고 매 순간 달라진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발견할 것이다. 때로는 생각들이 매우 분명하고, 또 때로는 절벽 위로 밀려오는 파도처럼 돌진해 오기도 한다. 둔감하고 몽롱할 때도 있다. 그것도 괜찮다. 그 둔감함 또는 몽롱함을 단지 알아차림하면 된다. 주어진 순간의 모든 경험을 주시하는 것이 명상이고 수행이다. ‘너무 피곤한데 명상을 해야만 할까?’ 하는 생각조차도 그것들을 관찰하면 명상의 방편이 될 수 있다.
경전의 오래된 이야기에서 부처님은 생각을 일으키는 원인과 조건들을 찾는 일의 무의미함을 ‘화살을 맞은 사람’에 비유했다. 원인이나 내력을 조사하는 일을 중단하고 그 경험을 직접 바라보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 고통의 독화살을 빼내고 나면 질문은 무의미하다. 생각과 감정을 다루는 것도 그렇다.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림한 경험이 어떠했는지 스스로 물어본다. 무엇을 경험하든 투명하게 알아차림이 명상이다.
작가 무나씨의 작품을 통해 차차 알게 된 것은 힘을 빼야 편안히 쉴 수 있고, 나의 동작이 이 물살을 타야 비로소 앞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찰랑!
희상 스님 부산유연선원 주지 meine2009@hanmail.net
[1748호 / 2024년 10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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