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는 없지만 눈 앞에 분명한 이것
19. 혹독한 대가 치르게 만드는 실수
깨달음이 노력한 결과라는 건 착각 마음공부는 힘 완전히 빼는 것
우리는 하나의 본성 속에 살기에 완성된 하나의 본성을 알아차림이 중요
처음 구도자가 되어 마음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아주 흔한 실수를 한다. 아주 흔한 그 실수는 누구나 쉽게 하는 흔한 실수이지만, 그 실수의 대가는 너무나도 크다. 잘못하면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잘못된 수행 방향으로 가면서 허송세월하기 쉽기 때문이다. 깨달음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 본인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자기 탓을 하기 딱 쉽다. 사실은 틀린 방향으로 갔던 것이 문제였지, 본인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닌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흔하지만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실수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면 깨달음이 올 것이라는 착각”이다. 많은 수행자들은 자기 본성의 깨달음을 열심히 노력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땀의 결과물로 믿는다. 즉, 자신이 아직 깨닫지 못한 이유를 노력을 더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착각은 정말 가혹하게도 많은 수행자들을 괴롭혔고 아직도 많은 수행자들이 구도자 생활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 이 실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기가 노력을 해서 깨달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마음공부를 하라는 말인가? 내 노력에 의해서 깨달음이라는 최종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렇다면 노력하지 말라는 말인가? 예전처럼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정말로 사실은 아무런 애를 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공부는 내가 힘을 써서 되는 공부가 아니고 반대로 힘을 완전히 빼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내가 뭘 자꾸 어떻게 해 보려고 하면 할수록 이미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는 본성에 내가 자꾸 손을 대면서 엉뚱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내가 노력하는 공부가 아니고 반대로 내 힘을 빼는 공부라고 하는가? 그건 바로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인해 부처 본성을 깨닫게 되고 믿는 것은 부처 본성도 세상 만물처럼 인연생기(因緣生起)한다고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력이라는 인연에 따라 부처 본성이 생겼다가 그 인연 조건이 사라지면 본성도 같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본성이 왔다 갔다 변화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영원한 해탈이라고 하고, 언제나 자유하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는가?
즉, 내 노력의 유무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이미 해탈한 하나의 본성 속에서 우리 모두가 살고 있다. 이 하나의 본성은 이미 완벽하게 완성되어 우리 눈앞에 항상 변함없이 이렇게 살아있다. 우리 삶의 내용도 알고 보면 이 하나의 본성 안에서 펼쳐져 나가기 때문에 잠시도 이 본성을 떠나본 적도,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도 않다. 하지만 어떤 인생의 경험 때문에 본성이 물들어 더럽혀지거나, 변형되거나, 둘로 쪼개지는 일은 없다. 더불어 인간의 한계를 본성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인생의 모습이 본성과 다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한다면 우리의 부처 본성은 내가 노력해서 그것을 얻거나 도달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는 것을 그저 알아차리는 일이다. 알아차린 후에는 본성 자체가 진짜 나이지, 변화하는 몸이나 변화하는 생각, 감정, 살아온 이야기 모음이 진정한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보림의 기간 동안 익숙했던 과거의 나를 낯설게 보게 되고, 그 어떤 것과도 짝하지 않아 낯선 본성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기다릴 뿐이다.
만약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한다면, 그 노력은 어떤 정해진 방향 내지는 집중하는 대상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본성은 온 세상 전체에 꽉 차 있어서 어느 특정 방향이나 일정한 대상으로 향할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만하게 세상 곳곳에 가득한 본성을 보지 못하도록 시야를 인위적으로 좁혀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모든 노력이 쉬고 또 쉬었을 때 문득 자기 본성 스스로가 깨어나 자기를 알아차리는 신묘한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항상 부분만을 알 수 있지 전체를 알 수 있지는 않다. 그래서 본성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알 수는 없지만 눈앞에 이렇게 분명하게 살아있는 것이 있다. 아무런 모양이 없지만 이 세상 모든 모양에서 확인이 되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748호 / 2024년 10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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