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자리 12

너무 평범하고 당연해서 물같고 공기같은 '이것'

너무 평범하고 당연해서 물같고 공기같은 '이것' 공기는 너무 흔하고 당연해서 공기를 코로 들이마시고 내쉬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고, 숨쉬는 것을 지속하기 위해 특별히 애쓸 필요도 없다. 물은 맛이 너무 맹맹하고 심심해서, 탄산음료나 커피 같은 마실 것들에 비해 별로 감흥을 주지 못한다. 이와같이 물이나 공기처럼, 존재에게 가장 핵심적인 것들은 심심하고, 있는 듯 없는 듯 하여 아무 것도 아닌 것 처럼 느껴진다. 깨달음, 자성, 불성, 진리라는 방편으로 회자되는 물같고 공기같은 '이것'도 비슷하다. '이것'은 너무 당연하고 특별할 것이 전혀 없어서, 아이러니하게도 더없이 특별하기도 하다. '이것'은 공기처럼 물처럼 늘 항상 곁에 있지만, '이것'은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나아지거나 ..

그냥 그냥 사는 거지 뭐...

그냥 그냥 사는 거지 뭐... - - 법상스님 그냥 그냥 사는 거지요. 사는데 아무런 이유나 조건도 붙지 않고 억지스럽게 억지로 살려고 하지 않아도 그냥 그냥 살려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그냥 그렇게 말입니다. 산은 늘 그대로 지금 그 자리에 있건만 아무런 불평이나 분별도 하지 않고 물은 늘 주위 환경에 내맡겨서 흐르지만 아무런 시비를 하지 않습니다. 작고 얕은 시냇물은 흐르다가 크고 깊은 강으로 또 바다로 합류합니다. 물은 그렇게 인연따라 흘러가다가 따가운 햇살의 연을 만나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그러다가 인연따라 빗방울로 혹은 우박이며 눈으로 내립니다. 물은 언제부터 그랬냐 할 것도 없고, 왜 그러느냐 할 것도 없고, 어느 모습을 딱히 고집하여..

마음자리

마음자리 / 지광스님 얼굴에 있는 눈인 육안(肉眼)은 물질로 된 것이라 물질세계만을 볼 수 있습니다. 물질세계 이외에 어떠한 세계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육안(肉眼)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이 열려야 물질이 아닌 마음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어떤 눈으로 어떻게 보게 될까요? 분별 망상 번뇌의 덮개인,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라는 삼독심(三毒心)의 덮개를 걷어내야 합니다. 수행을 통해 그 덮개를 벗겨내면, 마음의 눈(心眼)이 밝아져 본래 그 자리, 마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을 비운다’ 는 건 망상 환상이다.

‘마음을 비운다’ 는 건 망상 환상이다. 분별 망상 번뇌가 있다고 해서 ‘마음을 비운다’ 하는 건 환상이다. 마음은 본래 버릴수 없는 조강지처와 같은데 어찌 버리겠는가? 생각은 백두산 천지에 있는 물처럼 끊임없이 솟아나기 때문에 생각을 비우는 건 불가능하다.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등등 진실한 그대로 할 뿐인 거기서 뭘 비우고 말고 하겠는가? 좋다고 하고 싫다고 하는 걸 표현한 마음자리는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니다. 생각을 냈기 때문에 좋다, 싫다 하는 분별심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좋은 것(善)을 지키려면 계속 싸움해야 된다. 좋은 것(善)에는 상대적으로 나쁜 것(惡)이 따라온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자기는 선(善), 상대는 악(惡)이라고 끝없이 싸우는데 그런..

생각과 마음

생각과 마음 - - 서암 스님 흔히들 사람들이 보통 일상적으로 마음이라고 부르는 이 방편상의 이름인 마음은 근본생명 자리에서 볼 때는 근본생명 자리에서 벗어난 근본생명 자리의 그림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그림자에 불과한 방편상의 모든 마음은 쉬지 않고 계속적으로 흘러가는 마음, 즉 고정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생각'인 겁니다. 기쁜 생각을 일으키더라도 단 5분이나 10분을 지속하지 못하고 다른 슬픈 생각이나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서 흐르는 것이 고정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생각인 겁니다. 이것이 전류(轉流 : 일어났다 사라지는 반복을 계속 하면서 흘러감)하는 사람들의 생각이지요. 쉬지않고 계속적으로 흘러가는 마음, 즉 고정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생각이 일어나는 바탕이 '본래 마음' 입니다. ..

불법이란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서 그 사실을 사실대로 굴리는 것이다

佛法이란 事實을 事實대로 알아서 그 事實을 事實대로 굴리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아픕니다. 그러나 아픈 건 몸뚱이지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나'는 조금도 아프지 않아요. 다만 몸뚱이가 아픈 걸 代身해서 내가 알 뿐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와서 설법을 듣는 것도 전생, 전생, 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