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39

장엄한 대지에 펼쳐진 부처의 청정국토

장엄한 대지에 펼쳐진 부처의 청정국토  내가 세상을 구원하겠노라고, 내가 세상 사람들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겠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큰 영향력을 미쳐야만 세상을 밝힐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따로 따로 별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전체로써의 하나다. 그들이 바로 나와 다르지 않고, 내 앞에 서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바로 그들 전체의 반영으로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나와 우주, 그리고 우주 속의 아무리 작은 티끌 하나 조차 전 우주적으로 연결된 전체로써의 하나다. 연결된다는 것은 곧 하나임을 의미하며,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온 우주의 모든 존재는..

깨달음은 없다

깨달음은 없다  사람들 마음은 미래에 집착을 한다. 사회는 사람들의 지성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평범하게 만들어버린다. 사회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지성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사회는 진정한 지성인을 두려워한다. 진정으로 지성적인 사람들은 위험하다. 진정으로 지성적인 사람들은 급진주의자이자 혁명가이다. 진정으로 지성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현재의 상태를 거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사람들이 평범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머물기를 바란다. 사회는 분명 사람들이 능률적이고 기계적이기를 원한다. 사회는 사람들이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기를 바라지만, 진정으로 지성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지성적인 존재가 되면, 진정으로 지성적인 사람은 미래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

지금 여기에서 선도 나오고 악도 나올 뿐 선과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선도 나오고 악도 나올 뿐 선과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善)은 추구하고, 악(惡)은 멀이하려 하지 마십시오. 선과 악이 따로 구분되어 있어서, 사람이 선을 선택하면 착해지고, 악을 선택하면 나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선과 악으로 나누고 분별하면 괴로움이 시작되고, 선과 악의 분별을 여의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본래 선과 악은 없습니다. 선이니 악이니 구분은 내 생각 속에서, 분별심과 분별의식 속에서만 있는 허망한 개념일 뿐입니다. 선과 악을 규정해 놓으면,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인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선은 추구하고 획득해야 하고, 악은 멀리하고 버려야 할 '일'이 시작됩니다. 그 일을 잘 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

주인은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

주인은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 6. 경계 체험의 착각 구도자가 찾는 주인은 부동심, 부동심의 고요한 주인은 곧 ‘지금 여기’ ‘지금 여기’란 성품 깨 있으면 눈앞의 모습, 경계에 집착하거나 상관하지 않아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이지만, 많은 구도자들이 수행의 과정에서 잊고 실수하는 부분이 바로 “왔다 갔다 하는 손님을 주인으로 착각”하는 경우이다. 즉 없었다가 새로 생겨난 신기한 경계 체험을 하게 되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깨달음의 체험인가 보다’라고 여기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경계 경험을 붙잡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경계 체험의 내용은 어느덧 변해서 사라지고 만다. 원래부터 있었던 주인이 아니고 손님으로 찾아온 경계 체험은 인연이 다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떠나게 마련이기 때문..

운명을 바꾸는 게 깨달음이다.

운명을 바꾸는 게 깨달음이다. - - 법륜스님 운명(運命)이 전생(前生)에 이미 정해졌다면 우리는 운명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전생(前生)도, 내생(來生)도 바로 ‘지금 여기’ 현생(現生)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에 눈뜨게 되면 삶이 달라집니다. 상대가 나에게 욕을 할 때 나도 덩달아 욕하면 전생도 원수지간, 현생도 원수지간,, 내생도 원수지간이 되는데 상대가 나에게 욕을 할 때 한번 빙긋이 웃어버리면 전생도, 현생도, 내생도 좋은 인연이 됩니다. 그래서 말을 하기를 한번 깨달으면 ‘삼생의 업이 녹는다’고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그 한 번을 빙긋이 웃지 못하기 때문에 부부지간에도, 부자지간에도 ‘내가 저 인간하고 전생에 무슨 원수가 졌나?’ 합니다. 모든 일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다는 ..

인간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라.

인간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라. 그대는 인간들을 다스리는 통치자(統治者)가 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먼저 그대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대 자신도 스스로 잘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바람에 일렁거리면서 물거품을 만드는 파도가 평화로움과 고요함을 바다에 줄 수 있겠는가? 눈물이 가득한 눈이 눈물이 그득한 마음에 축복의 미소를 보낼 수 있겠는가? 두려움과 분노에 떨고 있는 손이 물 위를 이동하는 배를 수평으로 똑바르게 유지할 수 있겠는가? 인간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은 인간에 의해 통치를 받는다. 또한 인간은 소란과 무질서와 혼란으로 가득 차 있다. 바다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온갖 풍파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바다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밀물과 썰물을 경험하며..

버리고 떠나기

버리고 떠나기(출가) - - 법상스님 출가를 하실 법우님께서 지금까지 살아온 그간의 삶을 정리하면서 보내신 편지 중 일부를 옮겨 봅니다. - - - - - - - - - - 어제는 서울에서 살던 집을 정리 했습니다. 아빠가 월말이면 바쁠 것 같다고, 조금 여유있을 때 정리하자고 해서.. 갑작스럽게 살던 집의 살림살이를 정리하게 됐습니다. 출가(出家)는 작게는 그동안에 나를 즐겁게도 하고 슬프게도 했던 물질적인 모든 것들을 놓아버리고, 크게는 나를 고정짓고 규정했던 허망한한 생각들을 놓아버리고 가는 그런 길이라 하셨는데.... 그런데, 요즘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일상적(日常的)인 것들을 정리하면서 작은 마음 한조각 조차도 놓치못해서 마음 졸이는 내가 보입니다.. 은행에 가서 카드정리 및 통장들 정리..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부처로 살아야 부처이다.

탈종교 시대와 불교 (4)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부처로 살아야 부처이다. 시내 곳곳 수많은 연등과 한 장소 홀로 선 트리는 지향점 달라 트리 꼭대기 ‘별’ 아닌 내 마음 직시하고 세상 밝힐 ‘등불’ 켜야 관념으로 깨달음 추구 말고 오늘 행동·실천해야 미래 부처 돼 지난 글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원심력이 ‘탈중심적’ 변화와 확산의 힘이라면 구심력은 ‘중심’을 향한 집중의 힘을 상징합니다. 부처님오신날의 연등과 성탄절의 크리스마스트리는 두 종교의 이러한 차이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그 꼭대기에 별을 달고 불을 밝히듯이 하늘을 향해 집중하는 모양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크리스마스트리를 사용하는 방식 또한 ‘중앙집권적’입니다. ..

그냥 그냥 사는 거지 뭐...

그냥 그냥 사는 거지 뭐... - - 법상스님 그냥 그냥 사는 거지요. 사는데 아무런 이유나 조건도 붙지 않고 억지스럽게 억지로 살려고 하지 않아도 그냥 그냥 살려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그냥 그렇게 말입니다. 산은 늘 그대로 지금 그 자리에 있건만 아무런 불평이나 분별도 하지 않고 물은 늘 주위 환경에 내맡겨서 흐르지만 아무런 시비를 하지 않습니다. 작고 얕은 시냇물은 흐르다가 크고 깊은 강으로 또 바다로 합류합니다. 물은 그렇게 인연따라 흘러가다가 따가운 햇살의 연을 만나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그러다가 인연따라 빗방울로 혹은 우박이며 눈으로 내립니다. 물은 언제부터 그랬냐 할 것도 없고, 왜 그러느냐 할 것도 없고, 어느 모습을 딱히 고집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