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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전 <한겨레> 논설고문은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논란을 두고 “우리가 미국과 이런 식으로 국가와 정부 관계를 맺는 게 합당하냐”며 최근 한-미 관계를 강하게 비판했다.
2006년 9월 절필 선언 뒤 사회적 발언을 삼가던 리영희 전 논설고문은 지난 8일 한겨레 창간 20돌 기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문제는 누가 봐도 미국의 비위를 맞추고자 한-미 정상회담 전에 뜯어맞추고 모든 것을 양도해 버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광우병 논란을 전교조가 선동하고 있다’는 일부 보수언론의 보도를 두고서도 “평화를 위해 미국이 요구하면 우리는 무조건 받아줘야 한다는 주장”이라며 “(언론이) 한-미 관계의 정확한 위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명박 대통령 방미 중에 나왔던 한-미 전략적 동맹 논의에 대해서도 “명칭이 뭐든 미국 대통령이 한국 최고지도자의 등을 두드리는 목적은 중국을 포위하는 전쟁동맹에서 하수인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지향하는 사회는 미국처럼 돈이 지배하는 사회”라며 “이 대통령의 최근 상황을 보고 있으면 독재에 가까운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이 정말로 북한 주민의 자유 행복을 위해 인권 문제를 끄집어 내는지, 국가를 붕괴시키려는 목적은 없는지 동시에 봐야 한다”고 말했다.
[원로에 길을 묻다] 리영희 선생에게 듣는 한겨레와 오늘 1
[원로에 길을 묻다] 리영희 선생에게 듣는 한겨레와 오늘 2 “새 정부, 독재에 가까운 쪽으로 가는듯해 걱정” » 리영희 1970·80년대 지식인의 ‘사상의 은사’로 불렸던 리영희 선생은 <한겨레> 창간 기틀을 닦았고 논설고문을 맡았다. 한겨레 창간 20돌을 맞아 리 선생에게 언론인의 자세, 한-미 관계, 남북문제 등에 대한 견해를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 8일 경기 군포 산본의 자택에서 김효순 대기자가 했다. 김효순(이하 김) =20년 전 한겨레신문 창간호가 나오던 날 윤전기 앞에서 송건호 사장 등 여러분과 함께 신문을 들고 감격해하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먼저 20돌을 맞는 감회를 묻고 싶습니다. 리영희(이하 리) =한겨레가 원체 험악한 환경에서 출생한 아기라, 성장이 모질고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상보다 놀랍게 성장했지. 솔직히 창간 때는 20년 넘게 지속하리라 예상하진 못했어요. “창간땐 20년 지속하리라 생각 못했는데… 험악한 환경에서 예상보다 놀랍게 성장” 김=인생을 회고할 때 리영희 기자, 리영희 교수 중 어느 쪽으로 기억되길 원합니까? 리=언제 그런 질문에 60%는 저널리스트고, 40%는 대학교수라고 답했지. 주목을 받고 무게가 있었던 글은 교수 때 쓴 것들이었지요. 하지만 한겨레 초창기에 쓴 칼럼은 교수로 쓴 논문보다 가벼운 글이지만, 캄캄한 시대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세계관, 국가관, 한-미 관계에 대한 인식과 우리 정치 본질을 깨닫게 했어요. 이런 점은 저널리스트로 평가될 수 있겠다 싶어요. 김=선생께서는 경성공업학교, 해양대를 나왔습니다. 중앙언론의 기자들은 이른바 명문대 문과 출신이 많습니다. 언론사 입사 뒤에도 취재부서가 아니라 내근인 외신기자를 오래 했습니다. 기자로서는 비주류에 속했는데, 이런 경험이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리=신문기자는 사회적 기능과 내면적 구성의 면에서 두 갈래로 갈라질 수밖에 없어요. 하나는 바깥으로 다니면서 그날그날 변화를 보도하는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중대한 기본적 사실에 대해서 연구와 분석, 이론적인 공부를 하며 기사를 쓰는 두 길이 있지요. 난 그날그날 변화하는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 인간 생활 저변의 기본적 요소들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것이 확대되어 국제 정세, 전쟁 문제까지 내 판독·관찰력의 범위에 들어온 거예요. 남들이 표피를 볼 때 나는 밑바닥을 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미국과 이런 식으로 관계 맺는 게 합당한지…” 기자들에 지식·올바른 세계관·성실·검소 강조 김=구미나 일본 쪽 기자들은 오랜 취재 경험과 평소의 공부를 합쳐 각 분야에서 무게 있는 책을 내는데, 한국 기자들은 이런 면이 약합니다. 한국 언론에 구조적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후배 기자들에게 무엇을 당부하시겠습니까? 리=첫째는 담당 분야에서 이름있는 전문가가 갖고 있는 지식의 최소한 절반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취재를 한다고 하지만 아무 내용도 본질도 모르고 덤벙덤벙 지나가 버린다고. 그날 아침 출근해, 국장실, 장관실 문 열고 들어가 “오늘 아침 뭐 있습니까”하는 기자는 담당 공무원이 속으론 멸시해. 자기들에 버금가는 지식과 수치를 갖고 필요한 부분을 따지는 기자들한테는 공무원들도 진실을 말하게 돼 있어요. 둘째는, 올바른 세계관을 가져야 해요. 광적인 반공주의, 군사독재, 힘의 숭배가 위세를 떨친 박정희 독재시대에서는 평화롭고 미래지향적인 제도와 사상을 갖춰야 했습니다. 이명박 시대로 말하면, 요즘 미국산 쇠고기 때문에 문제인데, 누가 봐도 미국의 비위를 맞추려 한-미 정상회담 가기 전에 뜯어맞추고 모든 것을 양도해 버린 거야. 우리가 미국과 이런 식으로 국가와 정부 관계 맺는 게 합당한지, 우리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 이념을 가져야 해요. 조·중·동 같은 보수신문은 광우병 논란 배후엔 전교조 선동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미국이 요구하면 받아주어야 하고, 그것이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주장인 거지. 지금 한-미 관계는 식민지 상태야. 미국과의 관계에서 절반쯤 노예 같은 식민지 국민처럼, 우리가 한-미 관계의 위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반듯하게 자기 정신과 이념을 세워야 하는데 … . 셋째는 인간적 관계인데, 기자는 성실해야 합니다. 하루이틀이야 어물쩍 넘어갈 수 있지만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적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성실하지 않으면 신뢰를 얻을 수 없지요. 마지막으로 가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을 꾸려나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가난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 기자가 검소하지 않으면 돈의 유혹, 권력의 유혹에 이용당하기 때문이지요. 검소는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내용과 질을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에요. 김=역대 대통령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인기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탄압받던 언론인으로서 ‘그래도 박정희 시대가 좋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리=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하나는 가난에 허덕이는 시대에, 공장 굴뚝이 올라가고 길이 넓어졌어. 사람들이 뭔가 미래에 대한 약간의 희망을 던져주는 것에 매달리는 거지요. 그런 경험을 했고 사고를 하는 구세대가 있으니 여론조사 결과가 그렇게 나오는 게 당연합니다. 둘째는 한국인의 근성 탓인데, 자기를 반노예화하는 한국 사람들은 지금도 독재를 해야 질서가 잡히고 범죄가 없어지고 사회가 통제된다고 본다고. 나는 한국이 민주주의가 됐다는 말은 함부로 안해요. 19세기 초 나폴레옹에게 제왕의 관을 씌우고 환호하던 프랑스 국민과 한국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노예 근성이지요. 독립적 가치 판단, 자기 행동과 자기 생존에 대한 책임, 자립 정신이 없으면 오히려 노예로 있는 게 편한 거야. 김=이명박 대통령이 법과 질서를 강조한 뒤 공안부서가 열심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하는 교수들을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 탐문하기도 했고요. 독재 때 인권유린을 자행했던 공안부서가 국민들에 대한 진지한 사죄 한번 없다가 다시 전면에 나서고 있습니다. 리=과거 시대를 권력주의·권위주의라고 하는데, 이명박 대통령의 성향을 보고 있으면 독재에 가까운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어요. 정보과 형사 일은 잘 몰랐지만 그런 것이 있다는 게 놀랍지는 않아요. 김=74년에 나온 첫 저서 <전환시대 논리>에는 베트남전의 진실을 알리는 글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나중에 베트남에 직접 가서 현장을 본 소감이 있습니까? 리=1992년 한-베트남 국교 수립 직후에 한국 주재 초대 베트남 대사가 “만나고 싶다”고 전화를 했어요. 대사관에 가니 베트남 대사가 우리 말을 잘해요. 호찌민이 베트남 전쟁 기간에 유능한 젊은이들을 외국에 보내 인재를 양성했는데, 이 대사가 평양의 김일성대에서 공부한 거야. 한국과 국교 수립 뒤 베트남 외무부와 공산당이 적대관계였던 한국 내 여론 동향을 조사·연구했다고 해요. 그랬더니 내가 유일하게 베트남 전쟁과 베트남 사태 전반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하고 많은 글을 쓴 것을 알게 됐고, 그래서 한번 보고 싶었다고 그래요. 미 제국주의 본질을 국제정치에서 파고들었고 국가 권력에 대항해 올바르게 정세를 평가하고 국민의 여론을 인도한 저널리스트로서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지요. 나중에 베트남에 가서 전쟁의 상처를 개인적으로 보상하고 싶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기자는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념 가져야” “미국은 중국포위 하수인 하라고 한국 등 두드려 북한 인권문제를 미국식으로만 보는 것은 위험” » 리영희 김=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가 합의된 뒤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서 한-미 전략적 동맹관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역사적 경험이 다르고 국력의 차이가 있는 한국과 미국이 전략적 동맹을 얘기하는 것이 맞나요. 선생께서는 미국 대학에서 연수도 하고 강의도 했는데 미국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리=미국은 2차대전 후 영국과 캐나다 두 나라와만 원자 무기의 비밀을 공유하지요. 미국의 최첨단 세계 지배 수단인 핵무기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는 것은 최고의 국가관계를 의미합니다. 그 밑에 2급 동맹관계가 나토 국가들이고. 일본은 70년대 중반까지 3급, 우리는 5~6급이었지. 명칭이 뭐든 미국이 한국과 일본의 최고권력자 등을 두드리는 것은 딱 한가지 목적 때문이었지요. 중국을 포위하는 전쟁 동맹, 공격 동맹, 중국 공격을 위한 하수인 지위를 부여하는 겁니다. 미국은 돈이 지배하는 사회야. 지금 이명박 대통령이 지향하는 사회인데, 한국 사람들은 미국이 완미한 사회체제라고 착각해요 . 우리가 인간 생존·행복·복지를 우선하는 전통적 유럽 나라들, 특히 북유럽을 미국과 비교할 때, 미국은 군수산업과 금융세력, 정치·사회·문화적 보수세력과 유대인의 조직적 지배 아래 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군산복합체 때문에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했지요. 60년대 초에 미국 군사 영웅인 아이젠하워가 8년 동안 대통령 직무를 마친 뒤 내린 경험적 결론이야. 미국은 전쟁 없이는 유지할 수 없는 나라이고, 전쟁으로서만 먹고 살 수 있는 세력이 군부와 결탁해 미국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고 있어요. 미국은 전쟁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미국은 무서운 나라입니다 ' 김=이명박 정부 출범 뒤 남북관계가 막혀 있습니다. 북한은 ‘이명박 역도’ 등 거친 표현을 쓰며 대남 비난을 하는데,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또 북한 인권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리=일당독재 국가에서 인권 통제는 어느 정도 사실일 거요. 국민을 한 방향으로 몰아세우려면, 권력에 의한 통제는 불가피하겠지요. 진보세력은 북한의 인권 제약 원인이 미국의 압살정책 탓으로 봐서 정면 비판을 주저했겠지만 한쪽으로 보면 그런 평가를 할 수 있는 거지. 이와 더불어 생각할 일은 북한의 인권이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자꾸 그 문제만을 끄집어 내는 세력, 특히 미국이 정말로 인권과 자유·행복을 위해 그러는 것인지, 국가를 붕괴시키려는 목적은 없는지를 동시에 봐야 해. 미국의 정치적 의도를 고려하면, 북한 인권 문제를 미국식으로만 보는 것은 위험해요. 김=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 무용가 최승희 등이 포함된 2차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해방후 60여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이런 작업을 한다든지 적극적 친일과 소극적 행위를 구분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논란이 있습니다만? 리=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내가 한-일 문제 글을 쓴 게 80년대가 끝이지만, 그때 일본 과거행적 비판 못지 않게, 우리 민족 자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같은 글 속에서 병행했어요. 맹자는 “사람이 남의 엄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업신여긴 연후에 남이 업신여긴다”고 했지. 한 나라가 기울 때는 그 나라의 군주든 지배계급이든 민중이든 스스로 자기 나라를 반듯하게 지켜나갈 생각을 포기하고, 그런 능력을 상실했을 때 남이 와서 그 나라를 멸하는 거야. 우리가 자신을 반듯이 다스릴 정신이 없었기에 친일 청산이 60년이나 늦었다. 미 군정,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외세에 빌붙어살면서 민족 내부 숙정을 못하고 오늘까지 이어졌지요. 60년이 지났지만 해야 할 것은 해야 하는 거야. 그렇지만 친일청산 문제는 일제의 악질적 지배에 자발적으로 협력한 자에 한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일제 침략자를 몰아내기 전에는 2천만 동포가 고사리 캐먹는 백이숙제가 되지 않는다면, 면장도 군수도, 교장도 있었고, 누군가 조그마한 기업도 했을텐데. 생존을 위한 소극적 단순 봉사, 그 정도 수준은 역사적 단죄 대상에서 제외해도 괜찮지 않나 싶어요. “한겨레는 위난 속에서 존재가치 빛나는 운명구성원·주주·독자 뜻합쳐 내일 열어나가길” 김=지난해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교수와 기자들이 정치권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유착이란 비판도 나왔지요. 리=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가 있어야 하고 지식을 제공하는 교수가 필요한데, 그 행태가 반교수적, 반이성적, 반대중적, 반학문적이라면 문제가 될 듯해요. 교수와 달리 기자는 독자 대중을 대변해서 사회 문제를 봐야 하는데, 다음 정권에서 단맛을 보고자 공정한 보도를 하지 않고 언론의 목적을 왜곡해 왔다면 문제지요. 저널리스트의 정도를 지키고 있다가 정치권으로 진출하면 굳이 비난받을 일은 아닌데. 평소 정치 쪽에 한 발을 걸쳐놓고 비밀 당원처럼 언론계에서 행동했다면, 비난받아야지요. 김=독재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 가족들 특히 부인의 고생이 컸지요. 언젠가 앞으로의 인생은 부인을 위해서 살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실천했습니까? 리=내가 뇌출혈로 쓰러져 몸이 마비되고 저 분(아내)이 작년에 대장암 수술을 받고 고생하고 있어요. 그전에 불충하고 죄송한 일들도 많았지. 만시지탄이지만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뿐이오. 김=20돌을 맞아 한겨레 구성원, 독자 주주에게 한 말씀을 해주시죠. 리=다른 돈많은 신문사에 비해 수고에 대한 보답이 적은데도 열성적으로 직무를 다하는 한겨레 구성원들이 정말 고맙지. 각종 조사에서 신뢰도 최상 매체로 한겨레가 꼽히는 결과를 보면서 창간정신이 뚜렷이 입증되고 있다고 느껴요. 그리고 한겨레 독자들은 다른 큰 신문의 독자들에 비해 철학과 이념, 역사의식이 투철하다고 생각해요. 그 어려울 때마다 밑받침을 해주고, 같은 길을 걸어준 독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겨레는 없었겠지. 그리고 정권 교체 뒤 지금이 한겨레로서는 기회입니다. 이제야 말로 한겨레가 진가를 발휘할 때지요. 한겨레는 위난 속에서 용기를 발하고 존재가 인정되는 원초적 운명을 지녔기 때문이지. 올바른 언론을 몸으로 체현하고 발현하고 역사를 바꿔가는 한겨레는 그런 험난한 조건 속에서 존재가치를 더욱 빛낼 겁니다. 한겨레 구성원, 독자·주주 모두 뜻을 합치고 더 부수를 늘려가면서 힘있게 내일을 바라보며 갑시다. [인터뷰 후기] 여든에도 3시간 열변…“한겨레니까” 리영희 선생과의 인터뷰는 어렵게 성사됐다. 리 선생은 2000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졌다. 2006년 9월 “지적 활동을 마감하겠다”고 선언하고 집필과 사회적 발언을 접었다. 막무가내로 찾아와 인터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응하지 않거나 부득이한 경우에도 발언을 최소한으로 했다. 하지만 <한겨레> 창간 20돌을 맞으면서 리 선생의 얘기를 꼭 듣고 싶었다. 역사적 기록을 위해, 또 지난 20년 동안 한겨레를 열성적으로 지원해 준 주주와 독자들을 위해 선생을 괴롭히기로 하고 인터뷰를 간곡히 요청했다. 애초 생각은 고령(올해 팔순)인 선생의 건강을 생각해 시사 현안은 될수록 빼고 창간 당시 일화와 지식인으로서의 삶 등 원론적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시간 가량 진행할 생각이었다. 질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김효순 대기자가 작가 박경리씨 상가에 갔다가 사위인 김지하 시인을 만난 얘기를 꺼냈다. 리 선생은 “(고인이) 여든셋이었지?” 말하고는 옆에 앉은 부인 윤영자씨를 보며 “나도 이제 얼마 남았을까”라고 혼잣말 하듯 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그는 거의 세 시간 동안 언론인의 자세, 한-미 관계 등 국제정세,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파문 등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특히 한-미 관계와 미국의 군산복합체를 설명할 때는 대학 강의를 하듯, 구체적 수치와 사례를 들어가며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의 답변을 글로 옮겨 적으니 거의 문법이 완벽한 문장이 됐다. 신경이 손상된 뇌출혈 환자였다는 선입견이 무색해졌다. 막힘없는 논리적 답변을 이어가던 선생은 일부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신했다. “요즘 젊은 기자들에게 충고를 해 달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최근 시대 상황과 존재 양식, 가치관이 달라져 내가 자신 있게 충고하기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예상보다 긴 인터뷰가 끝났다. 옆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부인 윤영자씨가 “오늘은 인터뷰를 오래 하셨네요”라고 하자, 리 선생은 “한겨레니까!”라고 짧게 대답했다. 집 근처 음식점으로 옮겨 취재진들과 늦은 점심을 들면서 그는 “오늘 한 얘기는 모두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겨레 스무 돌이니 여러 인연을 생각해서 한 거야. 그것을 꼭 써줘”라고 다시 강조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리영희 선생은? 1970·80년대 지식인들은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을 읽으며 냉전과 분단상황, 권위주의 체제가 강요한 지적 어둠을 걷어냈다. 80년 신군부가 선생을 광주 민중항쟁의 배후로 조작하자, <르몽드>는 한국 지식인과 대학생의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스승)인 리영희 교수가 잡혀 갔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공안기관 쪽에서 볼 때는 ‘의식화의 원흉’이었다. 그는 60·70·80년대 기자와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아홉차례 연행, 다섯차례 구속, 1012일의 투옥을 겪었고, 해직과 복직을 되풀이했다. - 1929년 평북 운산 출생 - 50년 한국해양대 졸업, 군 입대 - 57년 육군 소령 예편, 합동통신사 입사 - 64년 조선일보로 이직,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제안 준비’ 기사로 구속 - 69년 박정희 정권 압력으로 조선일보 퇴사, 다음해 합동통신 재입사 - 72년 한양대 신방과 교수 - 80년 광주항쟁 배후 혐의 조작 구속 - 88년 한겨레신문 논설고문·이사 - 89년 한겨레신문 방북취재 기획관련 보안법 위반 구속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핫이슈 : 창간특집 홈 • 중국 ‘창바이 공정’…공항·스키장 개발 광풍 • 리영희 “새 정부, 독재에 가까운 쪽으로 가는듯해 걱… • 노무현 “하나의 논리로써 모든 문제 설명말길” • 김대중 “학생·중산층·지식인 독자폭 더 넓혀야” • “정체성 유지하며 달라진 독자요구 수용해야” • 김영삼 “나 비판땐 화났지만 신문 할 일 잘했다” • 창간호 어찌나 기쁘던지…30부 사서 지하철에 뒀죠
[원로에 길을 묻다] 리영희 선생에게 듣는 한겨레와 오늘 2
“새 정부, 독재에 가까운 쪽으로 가는듯해 걱정” » 리영희
“새 정부, 독재에 가까운 쪽으로 가는듯해 걱정”
1970·80년대 지식인의 ‘사상의 은사’로 불렸던 리영희 선생은 <한겨레> 창간 기틀을 닦았고 논설고문을 맡았다.
한겨레 창간 20돌을 맞아 리 선생에게 언론인의 자세, 한-미 관계, 남북문제 등에 대한 견해를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 8일 경기 군포 산본의 자택에서 김효순 대기자가 했다.
김효순(이하 김) =20년 전 한겨레신문 창간호가 나오던 날 윤전기 앞에서 송건호 사장 등 여러분과 함께 신문을 들고 감격해하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먼저 20돌을 맞는 감회를 묻고 싶습니다.
리영희(이하 리) =한겨레가 원체 험악한 환경에서 출생한 아기라, 성장이 모질고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상보다 놀랍게 성장했지. 솔직히 창간 때는 20년 넘게 지속하리라 예상하진 못했어요.
“창간땐 20년 지속하리라 생각 못했는데… 험악한 환경에서 예상보다 놀랍게 성장”
김=인생을 회고할 때 리영희 기자, 리영희 교수 중 어느 쪽으로 기억되길 원합니까?
리=언제 그런 질문에 60%는 저널리스트고, 40%는 대학교수라고 답했지. 주목을 받고 무게가 있었던 글은 교수 때 쓴 것들이었지요. 하지만 한겨레 초창기에 쓴 칼럼은 교수로 쓴 논문보다 가벼운 글이지만, 캄캄한 시대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세계관, 국가관, 한-미 관계에 대한 인식과 우리 정치 본질을 깨닫게 했어요. 이런 점은 저널리스트로 평가될 수 있겠다 싶어요.
김=선생께서는 경성공업학교, 해양대를 나왔습니다. 중앙언론의 기자들은 이른바 명문대 문과 출신이 많습니다. 언론사 입사 뒤에도 취재부서가 아니라 내근인 외신기자를 오래 했습니다. 기자로서는 비주류에 속했는데, 이런 경험이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리=신문기자는 사회적 기능과 내면적 구성의 면에서 두 갈래로 갈라질 수밖에 없어요. 하나는 바깥으로 다니면서 그날그날 변화를 보도하는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중대한 기본적 사실에 대해서 연구와 분석, 이론적인 공부를 하며 기사를 쓰는 두 길이 있지요.
난 그날그날 변화하는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 인간 생활 저변의 기본적 요소들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것이 확대되어 국제 정세, 전쟁 문제까지 내 판독·관찰력의 범위에 들어온 거예요. 남들이 표피를 볼 때 나는 밑바닥을 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미국과 이런 식으로 관계 맺는 게 합당한지…” 기자들에 지식·올바른 세계관·성실·검소 강조
김=구미나 일본 쪽 기자들은 오랜 취재 경험과 평소의 공부를 합쳐 각 분야에서 무게 있는 책을 내는데, 한국 기자들은 이런 면이 약합니다. 한국 언론에 구조적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후배 기자들에게 무엇을 당부하시겠습니까?
리=첫째는 담당 분야에서 이름있는 전문가가 갖고 있는 지식의 최소한 절반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취재를 한다고 하지만 아무 내용도 본질도 모르고 덤벙덤벙 지나가 버린다고. 그날 아침 출근해, 국장실, 장관실 문 열고 들어가 “오늘 아침 뭐 있습니까”하는 기자는 담당 공무원이 속으론 멸시해. 자기들에 버금가는 지식과 수치를 갖고 필요한 부분을 따지는 기자들한테는 공무원들도 진실을 말하게 돼 있어요.
둘째는, 올바른 세계관을 가져야 해요. 광적인 반공주의, 군사독재, 힘의 숭배가 위세를 떨친 박정희 독재시대에서는 평화롭고 미래지향적인 제도와 사상을 갖춰야 했습니다.
이명박 시대로 말하면, 요즘 미국산 쇠고기 때문에 문제인데, 누가 봐도 미국의 비위를 맞추려 한-미 정상회담 가기 전에 뜯어맞추고 모든 것을 양도해 버린 거야. 우리가 미국과 이런 식으로 국가와 정부 관계 맺는 게 합당한지, 우리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 이념을 가져야 해요.
조·중·동 같은 보수신문은 광우병 논란 배후엔 전교조 선동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미국이 요구하면 받아주어야 하고, 그것이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주장인 거지. 지금 한-미 관계는 식민지 상태야. 미국과의 관계에서 절반쯤 노예 같은 식민지 국민처럼, 우리가 한-미 관계의 위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반듯하게 자기 정신과 이념을 세워야 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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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인간적 관계인데, 기자는 성실해야 합니다.
하루이틀이야 어물쩍 넘어갈 수 있지만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적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성실하지 않으면 신뢰를 얻을 수 없지요.
마지막으로 가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을 꾸려나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가난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 기자가 검소하지 않으면 돈의 유혹, 권력의 유혹에 이용당하기 때문이지요. 검소는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내용과 질을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에요.
김=역대 대통령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인기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탄압받던 언론인으로서 ‘그래도 박정희 시대가 좋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리=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하나는 가난에 허덕이는 시대에, 공장 굴뚝이 올라가고 길이 넓어졌어. 사람들이 뭔가 미래에 대한 약간의 희망을 던져주는 것에 매달리는 거지요. 그런 경험을 했고 사고를 하는 구세대가 있으니 여론조사 결과가 그렇게 나오는 게 당연합니다.
둘째는 한국인의 근성 탓인데, 자기를 반노예화하는 한국 사람들은 지금도 독재를 해야 질서가 잡히고 범죄가 없어지고 사회가 통제된다고 본다고. 나는 한국이 민주주의가 됐다는 말은 함부로 안해요.
19세기 초 나폴레옹에게 제왕의 관을 씌우고 환호하던 프랑스 국민과 한국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노예 근성이지요. 독립적 가치 판단, 자기 행동과 자기 생존에 대한 책임, 자립 정신이 없으면 오히려 노예로 있는 게 편한 거야.
김=이명박 대통령이 법과 질서를 강조한 뒤 공안부서가 열심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하는 교수들을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 탐문하기도 했고요. 독재 때 인권유린을 자행했던 공안부서가 국민들에 대한 진지한 사죄 한번 없다가 다시 전면에 나서고 있습니다.
리=과거 시대를 권력주의·권위주의라고 하는데, 이명박 대통령의 성향을 보고 있으면 독재에 가까운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어요.
정보과 형사 일은 잘 몰랐지만 그런 것이 있다는 게 놀랍지는 않아요.
김=74년에 나온 첫 저서 <전환시대 논리>에는 베트남전의 진실을 알리는 글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나중에 베트남에 직접 가서 현장을 본 소감이 있습니까?
리=1992년 한-베트남 국교 수립 직후에 한국 주재 초대 베트남 대사가 “만나고 싶다”고 전화를 했어요.
대사관에 가니 베트남 대사가 우리 말을 잘해요. 호찌민이 베트남 전쟁 기간에 유능한 젊은이들을 외국에 보내 인재를 양성했는데, 이 대사가 평양의 김일성대에서 공부한 거야.
한국과 국교 수립 뒤 베트남 외무부와 공산당이 적대관계였던 한국 내 여론 동향을 조사·연구했다고 해요. 그랬더니 내가 유일하게 베트남 전쟁과 베트남 사태 전반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하고 많은 글을 쓴 것을 알게 됐고, 그래서 한번 보고 싶었다고 그래요.
미 제국주의 본질을 국제정치에서 파고들었고 국가 권력에 대항해 올바르게 정세를 평가하고 국민의 여론을 인도한 저널리스트로서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지요. 나중에 베트남에 가서 전쟁의 상처를 개인적으로 보상하고 싶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기자는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념 가져야”
“미국은 중국포위 하수인 하라고 한국 등 두드려 북한 인권문제를 미국식으로만 보는 것은 위험”
김=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가 합의된 뒤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서 한-미 전략적 동맹관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역사적 경험이 다르고 국력의 차이가 있는 한국과 미국이 전략적 동맹을 얘기하는 것이 맞나요. 선생께서는 미국 대학에서 연수도 하고 강의도 했는데 미국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리=미국은 2차대전 후 영국과 캐나다 두 나라와만 원자 무기의 비밀을 공유하지요. 미국의 최첨단 세계 지배 수단인 핵무기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는 것은 최고의 국가관계를 의미합니다.
그 밑에 2급 동맹관계가 나토 국가들이고. 일본은 70년대 중반까지 3급, 우리는 5~6급이었지.
명칭이 뭐든 미국이 한국과 일본의 최고권력자 등을 두드리는 것은 딱 한가지 목적 때문이었지요. 중국을 포위하는 전쟁 동맹, 공격 동맹, 중국 공격을 위한 하수인 지위를 부여하는 겁니다.
미국은 돈이 지배하는 사회야. 지금 이명박 대통령이 지향하는 사회인데, 한국 사람들은 미국이 완미한 사회체제라고 착각해요
. 우리가 인간 생존·행복·복지를 우선하는 전통적 유럽 나라들, 특히 북유럽을 미국과 비교할 때, 미국은 군수산업과 금융세력, 정치·사회·문화적 보수세력과 유대인의 조직적 지배 아래 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군산복합체 때문에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했지요.
60년대 초에 미국 군사 영웅인 아이젠하워가 8년 동안 대통령 직무를 마친 뒤 내린 경험적 결론이야.
미국은 전쟁 없이는 유지할 수 없는 나라이고, 전쟁으로서만 먹고 살 수 있는 세력이 군부와 결탁해 미국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고 있어요. 미국은 전쟁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미국은 무서운 나라입니다 '
김=이명박 정부 출범 뒤 남북관계가 막혀 있습니다. 북한은 ‘이명박 역도’ 등 거친 표현을 쓰며 대남 비난을 하는데,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또 북한 인권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리=일당독재 국가에서 인권 통제는 어느 정도 사실일 거요. 국민을 한 방향으로 몰아세우려면, 권력에 의한 통제는 불가피하겠지요.
진보세력은 북한의 인권 제약 원인이 미국의 압살정책 탓으로 봐서 정면 비판을 주저했겠지만 한쪽으로 보면 그런 평가를 할 수 있는 거지.
이와 더불어 생각할 일은 북한의 인권이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자꾸 그 문제만을 끄집어 내는 세력, 특히 미국이 정말로 인권과 자유·행복을 위해 그러는 것인지, 국가를 붕괴시키려는 목적은 없는지를 동시에 봐야 해. 미국의 정치적 의도를 고려하면, 북한 인권 문제를 미국식으로만 보는 것은 위험해요.
김=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 무용가 최승희 등이 포함된 2차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해방후 60여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이런 작업을 한다든지 적극적 친일과 소극적 행위를 구분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논란이 있습니다만?
리=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내가 한-일 문제 글을 쓴 게 80년대가 끝이지만, 그때 일본 과거행적 비판 못지 않게, 우리 민족 자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같은 글 속에서 병행했어요.
맹자는 “사람이 남의 엄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업신여긴 연후에 남이 업신여긴다”고 했지.
한 나라가 기울 때는 그 나라의 군주든 지배계급이든 민중이든 스스로 자기 나라를 반듯하게 지켜나갈 생각을 포기하고, 그런 능력을 상실했을 때 남이 와서 그 나라를 멸하는 거야.
우리가 자신을 반듯이 다스릴 정신이 없었기에 친일 청산이 60년이나 늦었다. 미 군정,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외세에 빌붙어살면서 민족 내부 숙정을 못하고 오늘까지 이어졌지요. 60년이 지났지만 해야 할 것은 해야 하는 거야.
그렇지만 친일청산 문제는 일제의 악질적 지배에 자발적으로 협력한 자에 한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일제 침략자를 몰아내기 전에는 2천만 동포가 고사리 캐먹는 백이숙제가 되지 않는다면, 면장도 군수도, 교장도 있었고, 누군가 조그마한 기업도 했을텐데. 생존을 위한 소극적 단순 봉사, 그 정도 수준은 역사적 단죄 대상에서 제외해도 괜찮지 않나 싶어요.
“한겨레는 위난 속에서 존재가치 빛나는 운명구성원·주주·독자 뜻합쳐 내일 열어나가길”
김=지난해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교수와 기자들이 정치권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유착이란 비판도 나왔지요.
리=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가 있어야 하고 지식을 제공하는 교수가 필요한데, 그 행태가 반교수적, 반이성적, 반대중적, 반학문적이라면 문제가 될 듯해요.
교수와 달리 기자는 독자 대중을 대변해서 사회 문제를 봐야 하는데, 다음 정권에서 단맛을 보고자 공정한 보도를 하지 않고 언론의 목적을 왜곡해 왔다면 문제지요.
저널리스트의 정도를 지키고 있다가 정치권으로 진출하면 굳이 비난받을 일은 아닌데. 평소 정치 쪽에 한 발을 걸쳐놓고 비밀 당원처럼 언론계에서 행동했다면, 비난받아야지요.
김=독재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 가족들 특히 부인의 고생이 컸지요. 언젠가 앞으로의 인생은 부인을 위해서 살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실천했습니까?
리=내가 뇌출혈로 쓰러져 몸이 마비되고 저 분(아내)이 작년에 대장암 수술을 받고 고생하고 있어요. 그전에 불충하고 죄송한 일들도 많았지. 만시지탄이지만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뿐이오.
김=20돌을 맞아 한겨레 구성원, 독자 주주에게 한 말씀을 해주시죠.
리=다른 돈많은 신문사에 비해 수고에 대한 보답이 적은데도 열성적으로 직무를 다하는 한겨레 구성원들이 정말 고맙지. 각종 조사에서 신뢰도 최상 매체로 한겨레가 꼽히는 결과를 보면서 창간정신이 뚜렷이 입증되고 있다고 느껴요.
그리고 한겨레 독자들은 다른 큰 신문의 독자들에 비해 철학과 이념, 역사의식이 투철하다고 생각해요. 그 어려울 때마다 밑받침을 해주고, 같은 길을 걸어준 독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겨레는 없었겠지.
그리고 정권 교체 뒤 지금이 한겨레로서는 기회입니다. 이제야 말로 한겨레가 진가를 발휘할 때지요. 한겨레는 위난 속에서 용기를 발하고 존재가 인정되는 원초적 운명을 지녔기 때문이지.
올바른 언론을 몸으로 체현하고 발현하고 역사를 바꿔가는 한겨레는 그런 험난한 조건 속에서 존재가치를 더욱 빛낼 겁니다. 한겨레 구성원, 독자·주주 모두 뜻을 합치고 더 부수를 늘려가면서 힘있게 내일을 바라보며 갑시다.
[인터뷰 후기] 여든에도 3시간 열변…“한겨레니까”
리영희 선생과의 인터뷰는 어렵게 성사됐다. 리 선생은 2000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졌다. 2006년 9월 “지적 활동을 마감하겠다”고 선언하고 집필과 사회적 발언을 접었다. 막무가내로 찾아와 인터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응하지 않거나 부득이한 경우에도 발언을 최소한으로 했다.
하지만 <한겨레> 창간 20돌을 맞으면서 리 선생의 얘기를 꼭 듣고 싶었다. 역사적 기록을 위해, 또 지난 20년 동안 한겨레를 열성적으로 지원해 준 주주와 독자들을 위해 선생을 괴롭히기로 하고 인터뷰를 간곡히 요청했다.
애초 생각은 고령(올해 팔순)인 선생의 건강을 생각해 시사 현안은 될수록 빼고 창간 당시 일화와 지식인으로서의 삶 등 원론적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시간 가량 진행할 생각이었다.
질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김효순 대기자가 작가 박경리씨 상가에 갔다가 사위인 김지하 시인을 만난 얘기를 꺼냈다. 리 선생은 “(고인이) 여든셋이었지?” 말하고는 옆에 앉은 부인 윤영자씨를 보며 “나도 이제 얼마 남았을까”라고 혼잣말 하듯 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그는 거의 세 시간 동안 언론인의 자세, 한-미 관계 등 국제정세,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파문 등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특히 한-미 관계와 미국의 군산복합체를 설명할 때는 대학 강의를 하듯, 구체적 수치와 사례를 들어가며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의 답변을 글로 옮겨 적으니 거의 문법이 완벽한 문장이 됐다. 신경이 손상된 뇌출혈 환자였다는 선입견이 무색해졌다. 막힘없는 논리적 답변을 이어가던 선생은 일부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신했다.
“요즘 젊은 기자들에게 충고를 해 달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최근 시대 상황과 존재 양식, 가치관이 달라져 내가 자신 있게 충고하기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예상보다 긴 인터뷰가 끝났다. 옆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부인 윤영자씨가 “오늘은 인터뷰를 오래 하셨네요”라고 하자, 리 선생은 “한겨레니까!”라고 짧게 대답했다.
집 근처 음식점으로 옮겨 취재진들과 늦은 점심을 들면서 그는 “오늘 한 얘기는 모두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겨레 스무 돌이니 여러 인연을 생각해서 한 거야. 그것을 꼭 써줘”라고 다시 강조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리영희 선생은?
1970·80년대 지식인들은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을 읽으며 냉전과 분단상황, 권위주의 체제가 강요한 지적 어둠을 걷어냈다.
80년 신군부가 선생을 광주 민중항쟁의 배후로 조작하자, <르몽드>는 한국 지식인과 대학생의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스승)인 리영희 교수가 잡혀 갔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공안기관 쪽에서 볼 때는 ‘의식화의 원흉’이었다. 그는 60·70·80년대 기자와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아홉차례 연행, 다섯차례 구속, 1012일의 투옥을 겪었고, 해직과 복직을 되풀이했다.
- 1929년 평북 운산 출생
- 50년 한국해양대 졸업, 군 입대
- 57년 육군 소령 예편, 합동통신사 입사
- 64년 조선일보로 이직,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제안 준비’ 기사로 구속
- 69년 박정희 정권 압력으로 조선일보 퇴사, 다음해 합동통신 재입사
- 72년 한양대 신방과 교수
- 80년 광주항쟁 배후 혐의 조작 구속
- 88년 한겨레신문 논설고문·이사
- 89년 한겨레신문 방북취재 기획관련 보안법 위반 구속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