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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협회장 징계 명목이 '저작권 위반'이란다. 이런 빵꾸똥꾸 같은 징계는 결국 X팔림을 견딜 수 없었던 그 분의 상처 받은 마음을 달래드리려는 것이었을 게다. 그런데, 사실은 사실인 바, 아래의 내용에 어디 틀린 게 있는가? 억울하면 당당히 나서서 토론하자. 엉뚱한 징계나 남발하지 말고... 그래서 다시 불러왔다. 기록을 위해 KBS 사측이 삭제한 '김인규를 말한다'를 복원한다. 동영상은 저작권 때문에 막혔지만 구토유발의 효과는 여전하다.
김인규 씨는 도둑 취임식에서 ‘정치 권력으로부터 KBS의 독립을 지키러 왔다‘고 공언했습니다. 비록 잠시 정치활동을 했지만 자신은 정치인이 아니라 언론인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럴 것이라고 믿는 일부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MB 특보를 한 것만으로도 분명한 결격이 되겠지만 한번 검증을 해 봅시다.
김인규 씨는 기자였고 본인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김인규 씨는 KBS에서 정치부 통으로 성장했습니다. 이후 정치부장과 보도국장, 센터장, 이사로 승승장구했습니다. 지금부터 오늘의 김인규를 만든 당시 김인규 기자의 활약상을 보시겠습니다. 이 분이 KBS의 정치적 독립을 지킬 수 있을지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반면교사로 기자로서 방송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약간의 구토증상을 유발할 수 있으니 비위가 약한 분들은 각오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워밍업으로 2개만 보여드립니다. <영상을 KBS 사측이 막았기 때문에 텍스트로만 보실 수 있습니다>
1. 87년 1월 15일 민정당 창당 기념식 87년 1월 14일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벌어진 날이다. 새해 벽두부터 수많은 양심인사들이 각종 이적단체 혐의로 구속되고 시국 사건도 끊이지 않고 있었다.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은 정권연장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이 와중에 1월 15일 민정당은 창당 기념식을 열었고 당시 민정당 출입기자였던 김인규 씨는 이를 보도했다.
김인규 씨는 리포트에서 "지난 6년 전 극심한 사회혼란과 정치적 위기라는 시대적 상황속에서 출범한 민주정의당은 무엇보다 구정치질서의 청산과 개혁을 위해 새시대 새정치의 기치를 내걸고 새역사 창조에 나섰습니다. 민정당은 창당 때부터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당원들이 당비에 의해 당을 운영해 나가는 자립정당상을 우리나라 정당사상 처음으로 확립하고 구시대적 정치 병폐의 재현을 막기 위한 청렴정치에 앞장서 왔습니다.
특히 국민속의 정당을 목표로 민생 문제와 관련한 참신한 정책 개발에 주력해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와 국민연금제도 최저임금제 도입, 그리고 농어촌 종합대책 등 실제 국민 복지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서 정책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굳히고 있습니다. 특히 민정당은 선진조국 창조에는 다른 분야에 비해 뒤져 있는 정치 선진화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아래 헌법 개정문제가 제기되자 날로 변화하는 사회 추세에 부응해서 권력의 분산과 국민의 정치 참여라는 두가지 측면에 역점을 둔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마련함으로써 이를 관철시켜야 하는 개헌 정국을 맞았습니다.
그동안 세차례 선거를 통해 집권당의 위치를 다져온 민정당은 이제 88년에 평화적 정부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대업을 차질없이 수행하기 위해 합의 개헌을 통한 의원내각제 관철과 제13대 총선에서의 압승을 통한 정권재창출이라는 시대적 사명에 직면한 것입니다."라고 지껄였습니다.
2. 87년 4월 13일 전두환 “호헌 선언”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일부 폭로되면서 민주화 열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4월 13일 전두환은 “개헌 논의를 유보하고 현행 헌법으로 정부 이양을 한다”는 내용의 ‘4.13 특별 선언’ 발표했다. 김인규 기자의 보도를 보자.
김인규 씨는 전두환 담화와 관련된 리포트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오늘 특별 담화를 통해 임기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른 정부 이양과 국력 소모적인 개헌 논의의 지양을 선언한 것은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고 내년의 양대 국가 대사를 차질없이 차질없이 치르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헌법문제와 관련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명백히 제시한 것입니다. 현시점에서 헌법 문제와 관련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합의 개헌을 추구하면서 무작정 기다리던가 아니면 다수의 힘을 배경으로 일부 정치세력과의 합의만으로 개헌을 강행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현실 여건을 감안할 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이상 일단 국력소모적인 개헌논의를 지양하고 현행헌법에 따라서 안정속에 국가 대사를 실천해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최근 야당의 내분과 갈등으로 대화와 타협에 의한 합의 개헌 기대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대로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은 오히려 시간 낭비이며 책임 회피일 뿐 아니라 앞으로 열달 정도밖에 남지 않은 우리 헌정사의 최초이자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을 여는 평화적 정부 이양에까지 차질을 빚을 것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헌논의 출발의 당초 목적과는 달리 혼미한 현 정국의 원인이 되고 평화적 정부 이양에 장애가 되고 있는 국론 분열적이고 정쟁적인 개헌 논의 자체를 일단 뒤로 미뤄 정치적 파국을 막는 동시에 내년에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른 뒤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헌법문제의 원만한 합의점을 찾는 것이 국가 100년 대계를 위해 최선의 길이라는 통치적 차원의 결단이 내려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라고 지껄였습니다.
김인규 씨는 스스로를 ‘공영방송론자’라고 지칭한다. 1편에서 봤듯이 당시 김인규 기자는 엄혹했던 과거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전두환이라는 희대의 살인마를 미화하고 찬양했다. 그 때부터 권력과의 관계설정이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었다.
누군가는 한 두 개의 과거 리포트만 가지고 “훌륭하신 분”을 폄훼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김인규의 왜곡된 ‘관계설정’은 그 이후에도 계속된다. 누가 1편에 댓글을 달아놨듯이 “20년 동안 한 우물을 판” 셈이다. 나라 전체에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의 물결이 휘몰아칠 때 KBS는 그리고 김인규는 정권 재창출에 여념이 없었다.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시기에 ‘김인규 식 보도’의 주인공도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지금은 MB로 넘어갔다, 당연하게도.)
[ 노태우-김인규 ]편 1. 1987년 6월 3일 노태우, 대통령 후보 제청 군부 독재 정권은 직선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적인 요구를 희석시키기 위해 “평화적 정권 이양”이라는 해괴한 조어를 만들어 낸다. 김인규의 보도에서 당시 노태우의 대통령 후보 제청은 <우리 역사의 큰 전환점> <진정한 민주화 선진화> <헌정사의 새로운 이정표> <대통령의 외골 신앙> <소중한 정성> 등으로 묘사된다. 화가 나서 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사람이 선거보도의 공정성에 대해서 박사 논문을 쓰고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하겠다는 게 지금 상황이다.
김인규 씨는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제청된 것에 대해 "오늘 민정당 대표위원이 중앙집행위원회의 제청으로 차기 대통령 후보 신청 등록까지 마친 것은 내년 초 평화적 정부 이양을 위한 일련의 정치일정 가운데 첫 단계 작업이 이행됐다는 점에서 분명히 우리 역사에 큰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헌정 40년에서 가장 부끄러웠고 우리 헌정사의 비원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아직까지 한 번도 이뤄보지 못한 평화적 정부 이양임에 틀림없습니다. 제1 공화국의 이승만 대통령이나 제3 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도 끝내는 1인 장기집권을 꾀하다가 물리적인 힘에 의해 헌정 중단 사태를 되풀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집권자가 스스로 권력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이같은 평화적 정부 이양을 경험하지 않는 한 우리 정치의 진정한 민주화와 선진화는 이뤄질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일부에서는 여야가 바뀌는 것 만이 평화적 정권교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국민이 선택하는 즉 선거의 결과에 따라야 하는 것이며 이보다도 우선 정부 이양이 없는 우리 정치사에 있어서는 현직 대통령 임기중에 집권여당이 차기 대통령 후보를 결정 제청한 그 자체가 우리 헌정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설정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전두환 대통령의 변함없는 단임의지와 평화적 정부 이양의 외골 신앙이 열매를 맺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정부나 여당이 모두 말 한마디 절차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면서 조심스럽게 정부 이양을 위한 과정을 진행시키고 있는 진지한 분위기 그 자체가 바로 진정한 민주정치를 해 보겠다는 소중한 정성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권 내에서 후계 후보를 선출한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제 저녁 청와대 상춘재에서 있은 후보 결정을 위한 합의 도출 과정이나 오늘 있을 중앙 집행위원회의 제청 등은 모두가 민주정치의 새 장을 열어나가는 좋은 선례가 될 것입니다."라고 지껄였습니다.
2. 1987년 6월 10일 노태우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 6월 10일을 더 말해서 무엇하겠나. 하루 전 이한열이 최루탄에 피격돼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 개최가 열리면서 6월 민주 대항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이다. 그 날........김인규의 뉴스는 이렇다. *김인규의 리포트가 끝난다고 동영상을 멈추지 마시라. 박성범 앵커의 에필로그 멘트는 정말 빵 터진다.
김인규 씨는 리포트에서 부끄러움도 없이 "오늘의 민정당 정당대회는 현직 대통령 임기 중에 집권당이 차기 대통령 후보를 선출해 낸 우리 헌정사상 처음있는 정치 행사였습니다. 이 행사는 단임 의지를 거듭 천명해 온 전두환 대통령의 약속이 확인되는 정치적 절차였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평화적 정부 이양의 전통을 세우는 것이 우리나라 민주정치 발전의 결정적 전기가 될 것이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정치철학이 현실화되는 우리나라 정치 발전의 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민정당 정당대회는 단순한 정당행사가 아니라 우리 헌정사 40년에 새 장을 여는 획기적인 첫 걸음이라고 민정당은 자부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만큼 우리 정치사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평화적 정부 교체의 실현은 단순한 구호나 선동으로 이룩될 수 있는 쉬운일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순탄치많은 않은 길을 민정당은 오늘 대회를 통해 확실하게 추진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야당 측에서는 이러한 정치일정의 취소를 요구하며 강경투쟁을 계속하고 있어 내년초의 목표 시점까지는 넘어야할 난관이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수락 연설을 통해 대화의 필요성과 조화의 정치를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노태우 대표위원이 평화적 정부 이양의 전통을 수립하기 위한 정국 안정과 정치 활성화라는 시대적 정치 과제를 원만히 풀어나갈 때 오늘 대회의 정치사적 의의와 역사적 의미는 진정한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지껄였습니다.
앵커도 이에 질세라 "노태우 후보는 오늘 수락 연설에서 조화라는 말을 강조했습니다. 과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치우치지 않는 말 뜻을 갖고 있는 조화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또 오늘의 정치상황에 가장 필요한 요소일 수도 있습니다. 조화있는 정치 그것이 바로 앞으로 노태우 후보의 정치역량일 수도 있고 또 시대의 과제일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직 많이 남았다. 김인규의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활약상은 앞으로도 계속 보실 수 있다.
다들 생각은 비슷한 모양이다. 다른 언론사에서 ‘김인규의 과거’를 보도한 것을 빼고도, 이동영상들을 본 사람만 4만5천명이 넘는다. 기자협회 블로그에도 2천5백 명 이상이 방문했다. 이명박 정권의 탄생에 기여한 선거 특보 경력은 그저 가장 가까운 흠결에 불과했다. 공식적인 기록으로 찾을 수 있는 것만 따져도 끝이 없다. 기자 8년차 본격적으로 정치부 기자에 입문한 뒤 김인규는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을 미화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1,2편에서 봤듯이 민정당을 출입하면서 전두환을 미화하는 최전선에서 일하고, 6월 항쟁 이후에는 노태우로 대표되는 차기 정권 재창출에 전력한다.
-김인규에게 민정당 창당은 “구정치질서의 청산과 개혁을 위해 새시대 새정치의 기치를 내걸고 새역사 창조”하기 위한 사건이었다. -김인규에게 전두환의 4.13 호헌선언은 “국가 100년 대계를 위해 최선의 길이라는 통치적 차원의 결단”이었다. -김인규에게 노태우 후보 선출은 “민주정치 발전의 결정적 전기”였다.
여기서 한가지 궁금해진다. 87년 전두환은 결국 국민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전국적인 6월 항쟁의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대통령 직선제와 일부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 결정적 국면에서 김인규의 스탠스는 무엇이었을까. 오늘은 6.29선언 이후 김인규의 리포트를 감상해보면서 ‘진정한 달인의 면모’를 살펴보자.
*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시국수습방안발표 6월24일 전두환이 사실상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하면서 시위는 격화됐다. 26일 전국 150만 명이 동시 다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날 하루 전국에서 3,467명이 연행됐고, 경찰서/파출소 31개가 불에 타거나 부서졌다. 결국 전두환은 국민에게 굴복했다. 전격적인 6.29 선언이 이뤄졌다.
김인규는 당시 6월29일 9시 뉴스에서 노태우의 6.29선언을 “어려운 국면에 처한 현 시국을 타개하겠다는 그러한 결연한 의지”,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정국수습에 관한 문제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풀어나가겠다는 그러한 결심” 등으로 노태우의 개인적인 결단으로 규정한다.
이밖에 6.29 선언과 관련된 김인규의 여러 리포트가 있지만 가장 한심한 리포트 한 번 구경해 보자. 카메라샷, 선택된 어휘 등등 조선중앙TV가 위협을 받을 정도다. 아래는 7월1일 9시 뉴스다.
김인규는 리포트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은 오늘 오전 연희동 자택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시국수습안에 대한 특별담화를 텔레비전을 통해서 시청한 뒤 자신의 건의를 대통령이 전적으로 수용하고 뜻을 같이 해 준데 대해 무어라 감사의 마음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대통령의 담화내용은 대통령의 애국충정과 민주발전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어 감명스러웠다고 밝혔습니다.
노태우 대표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특별 담화 내용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일일이 메모하고 담화발표가 끝나자 상기된 표정으로 취재기자와 주위 사람에게 다함께 박수를 치자면서 오랜만에 활짝 웃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노대표는 이어 지난 29일 특별선언을 한 이후 처음으로 중앙당사에 도착했는데 중앙당직자와 소속의원 사무처 직원 등 200여 명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자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함께 기쁨을 나눴습니다.
노대표는 당사 본관 1층에 있는 총무국을 빙 둘러선 당원들과 악수를 나누며 자신은 그동안 당이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이제 모두가 하나가 돼 최선을 다해 나가자고 격려한 뒤 대표위원실에서 기자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밝혔습니다....김인규: 노태우 대표위원은 또 이제는 야당도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민이 원하는 열매를 하나하나 맺어 나가야 할 것이라면서 어느 누구의 반대도 없이 그 열매를 맺어갈 것으로 확신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기자가 아닌 부역자로 살아오면서 김인규가 학습한 내용은 뭘까. MB정권 창출에 공헌을 한 뒤 다시 KBS에 나타나 하려는 짓이 뭘까. 다음 편에서는 87년 대선 과정, 92년 3당 합당 과정에서 김인규의 활약상을 살펴보자.
4편은 별로 쓸 말이 없다. 화면만 보면 안다. 간단하게 배경 설명만 하겠다. 광주의 피비린내가 가시가도 전인 1982년, 이제 햇수로 10년 차, 정치부에 들어온지 3년 된 김인규가 30분 짜리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제목은 <특별 입체 기획, 제5공화국 1년>-1부 ‘새 시대 달라진 세계의 눈’. 피디를 맡았고 중간 중간 온마이크도 하고 나레이션도 가끔 삽입했다.
혹자는 그런다. “그 시대에는 다 그랬다. 김인규한테 너무 그러지 마라.” 결코 아니다! 정도의 차이라는 게 있다. 1979년 정치부에 입문한 김인규는 전두환과 5공화국을 등에 업고 성장한 전형적인 정치엘리트 기자다. 지속적으로 정권에 부역하면서 ‘정치부 차장->정치부 부장->미국특파원’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이력을 얻어냈다. 김인규가 전두환, 노태우 밑에서 이렇게 잘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프로그램이 말해준다. 이런 사람을 21세기에 사장으로 다시 맞는다는 것은 KBS에게 너무 가혹하다.
말이 또 길어졌다. 프로그램이 길어서 앞부분 3분만 잘라냈다. 전체 프로그램을 이해하는 데 하등 지장없다. 일단 보시라. 손발이 오그라들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보기드문 체험을 할 수 있다. 편집자주: 이번에는 주요 문장을 빨간색으로 표시하지 않겠다. 그러면 모든 문장을 빨간색으로 처리해야 되는 문제가 생긴다.
김인규는 5공 찬양 다큐멘터리에서 "개혁과 창조, 안정과 도약 그리고 화합의 한 해였다. 개혁의 한 해, 창조의 한 해, 안전의 한 해, 도약의 한 해 그리고 화합의 한 해 이 다섯 가지가 합해진 한 해가 바로 제 5공화국 1년이다. 제5공화국 출범 1년은 그 이전의 어지러움과 어두움과는 반대의 안정과 밝음으로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그래서 전두환 대통령도 제5공화국 출범 1년에 즈음해서 지난 한해는 우리국민의 위대성을 재발견한 한 해였다고 선언했다.
우리국민의 위대성이란 바로 어려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온 국민의 단합과 자신과 용기와 지도자의 영도력이 혼연 일치를 이룬데서 발휘될 수 있었다. 지난 2월초 한미정상회담이 극적으로 이뤄진 것도 국민의 단합과 전두환 대통령의 영도력이 높이 평가된 때문이다....제 5공화국의 출범 1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지난 30여 년간의 헌정사에서도 이룩하지 못한 일들을 국민의 여망과 화합 속에 이룩한 획기적인 한 해 였습니다. 이제 한국을 보는 세계의 눈은 분명히 달라졌고 경이의 눈길로 바꿨습니다.
그것은 제 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전두환 대통령의 역사적인 미국 방문과 아세안 순방 그리고 88년 올림픽 서울 유치 등이 성공적으로 이뤄져서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선진국 대열에 부상했기 때문입니다....70년대 한미 두 나라의 불편한 관계를 일거에 가시게 하고 한국을 보는 세계의 눈을 놀라게 한 것이 지난해 1월 28일부터 2월 7일까지 이뤄진 전두환 대통령의 미국 방문과 레이건 대통령과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이었습니다."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엽기적인 ‘구토 유발 동영상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봐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찾으려면 한도 끝도 없다. 옛날 테이프도 다 뒤지고 싶지만 일단 여기까지 하련다. 본인 망신, 그리고 KBS 망신 그만 시키고 김인규는 마음을 고쳐먹길 바란다.
옛날 뉴스를 보다보니까 김인규 씨는 2007년 대선 때만 대선 특보를 한 게 아니었다. 정치부 시절부터 집권당의 정치특보 역할을 충실하게 해 왔다. ‘평생 특보’라고 부를 만하다. 긍정적으로 보면 정치인으로서 자질이 차고 넘친다. 그럼 이제 우리 서로 잘하는 일을 하자. 정치를 하면 될 것 아닌가. 청와대 가서 정무수석하고 금배지도 다시라 이거다. 대신 KBS는 내버려 두라. ‘KBS의 독립을 지키러 왔다’는 풀 뜯어먹는 소리 그만 하자.
마지막으로 구호하나 외치자. 각설하고 오늘 마지막으로 보실 동영상은 노태우와 양김이 붙은 87년 대선 하루 전 뉴스와 90년 이른바 ‘3당 합당’이라는 희대의 꼼수가 나온 날 김인규의 보도다.
1. 1987년 12월 15일 대선 하루 전 87년 6월 항쟁의 결실로 (물론 김인규는 ‘노태우의 결단으로’라고 생각했겠지만) 직선제 개현을 쟁취했지만 양김은 분열하고 만다. 민정당은 선거 구도를 ‘지역 감정’이라는 프레임으로 고정시키기 위해서 광분했고 ‘정치 안정’이라는 허구적인 캐치프레이즈로 유권자를 호도했다. 김인규의 선거 하루 전 리포트는 이 구도를 지극히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다. 6월 항쟁을 겪으면서 김인규의 워딩도 상당히 조심스러워졌지만 버릇이 어디 가겠는가. 조심스럽지만 노태우에게 유리하게.... 역시 달인의 면모다. 이런 사람이 선거보도의 공정성에 대해서 박사 논문을 썼다니 참 대견하지 않을 수 없다. 감상해보자.
김인규는 대선 하루 전날 리포트에서 "선거 종반에서 사실상 3파전으로 압축된 이른바 1로 2김의 세 후보 가운데 과연 누가 승리할 것인가는 지금으로부터 서너 시간 뒤인 모레 새벽이면 그 윤곽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각까지도 민정 민주 평민 3당은 비록 투개표과정의 공정성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지만 나름대로 지역별 득표분석을 통해 승리를 장담하고 있습니다. 각당은 자기당 표가 850만에서 900만표를 얻어 당선이 확실시된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전체 유권자 2587만명 중 90% 이상의 높은 투표율이 예상되기 때문에 유효 투표수를 2300만 표로 볼 때 40% 선인 900만 표는 당선 안정권이고, 35% 선인 850만 표를 얻으면 일단 당선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정가의 공통된 분석이기 때문입니다.
3당의 전국 지역별 분석을 종합해보면 노태우 후보는 대구와 경북 강원 충북 제주에서, 김영삼 후보는 부산을 중심으로한 경남권에서 김대중 후보는 광주를 중심으로한 호남권에서 각각 득표율 50%에서 70% 이상의 절대 우세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후보별 절대 우세시에는 유권자 수로 볼 때 노태우 후보지역이 543만 명, 김영삼 후보지역이 448만 명, 김대중 후보 지역이 348만 명의 순으로 예상 득표율 면에서는 김대중 후보지역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서로 절대 우세지역에서 기대하는 득표수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상대 후보의 지역에서 2위권을 확보하고 나아가 3위와의 격차를 얼마나 내느냐가 중요하며 이러한 점에서 민정당은 전국적인 조직과 안정 희구세력을 바탕으로한 고른 득표로 어느 후보보다 유리하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경합지역으로 볼 수 있는 서울과 경인지역 충남 가운데 전체 유권자의 41.7%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어느 특정 후보가 직접적인 연고가 없는 수도권 표밭을 놓고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40% 득표로 1위를 주장하고 있어 수도권의 개표결과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이같이 어느 선거때보다 지역별 투표성향이 강하게 나타날 것으로 보여 내일 밤 개표가 시작돼 시도별 득표수가 드러나면 전체적인 선거결과의 윤곽이 쉽게 잡힐 것으로 전망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 1990년 1월 22일 3당 야합 민정당은 야당의 분열로 정권을 잡았지만 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25석에 그쳐 정국 주도권을 야당에게 내주고 만다. 덕분에 군부독재 세력은 5공비리 청문회 등으로 호되고 곤욕을 치른다. 이후 민정당은 유권자의 뜻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희대의 꼼수를 고안한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흡수해 125석을 218석으로 뻥튀기를 한다.
KBS는 이 사건을 ‘헌정사 최대 변혁’이라고 포장하고 “정치적 안정성에 국정을 효율적으로 이끌어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보도한다. 민자당 사내방송에서나 할 수 있는 애정 어린 훈수두기는 이 리포트의 백미다. (DJ때 청와대로 입성한 모 정치부장의 리포트를 떠올리게 한다. 이분도 언젠가 오시려나?) 이 리포트의 주자가 김인규다.
김인규는 3당 야합이 있던 날 9시 뉴스에서 "우리 나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겪는 여야 합당이라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대변혁이 이처럼 갑작스럽게 이뤄진 배경은 무엇이며, 이같은 정치적 대변혁을 국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에 대한 큰 흐름이 앞으로의 정국 향방을 가름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입니다. 3당 통합에 나선 민정 민주 공화당 등 3당 총재는 오늘 공동 발표문을 통해 온건 중도 민주세력이라는 색깔이 같은 사람이 뭉쳐서 남북통일을 주도하고 그리고 경제적 난국을 극복하며 국가 발전에 걸맞는 정치체제를 창출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신당 창당 이념을 요약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와 같은 여소야대의 4당 구조는 이같은 국가적 과제를 풀어갈 수 없다는 절박한 공동인식 아래 3당이 합쳐서 원내의석 3분의 2의 거대 여당을 만들어 정치적 안정성에 국정을 효율적으로 이끌어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달까지 합당절차를 마치는데까지는 어려움이 가로놓여있습니다. 당 내부적으로는 특히 민주당의 경우 야권통합파 의원들의 이탈을 최소화해야 하고, 3당 공히 원외지구당 위원장들과 사무처 요원들의 단합을 필요로 하고 있다. 더욱이 신당 외부적으로 볼 때는 평민당과 외부세력들의 장내외 반발과 투쟁이 가열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이번 정계 대변혁이 오히려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을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신당 추진세력은 굳건한 내부 결속을 기반으로 해서 평민당과 재야세력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대화와 보다 폭넓은 정치력을 발휘하면서 신당창당 작업과 함께 6월 임시국회에서 주요 법안 처리와 거국 내각제 구성, 그리고 지방자치제 선거 실시와 내각제 개헌 추진 등 일련의 정치일정을 쉴틈없이 밟아 나가는 장내 정치의 가속화를 통해 장외 투쟁의 충격을 최대한 흡수해 나감으로써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의 정국 흐름이 예상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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