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역사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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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여(조선)의 도읍지 장당경은 어디인가? |
단군조선을 계승한 대부여의 도읍인 장당경은 임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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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사학계가 신화의 시대로 조작한 우리 상고사(上古史)에는 장당경(藏唐京)이란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장당경은 배달국 14대 자오지한웅(치우천왕)의 도읍이었으며, 조선을 계승한 대부여의 도읍이기도 했다. 그러한 장당경이 어디인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장당경이 <한단고기> 및 <삼국유사>의 기록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시대 순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배달국 14대 자오지한웅인 치우천왕은 도읍을 신시(神市)로부터 청구국(靑丘國)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서경보스님은 장당경의 장(藏)을 서장(西藏=티베트)의 약칭으로 보고 “장당경은 티베트에 있고 치우천왕 이후 800년간 왕국을 유지했다.”고 했으나 장당경이 그렇게까지 멀리 간 것 같지는 않다.
▲ 티베트는 중국 서쪽에 인도와 접해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대부분 단군의 후예들이다. | | 조선은 단군왕검에 의해 장당경과는 다른 곳인 아사달에서 건국된다. 이 때 중국 삼황오제의 하나인 요(堯)임금이 당(唐)나라를 세운다.
5세 구을단군은 B.C 2084년 친히 장당경(藏唐京)으로 행차하여 삼신의 단을 봉축(封築)하고 한화(桓花)를 많이 심었다.
22세 색불루단군은 B.C 1285년 가을 9월에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묘를 세우고 조부인 고등왕(高登王)을 제사지냈다. 즉 도읍은 아니나 준 도읍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언급된 장당경 기록 “주(周)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봉해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오셔서 산신이 되시니 단군의 수는 1,908세를 누리셨더라....”
43세 물리단군 때인 B.C 426년 우화충이 무리 수만 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키고 공격하자 단제께서는 종묘사직을 받들어 모시고 피난하여 얼마 후 돌아가셨다. 이 해에 욕살 구물이 어명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하니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했다.
B.C 425년 구물이 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정벌하여 우화충을 죽였다. 이에 구물이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3월 16일 하늘에 제사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扶餘)라 하고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바꿔 불렀다.
2,096년간 존속한 조선에서 단군왕검부터 43세 물리단군까지는 장당경이 도읍이 아니었으나 도읍에 준하는 곳임을 <단군세기>를 통해 알 수 있다. 44세 구물단군 이후 대부여의 도읍지였던 장당경은 도대체 어디일까?
▲ 재야사학계에서 주장하는 고조선의 영토. 실제 단군조선은 이것보다 더 큰 연방국이었다. | |
대부여의 도읍지 장당경은 어디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장당경(藏唐京)은 글자 그대로 당경(唐京) 즉 요임금이 세운 당(唐)나라의 도읍인 산서성 임분으로 추정된다. 단군왕검과 요임금은 비슷한 시기에 각각 조선과 당나라를 건국한다. 어떤 사람들은 단군왕검과 요임금을 같은 인물로 보는 이도 있는데 너무 지나친 발상으로 보인다.
요임금을 제요도당(帝堯陶唐)이라 하며 도읍을 평양(平陽)이라고 했는데 평양은 산서성 중부의 임분시이다. 청나라 때 만든 지도인 대청광여도에도 평양이 임분시에 표시되어 있고, 임분시 교외에 요임금의 무덤인 요능(堯陵)이 있다.
▲ 대청광여도에는 현 산서성 임분시가 평양(平陽) 즉 요임금의 도읍인 요도(堯都)로 표시되어 있다. | | 그렇다면 어떻게 중국 당나라 요임금의 도읍이 조선의 도읍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요임금이 단군왕검에게 굴복해 왕위를 동이족인 순임금에게 넘겨주기 때문이고, 순임금 이후의 하나라부터는 황하주변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필자가 이전에 기고한 아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제목 : 맹자가 알려준 단군조선의 강역은 어디인가? http://www.hinews.asia/sub_read.html?uid=456§ion=sc2§ion2=
최초 단군왕검의 도읍지인 아사달은 요임금의 도읍지인 평양(平陽)보다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러한 아사달의 위치를 현 산서성의 성도(省都)인 태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다.
그 이유는 단군왕검이 다스리는 조선과 요임금의 당나라는 같은 홍수에 시달리게 되는데, 조선은 이를 극복하고 요임금은 실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강을 끼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임분을 지나는 강이 분하 밖에 없으니, 아사달은 분하가 지나가는 태원 밖에는 없다.
▲ 44세 구물단군의 기록에 나오는 아사달, 장당경, 동압록(분하), 서압록(남북황하)을 표시했다. | | 단군조선은 B.C 2333년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되어 2,096년간 47분의 단제(檀帝)에 의해 다스려진 위대한 국가였다. 조선이 존재했을 당시 하화족(夏華族)들의 나라는 하(夏)--> 은(殷)--> 주(周)--> 춘추(春秋)--> 전국(全局) 시대를 거치게 되는데, 황하 주변 하남성이나 섬서성 일대에 존재했던 자그마한 나라들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나라였던 조선은 그 핵심강역이 산서성이며 도읍은 아사달(태원)과 장당경(임분)이었으며, 그 강역은 중국의 강역인 하남성 또는 섬서성 일대를 제외한 모든 중국 땅과 더 나아가 중앙아시아까지 관할 지역이었다. 이러한 엄청난 조선의 강역은 북부여를 거쳐 고구려로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 하남성 또는 섬서성 일부를 제외한 모든 중국 땅이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다. | | 그런데 대한민국 식민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계는 이러한 단군을 신화의 인물로 만들어 단군이 다스린 조선까지 존재하지 않은 나라로 만들어 놓았으며, 있지도 않았던 기자조선과 제후국의 역사인 위만조선을 고조선이라 하고 있다. 그러한 고조선은 만주 일대에 있다가 대동강 평양으로 내려온 것이라고 엄청나게 축소 왜곡 시키고 있다.
이렇게 조작된 단군신화와 식민사학은 해방 64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변한 것이 없이 그대로이다. 그 이유는 매국노 이완용의 질손(姪孫)으로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들에게 빌붙어 제 나라의 역사를 말살한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후학들이 강단사학계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있는 한 우리나라 국민들은 조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활동무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장엄했던 역사는 중국이 찌그러뜨리고 일제가 군화 발로 짓밟은 채로 여전히 복원이 안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식민사학계의 폐해(弊害)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민족정신과 얼이 나날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 큰 문제라 하겠다.
▲ 초대 조선총독 테라우치가 한 말인 "단군을 부정하게 하라"가 아직까지 그대로 행해지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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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시간 : 2010년 03월22일 [19:2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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