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만공스님] 나를 찾는 법 - 참선법(參禪法)

장백산-1 2010. 4. 13. 13:47




세상에는 나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도 없고, 장소도 없고,

다만 불교 안에 있는 선방(禪房)에서만 나를 찾는 유일한 정로(正路)를 가르쳐 주나니라.

수도(修道)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정신을 수습해 가는 그 공부를 한다는 말인데,

누구에게나 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나니라.



세상의 학문은 당시 그 몸의 망상에서 일시의 이용으로 끝나고 말지만,

참선학(參禪學)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몸으로,

어느 생활을 하던지 구애됨이 없이 활용되는 학문이니라.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선은 절대로 혼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니,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 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나니라.

선지식을 만나 법문 한 마디 얻어 듣기란 천만겁에 만나기 어려운 일이니,

법문 한 마디를 옳게 알아듣는다면 참선할 것 없이 곧 나를 깨달을 수 있나니라.

법문 들을 때는 엷은 얼음 밟듯 정신을 모아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하나니라.



선지식은 선생이니 박사니 하는 막연한 이름뿐이 아니라,

일체 이치에 요달(了達)된 사람으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상속(相續) 받은 분이니라.



이(理)와 사(事)는 같은 원(圓)이라,

어느 각도에서 출발하든지 쉬지 않고 걸어가면 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기는 하지만,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선지식의 가르침이 없이는 될 수 없나니라.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도 흘려버리고 하여, 신행(信行)이 없으면

법문을 다시 듣지 못하는 과보(果報)를 얻나니라.

선지식을 믿는 그 정도에 따라 자신의 공부가 성취되나니라.

장맛이 짠 줄을 아는 사람은 다 공부할 수 있나니라.

공부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전생(前生)에 놀고 지낸 탓이니,

그 빚을 어서 갚아야 수입이 있게 되나니라.



남음 없는 신심(信心)만 있으면 도의 기반은 이미 튼튼해진 것이니라.

신심(信心), 분심(憤心), 의심(疑心) 세 마음을 합하여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나니라.

신심만 철저하면 나의 정기(正氣)에 대상을 곧 정당화시켜서 자율적 성취가 있게 되나니라.



법문을 듣고도 신심이 동(動)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내세(來世)에는 다시 인간의 몸을 받기가 어려우니라.

공부하는 사람이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은 먼저 나를 가르쳐 줄 선지식을 택하여야 하고,

나를 완성한 후에 남을 지도할 생각을 해야 하나니라.



명안 종사(明眼宗師)의 인가(印可)도 없이

자칭 선지식으로 남을 가르치는 죄가 가장 크니라.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심행처(心行處)가 멸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應答)하여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공부는 발심(發心) 본위라 별로 제한 받을 것은 없으나,

학령(學齡)으로는 20세로부터 30세까지가 적령(適齡)이니라.

참선법은 평범한 연구나 공부가 아니요, 대(對)가 끊어진 참구법(參究法)

곧 터럭 끝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니라.



백년의 연구가 일분간의 무념처(無念處)에서 얻은 한낱 이것만 같지 못하다.

일체 중생은 날 때부터 이성(異性)의 감응(感應)으로 말미암아

세세생생에 익히는 것이 음양법(陰陽法)이니,

정신 모으는 데는 이성적(異性的) 장애가 제일 힘이 센 것이니,

공부하는 사람은 이성을 가장 멀리 해야 하나니라.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一念)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무념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나니라.

소아적(小我的) 나는 소멸되어야 하기 때문에 공부의 성취를 하기 전에는

썩은 그루터기같이 되어 추호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나의 존재를 없애야 하나니라.



나를 완성시키는 데는 3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도량(道場), 도사(道師), 도반(道伴)이니라.

도를 지키는 사람은 도절(道節)을 지켜야 하는 것이니, 도는 하나이다.

도를 가르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도절을 지키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손실을 보게 되느니라.



짚신 한 켤레를 삼는 데도 선생이 있고,

이름 있는 버섯 한 송이도 나는 땅이 있는데,

일체만물을 총섭(總攝)하는 도를 알려는 사람이

도인의 가르침 없이 어찌 도인이 될 수 있으며,

천하정기(天下正氣)를 다 모아 차지한 도인이 나는 땅이 어찌 특별히 있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도반(道伴)의 감화력은 선생의 가르침보다도 강한 것이니라.

참선을 하여 인생 문제만 해결되면 억생(億生) 억겁(億劫)에 지은

갖은 악, 갖은 죄가 다 소멸되나니,

그 때는 4생 6취에 헤매는 고생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되나니라.



수도(修道) 중에는 사람 노릇할 것은 아주 단념해 버리고

귀먹고 눈먼 병신이 되어, 일체 다른 일에 간섭이 없게 되면

대아(大我)는 저절로 이루어지나니라.



참선법은 상래(上來)로 있는 것이지만,

중간에 선지식들이 화두(話頭)드는 법으로 참선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그 후로 무수 도인(無數道人)이 출현하였나니, 화두는 1천 7백 공안(公案)이나 있는데,



내가 처음 들던 화두는 곧

"만법(萬法)이 귀일(歸一)이라 하니 一은 어디로 돌아갔는고?"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이중적 의심이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 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이 정신 영혼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고?



의심을 지어 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 때에 간단(間斷)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여 가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되나니라.



참선한다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다른 데 미련이 남아 있거나,

인간으로서의 자랑거리인 학문이나, 기이한 재주 등 무엇이라도 남은 미련이 있다면

참선하기는 어려운 사람인 것이니, 아주 백지로 돌아가야 하나니라.

크게 나의 구속(拘束)에 단련을 치른다면 그 대가로 큰 나의 자유를 얻게 되나니라.



예전에는 선지식의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頓忘) 생사(生死)하는 이도 있고,

늦어야 3일, 7일에 견성(見性)한 이도 많다는데,

지금 사람들은 근기(根機)도 박약하지만 참선을 부업(副業)으로 해 가기 때문에

20년, 30년 공부한 사람이 불법(佛法)의 대의(大義)를 모르는 이가 거의 전부니라.



밥을 자기가 먹어야 배부른 것과 같이,

참선도 제가 하지 않으면 부처님도 선지식도 제도해 주지 못하나니라.

참선하려면 먼저 6국(六國) 전란(戰亂)을 평정(平定)시켜

마음이 안정되어야 비로소 공부할 준비가 된 것이니라.





출처 : 金烏김홍경을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정심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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