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송강스님의 마음으로 보기] 모두 훤하게 보면 자유로운 사람

장백산-1 2010. 6. 14. 12:51

[송강스님의 마음으로 보기] 모두 훤하게 보면 자유로운 사람
제대로 보기


어린 시절 자전거를 처음 배우던 때 계속 넘어지기만 했다. 탄력이 붙기 전의 자전거는 좌우로 흔들리게 되어 있는데, 앞바퀴를 내려다보며 반사적으로 반대쪽으로 핸들을 틀고 몸을 기울였다. 그러니 직방으로 넘어질 수밖에. 넘어지는 쪽으로 같이 가야 한다는 원리를 터득하고 나서도 또 계속 넘어졌다. 자전거의 바로 앞쪽을 예의주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점차 시선이 앞쪽으로 멀리 뻗어나가면서 비로소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며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 멀리 시선이 달아나 버리는 통에 가끔씩 충돌을 하기도 했다.

지내고보니 불교공부를 하면서도 자전거타기와 똑 같은 과정을 밟은 듯하다. 끝없이 흔들리는 가운데 넘어지고 쓰러지며 엎어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번뇌(煩惱)라는 말을 원수처럼 생각해서 기어이 그놈을 없애버려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생각이란 놈은 꼭 밝은 날 해를 등지고 걸어갈 때의 그림자처럼 밟아 없애려 해도 제가 먼저 달아났다. 아니 밟으려하면 할수록 그림자가 더 빨라지듯, 번뇌란 놈은 너무나 잽싸서 도저히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 것.


생각을 끊지도 없애지도 말 것
근저로 파고들어 실체를 볼 것


번뇌와 죽자고 씨름하다가 자포자기 상태가 될 때쯤 나타난 구원자가 무심(無心)이라는 것이었다. “아, 생각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때부터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책에서 본 갖가지 방법에다가, 여러 도사님(?)들로부터 전수받은 요상한 방법까지 동원해가며 멍한 상태가 되기 위해 애를 썼다. 어떤 경우는 촛불을 켜놓고 몇 시간씩이나 그 불꽃을 보며 앉아 있기도 하고, 벽에 점을 그려 놓고 하루 종일 보고 있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그런 상황 속에서는 많이 편안해지는 듯도 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벗어나 사람을 만나면, 그 즉시 편안함은 깨어져 버렸다. “아니 이게 뭐람? 그토록 노력해 얻은 편안함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거야? 영험이 없잖아!” 나는 무심(無心)의 경지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문득 작은 깨달음이 있었다. 자전거를 배울 때 세워둔 자전거에 올라 신나게 페달을 밟아도 그냥 그 자리였다는 사실. 서 있는 자전거는 모양만 자전거이지 용도로 보면 소용이 없는 것. 모름지기 좀 더 빨리 목적지에 짐을 싣고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 아닌가. 사람이 아무 생각도 없이 촛불이나 벽만 쳐다보며 시간을 죽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 제대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자!” 그때부터 경전과 선어록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전거 배울 때 비틀거리듯, 매양 갈피를 잡지 못하며 지쳐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는 배웠던 구절구절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니 늘 배운 것 따로 일상생활 따로 겉돌게 되었던 것. 머리는 연화장세계를 꿈꾸는데 몸은 육도에서 떠도는 이상야릇한 존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윽고 나는 기존의 관념들을 다 버렸다. 그리고는 생각이 일어나는 그 근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자전거의 페달을 힘껏 밟으며, 서서히 핸들을 틀어 방향을 잡아가듯이. 물론 처음에는 자전거의 초보자가 바로 앞을 보다가 넘어지듯이, 나도 코앞의 문제로 쓰러지곤 했다. 그러다가 점차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너무 멀리만 보다가 바로 앞에 돌발사태가 벌어지면 충돌을 일으키기도 또 무수히 했다.

누구라도 속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고, 절대로 방향을 잃지도 않는 상태에서, 멀리 가까이를 모두 훤하게 볼 수 있게 되면 비로소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아참. 불교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는 과정에서 내 정수리에는 큰스님들의 죽비가 요란하게 작렬했음을 밝혀둔다. 그러니 선지식을 찾아가 매를 벌어보라!


송강스님은 불교방송 ‘자비의 전화’와 불교텔레비전 ‘송강스님의 기초교리 강좌’를 진행했으며, 현재 서울 개화산 개화사 주지로 있다.

출처 : 옥련암
글쓴이 : 갠지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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