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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적 사유의 특성과 21세기 동학인의 좌표(하)
최민자__ 성신여대 교수
붓다의 길과 보통 사람의 길은 정녕 다른 것인가? 여기서 붓다(Buddha)는 각자(覺者), 즉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 붓다의 길은 內面(참자아)으로의 길이요, 보통 사람의 길은 外部(에고)로의 길이다. 전자가 순수의식(우주의식, 전체의식)으로의 길이라면, 후자는 부귀영화(부분의식)로의 길이다. 전자가 진지(眞智)로의 길이라면, 후자는 분별지(分別知)로의 길이다. 전자가 영원한 삶(大自由)으로의 길이라면, 후자는 죽음(구속)으로의 길이다.거듭되는 시행착오의 과정을 통해 智慧의 밝음이 그 모습을 드러내면 어리석음의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는 법. 바로 그때 轉換이 일어난다. 物質에서 意識으로, 에고에서 참자아로의 방향전환이 일어난다. 따라서 붓다의 길과 보통 사람의 길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아니다. 붓다의 길은 영혼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티끌 속에서 티끌 없는 곳으로 가는 길이다. 붓다의 길은 ‘나’도 없고 ‘너’도 없는 길이기에, 行爲者는 사라지고 行爲만 있는 길이다.
진정한 신앙은 종교라는 이름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個體라는 錯覺에서 벗어나 內部의 神性에 눈뜨는 것, 말하자면 永遠한 ‘참나’를 믿고 받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내게 묻는다. “무슨 종교를 믿으십니까?”라고. 중요한 것은 宗敎의 이름이 아니라 宗敎的 眞理의 精粹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특정 종교의 이름을 걸지는 않더라도 종교적 진리를 삶 속에서 구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다. 우리가 스스로의 神性에 눈뜨기 위해 특정 종교의 안내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타종교의 안내를 받거나 종교라는 이름을 표방하지 않는 사람들을 질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참나’로 가는 길은 多樣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앙이 기복신앙 차원에 머물러서는 결코 ‘참사랑’이 일어날 수 없다. 열심히 조각상에 절하고 기도하여 각자가 소원하는 바를 이루면 다 되었다고 하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 소원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자기실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利己的인 欲求 充足을 위한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에고를 더욱 증폭시킬 것이기 때문이다.에고가 강한 사람일수록 이름에 執着한다. 왜냐하면 이름을 통해 ‘나’, ‘내것’이라는 에고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나’라는 존재를 느끼게 되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내 이름과 同一視되기 때문이다. 내 부모, 내 자식, 내 종교, 내 집, 내 자동차…, 이 모든 이름을 통해 ‘내것’이라는 에고가 들어온다.
그러나 이 世上에 全切와 分離된 ‘나’라는 個體도 없고, 永遠한 ‘내것’이란 것도 없다. 모두가 工夫하기 위해 잠시 빌려 쓰다가 갈 뿐이다. 종교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진리를 구획 짓는 울타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宗敎의 使命은 우리가 個體라는 錯覺에서 벗어나 自己 自身의 神性에 눈뜰 수 있도록, 宇宙가 한生命이라는 事實을 認識할 수 있도록 참사랑으로 案內하는 것이다. 참종교는 참사랑으로 안내만 할 뿐, 그 이름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종교 또한 에고라는 껍질을 깨지 않으면 진리의 구현이라는 본래의 사명을 다할 수 없다.
다음은 인간이 얼마나 종교 의식의 지배를 받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두 사람이 죽어 저승으로 갔다. 한 사람은 기독교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슬람교인이었다.玉座에 앉은 尊貴한 存在에게 기독교인이 먼저 말했다.
“오, 하느님 아버지시어! 저는 평생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당신만을 믿으며 살았습니다.그러니 천국으로 들어가게 해주소서.”
그러자 옆에 있던 이슬람교인이 이렇게 말했다.
“오, 알라신이시어! 저는 당신이 유일신임을 믿습니다. 그러니 천국으로 들어가게 해주소서.”
그러자 尊貴한 存在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本來 무명(無名)이다. 어찌하여 그대들은 내게 이런 저런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가? 진실로 나를 믿는 자는 이름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나를 믿는다는 것은 이름을 버린다는 것이고 이는 곧 단순(순수)해진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지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왜 종교라는 이름에, 유일신의 이름에 연연해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이름이 하나님이면 어떻고, 알라신이면 어떻고, 불(佛)이면 어떻고, 도(道)면 어떻고, 브라만이면 어떻고, 아트만이면 어떻고, 또 순수의식이면 어떤가. 實在世界는 言語의 領域을 超越해 있으며,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명명될 수가 없다. 따라서 무엇이라고 부르든, 이는 억지로 붙인 이름일 뿐 그 이름이 곧 實相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이름이 있기 前부터 이미 그것은 事實로서 存在해온 것이다.重要한 것은 삶 속에서 어떻게 진리를 구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佛, 道, 空, 一心,
기독교의 ‘무소부재(無所不在)’라는 말은 하나님이 萬物에 편재(遍在)해 있음을 나타낸 말이다. 마치 비가 大地를 고루 적시고 태양이 사해를 두루 비추는 것처럼, 하나님이 없는 곳이 없는 것이다. 도(道)가 萬物에 遍在해 있음이나 불(佛)이 萬物에 遍在해 있음도 이와 같다. 呼吸하는 空氣, 호수 위의 물안개, 오색찬란한 무지개, 바람과 구름과 돌과 티끌과 똥오줌 속에까지 ‘하나’님이 없는 곳이 없고, ‘道’가 없는 곳이 없고, ‘佛’이 없는 곳이 없다.따라서 이름으로 實相을 區分함은 하나님을 죽이는 일이요 ‘道’를 죽이는 일이요 ‘佛’을 죽이는 일이다. 일(一)과 다(多), 이(理)와 사(事), 정(靜)과 동(動), 진(眞)과 속(俗), 정(淨)과 염(染), 공(空)과 색(色) 등의 相互 對立하는 범주들은 본체[體]와 작용[用]이라는 不可分의 關係로 분석될 수 있다. 萬物萬像은 곧 一心의 나타남이다. 하나[一]와 여럿[多]은 相互 連關되어 있으며 相互 貫通한다. 여럿[多]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하나는 여럿[多]으로 돌아간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고 코로 냄새 맡고 손으로 잡고 발로 걷고 뛰고 하는 것 모두 一心이 感覺器管을 通해 活動하는 것이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感情 또한 一心의 나타남이다. 호수 위의 물안개, 물 흐르는 다리, 흐느끼는 바람 소리, 연꽃 사이로 불타오르는 원색의 저녁놀, 영혼을 적시는 희열, 폭풍우 같은 분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문명이라는 이름의 화산…, 이 모두 一心의 나타남이다.
그러나 일심을 깨닫지 못하면 이 마음을 떠나서 다른 마음을 만들고, 本體를 버리고 그림자를 求하게 되어 미망(迷妄) 속을 헤매게 된다. 그러나 智慧는 남이 대신 닦을 수 없는 것. 어리석음의 어두움을 없애면 지혜의 밝음은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그것은 곧 ‘평등성지(平等性智)’의 나타남이다. ‘나’가 없기 때문에 ‘나’ 아닌 것이 없고, 나 아닌 것이 없으므로 一切가 平等無差別하게 된다. 다만 一心의 도(道)는 지극히 가까우면서도 또한 지극히 먼 것이어서, 찰나에 저절로 만나게 되는가 하면 억겁을 지나도 이르지 못한다. 그것의 秘密은 바로 意識의 깨어있음에 있다.
모든 종교에서 그토록 경계하는 우상숭배란 바로 우리의 內在的 本性인 神性을 우리 自身으로부터 分離시켜 外在的 存在로 물화(物化)하여 客體化된 하나의 對相으로 崇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自己 自身의 二元化는 곧 自己意識의 分裂의 標徵이며, 靈的 鎭化에 逆行하는 것이다. 眞理는 全切的인 것인데 宗敎가 二元化를 甚化시키고 있음은 우상숭배에 앞장섬으로써 靈的 退步로 案內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 또한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어리석음의 극치인가?水雲이 西學의 도(道)는 허무에 가깝고 학(學)은 한울의 ‘학’이 아니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서학(西學)은 內在와 超越의 合一에 對한 認識이 없이 한울과 人間을 二元化하고 한울을 위하는 공심(公心)은 없이 다만 제 몸만을 위하여 사심(私心)으로 비니, 몸에는 한울의 感應이 없고 학(學)에는 한울의 가르침이 없다는 것이다.
西區의 宗敎改革이 교회의 권력 남용을 바로잡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다면, 第2의 宗敎改革은 다양하게 명명되고 있는 宇宙의 根源的인 一者의 實體가 하나임을 밝힘과 同時에 그 하나가 바로 우리 內部의神性 卽 純粹意識이라는
事實을 直視하게 함으로써 모든 종교간의 대립성과 분절성을 극복하고實體를 指向하는 삶으로의 方向轉換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肉體的 自我(corporal self)가 宇宙的 自我(cosmic self)로 向하는 직로(直路)가 뚫리어 종교적 진리가 개개인의 삶 속에 구현되는 직접시대가 될 것이다. 우상숭배는 목적지로 갈 수 없는 빗나간 길이다. 수운과 같은 聖人이 이 世上에 오신 것도 바로 우리 內部의 神性에 눈뜨게 함으로써 빗나간 길을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언어는 단지 意思疎通을 위한 하나의 道具에 불과하다. 언어가 그려놓은 否定한 心像을 지우지 않고서는 결코 그 裏面에 있는 窮極的 實在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이 窮極的 實在는 分別하고 抽象하고 分類하는知識에 依存하고 있지 않은 까닭에, 드러낼 수 있는 知識의 對相이 될 수 없다.
우리들 各者의 內部意識으로 깊이 들어가 一切의 現狀을 根源的인 全一性의 현시(顯示)로 볼 수 있을 때, 否定한 心像은 完全히 지워지게 되고 평등무이(平等無二)한 窮極的 實在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否定한 意識의 철폐를 통한 진지(眞知)의 회복, 바로 여기에 제2의 르네상스가 있고 제2의 종교개혁이 있다. 그것은 다양성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統一體를 창출하는 일이다.
곰팡이 슨 문화와 사상이 난무하는 시대, 기술과 도덕 간의 深淵 속에서 우리는 다시 人間을 찾아야 한다. 宗敎 利己主義와 世俗化· 商業化· 企業化로 삶의 香氣를 잃어버린 시대, 理性과 神性간의 心淵 속에서 우리는 다시 신(神)을 찾아야 한다.
“인간의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유용하고도 진보되지 않은 것은 인간에 관한 지식”이라고 루소(J. J. Rousseau)가 말했던가, 인간이면서도 인간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거나, 너무 잘못 알고 있거나, 상당히 알고 있다고 錯覺하고 있으니, 우리는 만고에 다시 없는 역설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宇宙를 알지 못하고서는 人間을 논할 수 없고 人間을 알지 못하고서는 時代를 논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侍天主 道德은 제2의 르네상스, 제2의 종교개혁의 개창 원리를 담고 있다. 수운이 「不然起然」의 말미에서 ‘한울의 攝理에 부쳐 살펴보면 불연은 또한 기연이라’고 한 것은 그의 卽者大自的 思惟體係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수운의 불연기연의 논리와 시천주 도덕은 이성과 신성, 현상과 본체의 회통(會通)을 통하여 ‘무리지지리 불연지대연(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의 境界를 指向한다. 학문과
종교와 삶이 하나로 어우러진, 相對的 差別性을 떠난 如實한 대긍정(大肯定)의 世界를 指向하는 것이다.
수운은 그의 천도(天道)가 서학과는 달리 ‘마음을 지키고 氣運을 바르게 하여 한울의 本性을 거느리고 그 가르침을 받게 되면 自然한 가운데에 化해져 나오는 것’이라 하여 ‘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하고 있다. 한울의 ‘學’은 한마디로 심학(心學)이다. 一切의 分節性과 對立性을 극복하여 일심(一心)이 될 때 사람이 곧 하늘이 되는 것이다.그 하나인 마음속에서 物質과 精神이, 現狀과 實在가, 自由意持와 必然이 辨證法的 統合을 이루게 됨으로써 소아(小我)의 유위(有爲)가 아닌 대아(大我)의 무위(無爲)를 따르게 되어 동귀일체(同歸一體)가 이루어져 천덕(天德)은 現實 속에서 현현(顯現)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홍익인간(弘益人間)·광명이세(光明理世)의 理念이 發顯되는 것이다.
人間 存在의 ‘세 中心軸’─종교와 과학과 인문 卽 神과 世界와 靈魂의 세 영역(天地人 三才)─의聯關性
喪失을 招來한 서학(西學)의 그것과는 달리, 東學은 천도(天道)와 천덕(天德)에 입각하여 萬人이 ‘侍天主’의 自律的이고도 自覺的인 主體로서 평등무이(平等無二)한 ‘열린 사회(open society)’·수평사회(horizontal society)로의 轉換을 촉구한다.다시 말해서 이성과 신성, 기술과 도덕간의 심연(深淵, abyss)을 解消함으로써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分節性을 극복하고 大統合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로섬(zero-sum) 게임이 아닌 윈-윈(win-win) 게임이라는 21세기 새로운 발전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는 우주 ‘한생명’을, 우주만물의 유기적 통일성을 직관적으로 깨닫게 하는 동학의 생태적이며 영적인 본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수운의 불연기연의 논리와 시천주 도덕은 전통과 근대 그리고 탈근대를 관통하는 ‘아주 오래된 새것’이라 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동학의 즉자대자적(卽自對自的) 사유체계 속에서 一切의 二分法은 폐기되며, 특수성과 보편성, 개체성과 전체성이 統合됨으로써 ‘참여하는 우주(participatory universe)’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동학의 도덕관과 不然起然的 世界觀 속에서 전통과 근대 그리고 탈근대는 변증법적 통합을 이루게 된다. 이는 侍天主 道德을 관통하는 원리가 ‘부정의 부정(negation of negation)’을 통해 大肯定에 닿아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21세기 동학인이 나아가야 할 길은 侍天主의 자각적이고도 실천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이성과 신성의 統合에 기초한 우리의 靈的 本質이 發顯되는 것을 말한다.
실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調和의 열쇠는 사람에게 있고 사람의 마음이 밝아지면 그 열쇠는 저절로 作動하게 되는 것이니, 侍天主의 자각적 실천이야말로 동학의 세계화를 담보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동학이라는 문을 통하여 동학이라는 이름을 넘어서는 것이다. 동학이라는 이름마저도 넘어설 수 있을 때 일심(一心)의 근원성·포괄성·보편성은 구체적 현실태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실로 수운의 侍天主 道德은 인간의 신성 회복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것이다. 그의 사상에는 고금을 통하고 역사를 초월하며 민족과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 보편성이 흐르고 있다. 동학은 우리 인류가 시대적·사상적·종교적 질곡에서 벗어나 有機的 生命體 本然의 統合的 機能을 回復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역사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게 할 것이다. 실로 동학은 弘益人間·光明理世의 이념을 현대적으로 구현하는 원리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진정한 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곡(神曲)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곡?
그것은 우리의 理性이 內在的 本性인 神性과 統合될 때 울려퍼지는 靈魂의 交響曲이다. 덴마크의 철학자이며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인 쇠렌 키에르케고르(SΦren Kierkegaard)는 絶望을 죽음에 이르는 病이라고 하고 그것은 죽을 수 있다는 마지막 希望까지도 잃은 實存的 絶望을 意味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두려움은, 不幸한 意識은, 絶望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理性이 스스로를 神性으로부터 分離시키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냐 저것이냐(to be or not to be)’의 問題가 恒常 따라 다니게 되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아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意志와 標象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에서 欲求에 사로잡힌 苦痛스런 삶에서 벗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解脫과 적정(寂靜)의 境地에 이르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나아가 苦痛의 나눔, 즉 동고(同苦, Mitleid)를 지고의 德으로 보았다. 이러한 그의 洞察은 깨달음 속에, 에고의 사라짐 속에, 執着의 끊어짐 속에 幸福이 實存한다고 보는 것이다. 眞正한 文明은 幸福이 實存하는 文明이다. 삶과 죽음, 현상과 실재, 주관과 객관의 境界가 사라질 때 울려 퍼지는 靈魂의 交響曲이 바로 神曲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동거하는, 아니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하는 문명을 우리는 기억한다. 12세기부터 쿠스코를 중심으로 발흥한 잉카제국의 문명이 그것이다. 잉카인들이 死後에도 죽은 미이라를 데리고 다니며 대소사에 관여하게 하거나 재산을 소유하게 한 것은 죽은 자에 대한 경배라기보다는 그들 自身의 欲望이 投映된 것이다.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서까지 삶에 關與하고 財産을 所有하겠다는 그들의 삶에 대한 歪曲된 執着의 나타남이다.왜 그토록 執着하는가? 두렵기 때문이다. 全切 속으로 溶解되어 사라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음이 肉體를 消滅시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內腸을 들어내고 미이라로 만들어 肉體的인 自我를 永續시키고자 했다. 結局 그들의 意識은 原始的인 에고 次元에 갇혀 버리고 神과 連結되지 못했다.
우리가 神으로부터 分離될 때, 다시 말해서 우리의 內在的 本性인 神性과 連結되지 못할 때 眞正한 文明은 빛을 發할 수가 없다. 20세기 超現實主義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1936년작 ‘구름으로 가득 찬 머리를 가진 커플’이란 그림을 보면서 나는 思念의 구름으로 가득 찬 人類의 自畵像을 보는 듯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에고의 구름만 걷어내면 汚染되지 않은 ‘참나’[神性]가 있다.에고는 個體라는 錯覺이며, 一種의 病이다.
個體라는 錯覺이 사라지면, ‘나’와 ‘너’를 區分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그리하여 宇宙를 ‘한생명’으로 보는 全切意識에 이르면 저절로 神性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至高의 自由와 靈的인 充滿感, 卽, 지복(至福)의 境地에 들게 된다. 동학인들이 侍天主의 自覺的이고도 實踐的 主體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동학인들은 眞正한 文明을 개창해야 할 시대적·역사적 사명을 안고 있다.
實로 모든 存在의 內面에 있는 神性을 일깨워 스스로가 등불이 되어 世上을 밝힐 수 있다면,
그리하여 온 世上에 靈魂의 交響曲이 울려 퍼지게 된다면 眞正한 文明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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