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깨닫는 것은 마음으로써 깨닫는가, 몸으로써 깨닫는가, 교가(敎家)등에서도 신심일여(身心一如)라고 해서 몸으로써 얻는다고는 하지만 역시 일여(一如)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로 몸으로써 얻는 것이 확실하지가 않다. 이제 나의 집안에서는 몸과 마음이 동시에 깨닫는다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마음으로써 불법을 계교하는 한, 만겁천생에도 깨닫지 못한다. 마음을 내려놓아서 지식적 알음알이를 버리는 때에 깨닫게 된다.
사물을 보고 마음을 밝히거나 소리를 듣고 도를 깨치는 등의 것도 역시 몸의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생각과 지견을 모두 버리고 지관타좌(只管打坐)한다면, 도는 친히 깨닫게 된다. 따라서 도를 깨닫는 것은 틀림없이 몸으로써 깨달음이다. 이리하여 좌(坐)를 오로지 해야 한다고 깨우쳐 권하는 것이다.
- <정법안장(正法眼藏)>
수행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
고정관념 선입관 철저히 버려야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 가운데 발타라존자는 목욕을 좋아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심지어는 목욕 때문에 공양이나 법문시간에 늦는 일까지 있는 정도였다니 거의 목욕매니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이러한 사실이 석존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석존은 그를 불러 물었다.
“그대가 목욕을 좋아한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예,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목욕을 즐기는가?”
“예, 목욕을 하면 몸이 개운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앞으로는 목욕을 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씻어야 한다. ‘내 마음은 늘 욕심과 자만과 질투와 분노 등 수많은 번뇌로 가득 차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맑은 물로 그 모든 더러움을 씻어버리려 한다.’”
발타라존자는 그날부터 석존의 가르침대로 하여 얼마 안 가 진리를 깨우치고 아라한이 되었다. 목욕을 수행법으로 하면서 깨우친 것이다. 또한 주리반특가 존자는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면서 깨우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목욕이나 청소를 하면서도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바로 몸으로써 깨우친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이고 있는 것이다.
몸으로써 깨닫는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철저히 놓아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수행이니 깨달음이니 자기의 입장에서 이것저것 사색하여, 모든 사물의 진실을 밝히려 드는 것이야말로 미혹이며, 일체의 진실이 스스로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깨달음이다.
‘오직 앉아 있을 뿐(只管打坐)’, 이것은 중생의 좌선, 즉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좌선이 아니라 부처의 좌선, 즉 부처님 성도 이후의 좌선을 연습하는 것이다. 행위가 다만 목적을 향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행위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좌선은 깨달음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좌선 그 자체가 부처로서의 완성되어진 행위인 것이다. 수행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은 내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오늘로써 절대이다.
월호스님 / 쌍계사 승가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