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부처-중생은 차별이 없다
굳이 여러 이름을 붙여서
마음이라 부처라 중생이라 했으나,
이름에 얽매여 알음알이를 낼 것이 아니다.
다 그대로 옳다.
그러나 한 생각이라도 움직이면 곧 어긋난다.
- <선가귀감 4>
주해(註解): 한 물건에 굳이 세 가지 이름을 붙인 것은 교가(敎家)의 부득이한 일이고,
이름에 얽매여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는 것은 선가(禪家)의 부득이한 일이다. 한번 들어보고 한번 눌러놓으며,
곧 세우고 곧 깨뜨리는 것이 모두 법왕이 내리는 명령의 자유자재다.
이것은 윗 것을 맺고 아랫것을 일으켜 부처님과 조사들의 방편이 각각 다른 것을 말함이다.
송(頌): 오랜 가뭄 끝에 단비 내리고/ 천리 타향에서 친구 만났네.
사족(蛇足):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 마음이 쉬면 부처요, 부처가 작용하면 마음이다.
한 생각 깨달으면 부처요, 한 생각 미혹하면 중생이다. 본체는 동일하나, 작용이 다를 뿐이다.
한 생각 깨달으면 부처요
한 생각 미혹하면 ‘중생’
이 세상은 세 가지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본마음과 마음 그리고 몸이다. 여기에서 본마음은 무분별의 경지이며,
마음은 분별심을 말하고, 몸은 물질을 말한다. 생겨난 순서로 보자면, 본마음자리에서 파동이 일어나 마음이 생겨났고,
마음이 뭉쳐져 몸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예컨대, 본마음이 순수 에너지라면 마음은 파동 에너지요,
몸은 뭉친 에너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길은 그 역순이 된다. 몸뚱이 착(着)이 쉬고 분별심이 쉬면 본마음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본마음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파도가 쉬면 그대로 바다인 것처럼 몸뚱이 착이 쉬고 분별심이 쉬면
그대로가 본마음자리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띳사 장로가 몸에서 나오는 피고름이 썩는 냄새 때문에 홀로 떨어져 누워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아침 일찍 신통력으로써 시방 세계를 두루 살펴보시다가 헛간에서 신음하고 있는 띳사비구를 보시었다. 부처님께서는 그가 법을 깨달을 때가 왔음을 아시고 직접 그를 치료하시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의 침상 곁에 서서 이렇게 설법하시었다. “비구들이여, 너희 마음이 몸을 떠나게 되면 너희의 육신은 아무 쓸모가 없어 마치 나무토막과 같이 흙바닥에 뒹굴게 되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오래지 않아 이 몸 흙바닥에 버려지고/ 마음 또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리/ 그때 덧없는 이 몸은 실로/ 썩은 나무토막보다도 소용없으리”
부처님의 이 게송 끝에 띳사비구는 아라한과를 성취하였고, 곧 열반에 들게 되었다.
몸뚱이는 실로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데 어찌 나의 것이라 말할 수 있으랴?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없다면,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몸과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다. 관리자일 뿐!
월호스님 / 쌍계사 승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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