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상념체가 일어나는 메커니즘 .. 해체와 루진통

장백산-1 2011. 5. 6. 18:07

 

상념체가 일어나는 메커니즘  해체와 루진통

 

 

 

불교에서는 여섯 가지 신통(법력 또는 싯디) 중에서

루진통이란 것이 있다.

그것은 새는 것(漏)이 끝난(盡)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사람이 염체를 만든(창조) 다음에는

그것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만든자의 에너지가

계속 흘러가게 되며

그 상념이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는

그것에게 많은 에너지를 빼앗기는 현상이 발생되는데

 

수행을 통하여

상념체를 해체시키게 되면

더 이상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아도 된다.

 

그리하여

모든 상념(염체)을 해체시키는 상태에 이르게 되면

더 이상 에너지가

새어 나가지 않는 상태가 되는데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루진통의 상태이다.

 

사람이 크게 노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정신적 이유 때문에 더욱 피곤한 상태가 될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정신적으로 많은 상념체와 연결이 될수록

피로가 많이 오는 것은 그 만큼

많은 에너지를 빼앗기기 때문이며

 

어떤 사람과 관계를 가지고 함께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바로 에너지가 계속하여 그 사람에게

흘러나간다는 것을 의미 하기도 하다.

 

그러므로 명상자는

혼자 스스로 상념체와 접하는 것에서

홀로 지켜보는 것도 필요하거니와

사람을 만나

쓸모 없는 시간을 보냄으로서

에너지를 흩어 버리게 되는 것도

생각해 두어야 할 일이다.

 

루진통이란

상념체를 모두 녹이고

이제 더 이상

상념체를 만들지 않는 상태가

되었음을 말한다.

 

 

상념체와 수행에 필요한 조언들

 

 

사람이 염체를 만든 다음에는

그것이 계속 유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에너지가

일부분 계속 흘러가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리의 의식(에너지)이

계속 향해 있는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함부로(아무 염체나) 만드는 것은

자신의 에너지를 나누어 주는 의미가 되며

때문에 하나라도 염체를 해체시킨다 함은

에너지의 흐름을 차단시키는

'루진'으로 가는 길임을 의미한다.

 

 

*

불교에는

수행을 어느 기간 동안 정해 놓고 하는 것을

'결제'라고 부르는데

 

이는 어느 기간을 정해 놓고 집중함으로

상념체를 만들기 위함이거나

상념체를 해체하기 위함이거나

하는 일이 강하게 또는 빠르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기간을 정해 놓고 함으로

그 기간 동안은

그 목적한 바에 시간을 더 많이 투자 할 수 있음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그 목적한 상념에

더욱 깊이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념을 만드는 일에는

강력한 집중을 요하는 일이므로

더욱 많은 에너지가 응집되어 강력한 상념이

만들어 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많은 수행자들이

어느 기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한다거나 명상을 한다거나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부작용도 많이 따르고 있으므로

사전 많은 이해가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

 

 

*

모든 사람은 창조자이다.

 

기도나 주문을 할 때만 창조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알든 모르든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며

예민한 사람은 환시 환청으로 느끼기도 한다.

 

사람의 주위에 있는 동물이나 식물도

오래 될수록 사람의 생각과 염체가 유입되어

그 사람의 염력이 작용하게 되는 일이 발생된다.

 

이런 의미에서 선물을 줄 때

자신이 쓰던 물건을 준다 함은

자신의 마음을 주는 것이며

자신의 정보(지혜)를 담아 주는 결과를 낳는다.

 

주의할 것은

부정적인 사람이 쓰던 물건은

부정적인 상념이 담겨 있기에 조심할 일이다.

 

그러나

그 높이가 높은데 있는 존재가 쓰던 물건일수록

그것을 선물로 받는 사람은

은혜를 입는 것이 되며

거기(물건)에 담겨 있는  정보는

그 사람에게

좋은 결과는 줄 것이다.

 

 

 

 

상념이 만들어 낸 세상

 

 

인간은 창조자이다.

세상은 인간의 상념이 만들어 낸 세상이며

자신이 창조한 속에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삶이 다른 것은 각각 창조한 상념이 달랐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 말은 지금 내가 무엇을 창조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다.

 

 

 

동물은

인간 의식이 형상화 되어 나타난 것이다.

맹수는 인간 의 폭력성이 형상화 되어 나타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맹수에게 물려 죽었다 라고 한다면

이는 과거 자신이 만든 분노와 폭력성이란 상념체에 의해

응보를 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삶을

어떻게 녹여 낼 수 있느냐에 따라

삶과 현실은 달라지고 변화되게 되어 있다.

 

다가오는 상념은 곧 현실이 될 것이므로

부정적 상념이 나타날 때 그 상념체들을

녹여내고자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보와 진리가 그 댓가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어떠한 상념을 창조해 내든지

그것은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자신이 잊고 있었다 할지라도

틀림 없이 어느 날

자신 앞에 다가오게 될 것이며

 

맹수에게 물려 죽은 자가

과거세에 맹수를 물어 죽였기에 맹수에게 물려 죽은 것이 아니듯이

어떤 삶의 상황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삶이 다가왔을지라도

그것은 자신이 창조한 업이

그러한 모습으로

자신 앞에 다가왔음을 알아야 한다.

 

바로 여기서 깨달아야 할 점이 이것이니

폭력성을 창조한 사람은

폭력성에 위해 자신이 고통이나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이며

사랑을 창조한 사람은

사랑에 의해 행복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라면

자신에게 어떤 상황이 왔든지

그것에 대한 깨여있음을 통해

그 상황 속에있는 메시지

즉 자신이 과거에 무엇을 만들었느냐 라는

깨달음이 필요하며

그것이 고통을 창조한 것이라면

그것을 바꾸는 방향전환이라는 것 까지

행동으로 옮겨야

업을 온전하게 녹이는 일이될 것이다.

 

 

 

 

염체를 녹여 낼 수 있는 힘

 

염체를 녹여 낼 수 있는 힘은

중용의 힘이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취하지도 말고 싸우지도 말고 버리지지 말고

지켜 보는 일

 

그러기 위해서는 염체를 들고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일이 필요한데 이것이 중도의 길이다.

 

대적하지 않는 것,

간섭하지 않는 것,

이것이 원리이다.

 

긍정적으로 되었든

부정적으로 되었든

반응 자체는 또 하나늬 상념을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깨여 있다 함은

어떤 상념이 다가 올 때

그 상황 자체에 대하여

반응함이 없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능력이다.

무관심이 아니라

무집착 또는 초월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 상념이 어느 챠크라에서 나왔느냐에 따라

다시 다가온 염체는 그 챠크라를 통과해 가게 되는데

그 지나가는 과정중에

상념이 주는 경험(레슨)을 깨닫게 될 때

그 염체는 해체가 되는 것이다.

 

상념이 주는 메세지를 파악하는 일이

쉽지 만은 않지만 그 메세지를 파악하게 될 때

이는 지혜가 되며

그 지혜는 염체를 해체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대 심연 속에서 상념이 창조가 되는데

이 상념 자체를 받아 들여서 

우리 자신에게 현실 경험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현실적 경험(상념)속에 내재된

신성을 얼마 만큼 파악해 내느냐

여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상념의 일생(대심연 ㅡ 상념 ㅡ 응결 ㅡ 현실적 경험 ㅡ 해체)

을 통하여 상념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을 때칠 때

그 상념은 해체가 되고

그렇치 못할 때는

나중에 또 다른 형태로 다가오게 된다.

 

 

누구든지

생활 속에서

계속하여 끊임없이

상념체와 만나게 되고

그것을

무의식적 삶을 살므로서

업(상념)을 녹이지 못하고 계속 키우고 있느냐

아니면

수행을 통하여

업을 녹여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그 힘은 각성

지켜보는 일이며

지켜보는 힘이다.

 

 

 

선과 악의 차이는

 

선과 악의 차이는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타락과 진보라는 기준에서의 양면성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과거 생에 만든 상념이 다가왔을 때

그것과 직면

또 다른 상념을 만들어 내느냐

아니면 그것을 해체시키고

다신 만들지 않느냐의 차이이다.

 

어떤 사람의 무리 속에 있든

과거생에 만든 상념체와 만나는 것은 똑 같다.

 

그러나 악의 길에 서 있다 함은

무의식적으로 상념체와 만나게 되고

그에 따라 또 다른 염체를 창조 한다는 것이다.

 

선의 길에 있다 함은

인과 응보의 법칙을 이해하고

과거에 만든 자신의 찌꺼기들과의 만남을

깨닫는 것을 이해하여

그것을 한 점까지 완전히 녹여 내지 않고는

완전한 해탈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그것을 하나하나 녹이는 사람은

선의 길에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또는 종교적 교리를

실천함과는 상관 없이

그가

무의식적인 삶을 사느냐  아니면

의식적인 깨여 있음을 통하여 염체를 녹여내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은 종교인이라 하여

선의 길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종교인의 옷을 걸치고 있을 수는 있으나

각성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어떤 마당에 있건 간에

무의식적 삶을 살고 있다면

사망의 마당에 있는 것이요

각성의 마당에서 살고 있다면

생명의 마당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가 결정해 주거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신앙은

군중의 것이 될 수 없고

개인 한 사람의 것이다.

 

 

상념체는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일어나는가?

이는 중첩 원리에 의해 일어난다.

 

현실과 꿈은 하나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꿈은 에너지고 좀더 정밀하며  좀더 활동적이라는 것과

현실은 에너지가 좀더 농밀하며 좀더 비활동적이라는 차이이다.

 

현실보다는 꿈이 더욱 진실 되고

보편적으로 다가선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꿈의 세계에 다가갈수록

본질을 파악하기 쉽고

현실이 꿈과 같아 질 때

그 사람의 진화 정도가 나아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 차이(꿈과 현실간에)가 줄어든다는 것은

현실적 삶을 더욱 깨치고 각성하고  파악했음을 나타낸다.

 

현실과 꿈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사람은

현실적 삶을 파악하는데 각성함이 보족하거나

또는 왜곡되어 있음을 나타내주는 증거이다.

 

그런 사람은

더 많은 시간

삶을 그리고 진실을 볼 수 있기 까지

삶의 현장에 던져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각성. 깨쳐 간다 함은

자신의 참 된 영혼의 첫째 관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발견하고 알아간다는 의미가 된다.

 

삶 속에서의 생활이 꿈 속에서

그대로 꾸어지거나

또는 꿈 속에서 본 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사람은

보다 꿈과 현실의 거리를 좁힌 사람이 되며

꿈 속에서

자신이 꾸는 꿈을 의식하거나

그 꿈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은 꿈의 지배자가 된다.

 

이 말은

환영, 꿈, 현실 등의 현장에서

자신의 본질을 얼마 만큼 파악해 내느냐

여기에 포커스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어떤 목적 자체에만 도취되어 있다 보면

자아상실적 상태에서 사는 것이 되고

결국 자멸감에 빠져 번뇌와 갈등 속에서 살게  된다.

 

번뇌 갈등 혼돈이란

상위차원의 빛(지혜)이 모자라는 데서 오는 마음의 상태이다.

 

목적과 과정 중 어떤 것에 비중을 두어야 하느냐 하면

과정에 비중을 둘 때

거기 깨달음의 열쇠가 있다.

 

이렇게 될 때

그 과정은 순간순간

깨달음의 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에 집착하다 보면

욕망을 향한 대상만이(그 대상이 현실의 것이든 비 현실의 것이든)

중요하게 되고

그것을 간파하는 힘이 약해지게 되어

상념을 녹여 낼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

해탈, 천국, 영적 보상, 수행의 결과 등과 같은

목적 보다는 과정을 얼마 만큼 중요하게 집중하면서

간파할 수 있느냐 즉 현실에서 다가온

순간의 상황들을

얼마 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고 다룰 수 있느냐에 따라

상념체의 실상을 파악하고 녹여 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깨여 있음이여

그것이 각성이며

그것이 존재함이다.

 

 

 

업과 습의 차이

 

 

염체를 쉽게 해체시킬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아주 거대한 힘을 가진 염체도 있는데

이는 과거 수없이 반복하여 습이 된 염체이다.

 

업이란

하나의 씨앗과 같은 것으로

쉽게 해체가 가능하지만

그것이 계속 반복되어

커다란 상념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습이다.

그러한 습은

한 번에 해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고 악한 것인 줄을 알면서도

그 욕망에 따라 계속 반복적인 행위를 하게되면

상념체의 크기와 힘을 계속 증가하게 되며

그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마귀가 되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자신안에 있는 염체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며

그것이 어떤 식으로 다가오고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수행자가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염체를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은

산이나 동굴속에서 보다는

현실 속에서가 더 유리하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이러한 베일에 가려져 있던 염체는 형체를 드러내게 되는데

이럴 경우 즉 잠복해 있던 염체가 다가올 때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평소

영적 역량을 길어놓는 것(鍊)

또는 공력(功力)을 길러놓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람의 가장 깊은 심층의 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또 가장 크고 힘 있는 상념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작은 잎사귀만 훓터내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밑 바닥의 문제를 꺼내어 해결하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요

해탈로 가는 길이다.

 

이렇게 가장 밑 바닥의 카르마를 해체시키기 위해서는

그 만큼 밝은 빛이 필요한 것인데

빛 즉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화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열쇠가 되며

척도가 된다.

 

 

 

상념체을 해체 시키는 일

 

 

불교에서 말하는 고집멸도란

상념체를 녹이는 일이다.

 

꿈과 현실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녹이려면

현실로 물현화 되기전  꿈의 차원에서 녹이는 일이

더 쉬울 것이다.

 

원인체에 각인 되어 있는 인자가

보인이 어떤 대상을 보고 욕망을 일으키면

원인체에 있던 인자(씨)가 발아하여

상념질이 모아들고

상념계에서 형성되어진 것이 현실로 물현화 되는데

그 중간 단계가 꿈이다.

 

꿈의 상태가 좀더 에너지가 응결된 상태가

현실이 되는 것이므로

꿈을 보게 될 때

아직 덜 응결된 상태에서 녹이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며

가능하다면

더 깊은 차원으로 나가

근원에서부터 해체 시키면 훨씬

쉽게 해체가 가능할 것이다.

 

식(識)에서 녹일 수 있다면 첫 번째 좋은 길이요

상(想)에서 녹일 수 있다면 두 번째 좋은 길이요

이미 물현화 되어 현실로 나타났다면 

현실에서라도 녹여야 하니 

이것이 세 번째 좋은 길이다.

 

그것이 밤에는 꿈으로 등장하지만

낮에는 사념으로 등장하므로 

명상을 통하여 

자신의 사념의 흐름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꿈의 단계에서 업을 녹이는 일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신안에 무엇이 있으며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한데 깨어있는 명료한 각성이 요구된다.

 

깊이 들어갈 수 있으며 

깊은 데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자는 

하나의 고가 일어나는 곳으로 다가가 집을 해체 시킬 수 있으므로 멸을 가능케 하므로 도에 이른다. 

이것이 고집멸도의 길이다.

 

꿈이란 

깊은 잠으로 빠지기전 단계에서 일어나는 작용인데

명상을 하다보면 

그러한 상태가 나타난다.

 

그런 상념체를 해체시키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평상시 수행에 정진하는 사람은 

상념체를 해체시키는 능력이 성장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능력은 원인체에 입력이 되고 

그것이 또한 창조적 능력으로 전환되어 있어

그 창조적 능력은 

부조화스런 상념체를 파괴하는 능력으로도 사용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四食

 

불교의 가르침 중에 四食이 있다.

 

1. 단식(段食) - 덩어리 물질 음식

2. 촉식(觸食) - 접촉함으로 얻어내는 음식

3. 사식(思食) - 생각 또는 욕망으로 얻어내는 음식

4. 식식(識食) - 아는 것 또는 지식으로 얻어내는 음식

 

 

이 네 가지 음식은

각 차원의 체에  생명활동을 유지 시키는

생명에너지로 작용 된다.

 

단식 - 인간 축생 무리가 먹는 음식으로서 낮에 취하고

         육체의 생명활동을 유지시킨다.

촉식 - 귀신, 신, 무리가 흡수하는 생명에너지. 기(氣)에너지.

         유체 또는 아스트랄 체를 유지 시킨다.

사식 - 상념 에너지, 욕계 색계 하늘 무리가 흡수하여 유지하는 생명력

         멘탈체를 유지시킨다.

식식 - 지성 에너지, 빛 에너지, 무색계의 하늘 무리가 유지되는

         빛 에너지.    

        색을 떠난 세계이므로 색에 해당하는 단. 촉. 사.가 필요 없다.

        의식을 유지 시킨다.

 

 

< 진리 사랑 그리고 수행 > 중에서

출처 : ★ 우주의 정원 [ The garden of Cosmo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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