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대통령 김두관

[스크랩] [박종렬 교수의 제왕학] `이단아` 김두관, 노무현 넘어 지역구도 흔들까?

장백산-1 2011. 5. 25. 12:09

[박종렬 교수의 제왕학] ‘이단아’ 김두관, 노무현 넘어 지역구도 흔들까?



대권과 관련 노무현을 잇는 잠룡 중의 한 인물로 본인은 아직 이르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꾸준하게 김두관 경상남도지사도 한 축을 이루며 거명되고 있다. ‘노무현 학습효과’가 남아 있는 대중들에게 김두관의 이력이 간단치 않다는데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아니 배제할 수 없는 이미지가 어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대권과 관련해 상품성과 대중성을 나름대로 확보하고 있다는 증좌(證左)다.


그의 이력은 얼핏 보면 ‘리틀 노무현’답게 변방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1977년 남해종합고등학교를 나와 1981년 경북전문대학 행정과를 거쳐 1987년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낙향해 남해 농민회 사무국장(1987년), 민중의 당 남해·하동 조직책(1988년), 남해신문 발행인(1989~1995년)으로 활동하며 농민운동을 했다.


최근 스포츠서울닷컴과의 대담에서 그는 스스로 ‘촌놈’을 자처했다. 스포츠서울닷컴은 “시골 이장에서 출발해 군수, 장관을 거쳐 민선 5기 경남도지사까지…. 경력만 놓고 보면 인간극장이 따로 없다. 하지만 그의 삶은 상투적인 성공신화를 거부한다. 오직 높은 자리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쉬운 길을 놔두고 부러 험난한 길만 걸었기에 오늘날 그의 입지가 더욱 빛나는 지도 모르겠다”고 했는데 인터뷰에 응한 그의 말투에도 소박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촌놈이니까.(웃음) 시골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농사를 2년 지었어요. 그러다가 삼수해서 전문대 갔다가 부산 동아대로 편입했죠. 그런데 대학 때도 형이 농사를 지으니깐 주말만 되면 고향가고 싶고…. 남들처럼 토, 일요일에 여대생하고 데이트할 시간도 없었어요. 현장 주민들과 함께 커온 거죠. 그러다 보니 주민들과는 격의가 없지만 높은 사람들 만나면 막 어색하고 그랬어요. 그 왜 불교 신자가 기독교 목사님 만나면 서먹서먹한 느낌 들잖아요. 그런 것처럼 한국사회 주류 어른들 만나면 서먹서먹했죠. 이제는 주류나 비주류나 위아래 없이 다 편하게 만나요. 능글능글해진 거지.”


이렇게 젊은 시절을 보낸 촌놈 김두관은 1995년 1회 지방선거와 1998년 2회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남해군수에 당선된다. 위키피디아는 그의 이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김두관(金斗官, 1959년 4월 10일 경남 남해군 ~ )은 대한민국의 시민사회운동가, 언론인, 정치인으로, 민선 5기 제34대 경상남도지사이다. 기초자치단체장을 거쳐 참여정부에서 행정자치부 장관 등을 지냈다. 그동안 걸어온 정치 행보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매우 유사해 ‘리틀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상식의 잣대로 보면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의 전형(典型)이다. 1988년 경남 남해 고현면 이어리 이장, 1995년 남해군수, 2003년 행정자치부 장관, 2010년 경남도지사 당선…. 이보다 더 극적인 인생역전의 스토리가 있을까? 그의 이 같은 행보 뒤에는 노무현이라는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전직 대통령의 그림자가 늘 따라 붙어있음은 물론이다. 이른바 리틀 노무현!


작년 6·2 지방선거의 최대 실패작이라 불리는 여권의 공천자 한나라당 이달곤 전 행정안전부 장관과 상대해 아주 멋지게 성공 신화를 이룬 김두관은 우리 정치사에 하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학력도 그의 것은 일반적인 주류와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처럼 여기까지 걸어온 그의 정치적 성공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수려한 용모와 체격, 활달하고 막힘없는 언변,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전력…. 이 모든 것이 그의 오늘날 모습을 다 대변할 수 있을 것인가?


혹자는 김태호 전 경남지사를 6·2 지방선거에 불출마시킨 것을 한나라당 공천실패의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이로 인해 지방정치인과 중앙정치인, 보수와 개혁, 강자와 약자, 새로운 바람과 구태의 답습이라는 대립구도가 살아났다. ‘촌놈’ 김두관이 추구해온 이미지와 포지션은 이와 같은 확실한 대립 구도를 짜기에 충분했다.


당선 직후 그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경남자치 16년 역사에 시민사회와 야4당이 지지하는 무소속 도지사가 탄생한 것 자체가 첫 변화”라고 했다. 그리고 함께 출마했던 민노당 강병기 후보를 정무부지사로 임명하고 민주도정협의회를 만들었다. 과연 리틀 노무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행보다. 김두관 지사의 이러한 파격은 그의 인생 이력을 들여다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변방에서 성장한 인물이 주류에 들어가기 어려운 게 우리나라 패거리 정치문화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의 뿌리는 주류속의 편안한 머리싸움이 아니었다. 삭풍이 부는 광야에서 나름대로 익힌 야생마의 강인성과 저돌적인 생존 본능에서 그의 드라마는 출발했다. 결국 그는 잡초처럼 자신의 길을 가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디딤돌 삼아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대붕도남(大鵬圖南) 꿈꾸는 역류(逆流)의 정치인


남해군수 시절 그가 벌인 각종 시책들은 노 전 대통령이 14대 총선 당시 부산에서 출마하며 내건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헤엄친다”는 구호를 연상케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낙선을 거듭하면서도 부산 출마를 그만 두지 않았다. 지역주의 당색 앞에서는 소신도, 능력도 통하지 않는 한국의 정치현실. 그 한가운데서 ‘바보 노무현’의 도전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보였다. 이 포기를 모르는 도전이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것처럼 리틀 노무현은 남해에서 정치실험을 하고 있었다.


김두관은 다른 군수들과는 너무 달랐다. 36살의 나이로 남해군수에 당선된 그는 취임 직후 기자구락부를 폐쇄하고, 공무원과 지역 언론사와의 유착 관계를 근절하였다. 취임 직후 군수 관사를 철거하고, 그곳을 민원인 쉼터와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등 파격적인 행정을 펼쳤다.


전국 번지점프대회를 남해대교에서 개최한 그는 군수라는 직책에도 불구하고 직접 번지점프를 하여 당시 화제가 되었다. 민원인 공개법정을 열어, 민원인들과 밀실에서 대화를 나누지 않고, 공개적인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렸다. 이렇게 해서 남해군의 골칫거리였던 어장 분쟁 등을 해결하였다. 1970년대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 등 파독 교포들이 우리나라에서 쉴 수 있도록 ‘독일인 마을’을 만들기도 했다. 또 남해에 스포츠 파크를 만들어 여러 나라 국가대표들이 전지훈련장으로 쓸 수 있게 했다.

이 같은 행정은 당시 지방자치 환경으로 보면 교범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각종 지자체 평가에서 모두 1위를 하였고 환경대상 수상, 환경시범도시 선정 등 각종 수상과 찬사가 이어졌다. 지방자치제의 의미를 부각시킨 그의 군정은 많은 일화를 남기며 정치적 도약의 서막을 열었다.


군수를 지낸 뒤의 정치행로는 노무현과의 깊은 인연 속에서 전개되고 있음이 읽혀진다. 그럼 노무현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위키피디아가 요약한 아래와 같은 그의 정치역정은 또 다른 노무현의 일대기를 읽는 것 같은 데자뷰 현상이 일어난다.

“군수를 역임한 그는 원래 2002년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남도지사에 도전하려 했으나, 당시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 권유로 고심 끝에 민주당에 입당하여 경남도지사에 출마했다. 비록 한나라당 소속의 김혁규 경남도지사에게 밀려 낙선했지만, 당시 YS와 접촉하던 노무현에게 직언을 하는 등 소신 행보를 보여 일각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2003년 2월 25일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김두관은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발탁되며 파격 인사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2003년 8월 한총련이 전쟁반대를 목적으로 포천에서 훈련을 하던 미군 스트라이크부대 사격 훈련장에 진입, 불법적으로 기습시위를 하면서 성조기를 불태우고 장갑차를 점거하는 행동을 보이는 바람에 한미간 우호적 관계 악화, 치안부재, 경비소홀 등의 책임론이 당시 거대 야당이던 한나라당에 의해 제기되었다.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만류와 김두관과 동향인 한나라당 중진 박희태 의원의 지도부 설득에도 불구하고 결국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안이 2003년 9월 3일 여소야대 정국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던 한나라당에 의해 가결된다. (한나라당 및 자민련 의원만 출석, 160명 표결, 찬성-150표, 반대-7표, 기권-2표, 무효-1표)


노무현 대통령은 김두관 장관에게 국회를 설득하라고 지시하고 야당에 철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한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해임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대답이 높았다. (거부권 행사 58%, 해임안 수용42%) 같은 해 9월 17일 김두관 장관은 사표를 제출했고 허성관 해양수산부 장관이 새 행정자치부 장관직에 내정되었다. 9월 19일 정부 종합청사에서 이취임식이 열렸다.


이후 그는 2004년 총선에서 경남 남해·하동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의 중진 박희태 의원에게 7천여표차로 패했다. 이후 열린우리당 중앙위원(2004~2007년), 청와대 정무특보(2005~2006년)를 차례로 지냈으며 2006년 지방선거에서는 경남도지사에 출마했으나 한나라당소속의 김태호 경남도지사에게 50여만 표차로 참패한다. 2006년 11월 6일 국정자문회의 의원 138명을 보궐할 때, 국정자문위원으로 추가 보선되었다.


2009년 10월 경남 양산 재보궐선거에서 참여정부 출신 송인배 전 행정관이 출마를 하자, 김두관 전 장관은 문재인 전 비서실장,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현 충남도지사)과 함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다. 그 뒤 2010년 4월 26일 경상남도지사로 출마하여 야권단일후보로 결정됐다. 희망자치만들기경남연대와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이 참여한 야권단일후보 경선에서 전국 최초로 야권단일후보에 선정되었으며 여세를 몰아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달곤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두관은 ‘당선축하 화환 대신에 쌀을 보내오면 불우이웃을 돕는데 쓰겠다’고 하였으나 선관위 측에서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하여 이를 번복하기도 하였다. 네티즌들은 ‘수십만 원짜리 화환은 합법이고, 불우이웃 돕는데 쓰는 쌀은 불법이냐’며 선관위 측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군수도 무소속으로 재선했던 그는 도지사도 무소속으로 도전해 성공했다. 한국정치에서 보기 드문 역류(逆流)의 정치인이자 이단아(異端兒)다. 대붕도남(大鵬圖南)을 꿈꾸는 그의 미래까지도 이런 ‘역발상’ 식의 역류가 통할지는 아무도 예단(豫斷)할 수 없는 일이다.


‘낙동강 투사’가 된 괴짜 도지사


그는 경남도지사 취임 후 MB정권에 대항한 ‘투사’가 되었다. 현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며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김 지사는 정부의 낙동강 사업권 회수에 반대하는 소송에서 3가지 반대사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정부의 사업권 강제회수 자체가 부당하기 때문이며 둘째, 진실에 눈감지 않고 도민의 입장에서 낙동강사업을 걱정하는 목소리에 대해 경남도가 대처했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이며 셋째, 우리가 하는 일이 정의롭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가 경남도에 위임한 4대강 사업권을 회수했지만 감시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김지사는 최근 4대강 사업 현장에서 준설선이 침몰, 기름이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정부에서 출입을 막자 헬기까지 띄워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경남 남해·하동 총선, 경남도지사 선거에서 여러 번 낙선했어도 또 다시 도전해 온 그의 이력은 이 같은 고집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는 스포츠서울닷컴과의 인터뷰에서 “낙동강 전선에서 열심히 싸우는 투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연한 사람이다. 상대방의 흐름을 잘 이해하는 쪽”이라며 “그러나 전선에서 싸울 때는 싸워야 한다. 낙동강 문제는 단호하게 싸우는 케이스다. 그러다보니 ‘투사 김두관’이란 별명이 붙여진 것 같다”고 말했다.


중앙정부에서는 ‘괴짜 지사’가 나와 애를 먹인다고 말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예컨대 육안으로만 봐도 원인을 알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분석이 안됐다고 미루는 모습이 그로서는 답답하다. 중앙 정부와 부딪치지 않고 유연하게 가고 싶지만, 4대강 사업에 관한 한 많이 부딪치는 것이 현실이다. 4대강 사업과 관련, 이재오 특임장관이 “역사에 길이 남을 대통령”이라고 평가한 것에 대해 그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이렇게 답했다.


“후사에 길이 남을지, 남지 않을지 여부는 좀 더 두고 봐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떠나 민주적 절차와 형식을 밟는 게 맞죠. 국민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양해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 절차를 생략했기 때문에 걱정입니다. 중국의 제왕학 교과서인 ‘정관정요(貞觀政要)’에는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역구도 흔들면 ‘강소브랜드’에서 ‘메가브랜드’로


그의 젊은 시절부터 소신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며 고단한 삶을 살아왔다. 1986년 이재오 특임장관이 서울 민통련 부의장일 때 사회팀 간사였던 그는 직선제 개헌투쟁을 위해 청주로 내려갔다가 구속돼 100일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펼치며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소박한 꿈을 꾸기 시작한 게 그 시절이다. 이를 위한 첫 단계로 그는 남해신문을 만들어 지방행정을 감시하고 주민들을 대변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풀뿌리 민주주의의 싹을 틔운 그가 최연소 군수를 거쳐 파격적으로 행자부 장관에 기용된 데는 노무현 대통령의 힘이 절대적이었음은 물론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주창한 균형발전과 지방분권의 적임자로, 주류에 반대하는 실험정치의 미니어처로 김두관을 선택했다. 그를 통해 자신이 꿈꾸던 이상을 현실 속에서 시도했다.


김두관 지사는 한 인터뷰에서 “주민투표제 도입 발표 날 고건총리가 ‘협의도 안하고 왜 한건주의로 했느냐’고 질책하고, 노무현 대통령도 ‘너무 빠른 것 아니냐’며 걱정했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고 밀어붙였다”고 한다. 그는 비주류정신은 물론 추진력까지 갖춘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으며 정치적 자산을 쌓아나갔다. 그것이 6.2 지방선거에서 성공하는 데 밑천이 되었다.


이광재 전 강원지사는 김두관 지사에 대해 “여태까지는 노 대통령의 그늘 속에 있었고 이제 처음으로 시험대 위에 오른 것이다. 중요한 건 본인의 비전과 경영능력이다. 지금은 평가를 하기에는 이른 시기라고 본다”고 했다.

정치마케팅 측면에서 보면 그는 차별화에 성공한 정치인이다. 다만 그 뒤에 리틀 노무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고 있다. 작은 권력의 최전선에 있는 그는 노무현을 넘어서야 한 다. 정치 행로에 있어 순환의 고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움켜쥐어야 한다. 그는 거대브랜드가 아니고 강소브랜드가 착점되어 있는 정치인이다. 일등 브랜드가 되려면 볼륨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지력(知力), 재력(財力), 기반(基盤)을 정립(鼎立)하고 조화시켜 행동의 자유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의 성공을 내심 폄하하는 반대편도 있다. 그러나 대권은 반대편을 설득할 시간이 없다. 자기편을 열심히 늘려가는 것이 오히려 대권으로 가는 첩경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남 개혁세력의 좌장이자 무소속 도지사인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파격적이다.


“나의 당선은 지역주의를 넘은 것이다. 영남에서 제2, 제3의 김두관이 나와야 하고 한나라당이 호남에서도 지지받아야 의미가 있다”는 게 그의 주장. 내 지지자는 사수(死守)하고 남의 표는 빼앗아 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지역구도 자체를 흔들어 놓자는 것이다. 그의 생각이 현실화 되어 강소브랜드가 메가브랜드로 떠오를 그 날이 언제쯤일까?

[박종렬 ㅣ가천의과학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

출처 : 반딧불[Fire fly]의 블로그
글쓴이 : 반딧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