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스크랩] 불이법. 불이일원론의 개요

장백산-1 2011. 9. 26. 13:04

중세 인도의 철학자 샹카라(700~750경) 또한 가우다파다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주로 〈베단타 수트라〉에 대한 주석서 〈샤리 라카 미망사 바시아 Sari-rakamimamsa-bhasya〉('자아 연구에 대한 주석서'라는 뜻)에서 그러하다. 샹카라의 철학은 논리적 분석에 의해 경험적인 세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는 곧바로 절대자(브라만)에서 출발한다.

 

그는 정확히 해석하면 〈우파니샤드〉는 브라만의 본질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그는 완벽한 인식론을 발전시켜 현상적인 세계를 실재로 보는 인간의 오류를 설명하려 한다. 샹카라의 기본적인 견해는, 브라만은 실재하며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떠한 변화나 이원성·다양성도 환상이다. 자아는 브라만과 결코 다르지 않다. 이런 동일성을 통찰하게 되면 정신이 해방된다.

 

브라만은 현상적 경험의 형태일 뿐인 시간·공간·인과를 넘어선다. 브라만 내에서 또는 브라만으로부터의 차별은 불가능하다. 샹카라는 동일성을 말하거나('네가 그것이다') 차별성을 부정하는('여기에 이원성이란 없다') 경전들을 가리키며, 아무런 속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nirguna) 브라만의 참된 뜻을 밝히고 있다고 말한다(→ 니르구나). 인격적 브라만에 속성이 있다(saguna)고 하는 그밖의 책들은 브라만의 참 본질이 아닌 인격적 신(Isvara)의 측면에서 브라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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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인터넷 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에고는 상카라의 말, 석가모니의 말, 예수의 말, 노자의 말 등의 불이 일원론에 대해서 '주장' 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밖에 없지만 이는 실재이다.

단지 에고(이기주의자)의 생각(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개체적 자아의 '나는 생각한다'는 생각의 영역을 넘어선. 즉 자아를 초월한 인물들의 말들이기에 해석하는 사람의 지식수준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되는 것이다. 

 

불교의 불법의 근간이 불이법이다.

즉 둘이 아닌 하나임을 표현는 말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를 철학, 또는 문학 등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음이 당연할 것이다. 

 

불이 일원론이라는 말 조차도 에고의 이해를 돕기 위한 표현일 뿐이며 에고의 생각으로는 이를 해석할 수 없기에 불이 일원론의 연설들이 왜곡되어 종교 및 유사종교 등의 단체가 되었다. 

   

이것이다, 또는 저것이다 라는 분별된 언어로는 설명될 수 없기에 '이것도 아니다, 또는 저것도 아니다' 라는 말로 표현될 수 밖에 없음에서 신비스러움으로 포장된 것이다.  

 

분별된 언어로 표현된 말들이 '진리', 노자의 '도'와 '모든 것의 기원', 예수의 하나님과 유일자', 석가의 '부처' 인도에서 말하는 유일신, 브라흐만, 아트만, 인격신 등이다.  

 

불이 일원론을 부정철학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분별된 언어로 표현될 수 없기에 진리는 아무것도 없음이며, 아무것도 없음은 모두 있음이기에 해석될 수 없다.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말은 '언어나 문자로 표현될 수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불이법은 여러 학파로 나뉘어져 의견이 분분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학파를 논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사랑과 석가모니의 자비를 분별할 수 밖에 없음에 대해서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교주로 되어있는 석가모니와 예수의 본질이 불이법에 근거하기에 그들의 연설이 다르지 않음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능하도록 더욱더 자세히 설명해 나갈 것이다. 

 

예수와 석가모니, 노자 등의 연설은 불이법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분별된 생각(경험)에 따라 다르게 보일수 있음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불이법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는 있지만 불이법, 즉 둘이 아닌 하나다, 라는 말도 옳은 표현일 수는 없다. 

둘이거나, 또는 하나라는 말이 분별이기 때문이다.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기에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라는 말로 표현될 수 밖에 없는 것이면서도 그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도 옳은 표현일 수는 없다. 

다만 생각의 이치를 깨우치기 전에는 인간이라는 이름, 사람이라는 이름, 나라는 이름 등의 이름이 있었기에, 또한 모든 사람들이 이치를 깨우칠 수 있으며, 그것이 경험과 분리된 실재, 경험에 의한 나라는 생각 이전의 순수함에서의 분별심이 있기 전의 상태로 설명되어야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기에 순수의식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유사한 서적들을 통해서, 유사한 말들을 인용하여 책을 펴내고 스승의 행세를 하지만 불이법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또 다른 언술이 뛰어난 자들에 의해 유린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또한 에고의 서로 다른 삶일 뿐이다.

사례를 들자면 수행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오쇼 라즈니쉬와 마하라지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에고의 한계이다. 

불이법은 결코 인간의 지식으로는 해석될 수 없기에 더 강한 에고에 끌려 다닐 수 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생각의 이치를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글을 보더라도 설령 깨우치지 못했거나 언술이 뛰어난 자들의 말을 듣더라도 자신의 나와 다른 나를 분별하지 않는 삶을 통하여 항상할 수 없는 인생을 평화롭게 살아나갈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에고의 삶은 오직 자신의 나, 즉 육체에 한정된 생각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자신의 나의 작은 기쁨이나 행복을 위해서는 다른 나를 짓밟고 핍박하는 행위들에 대해서 너무도 당연시 함에 대해 짐작하거나 염려할 가치 조차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행복이나 기쁨, 즐거움을 위한 모든 행위의 결과는 대상자인 다른 나에게는 고통과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감지할 수 없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나의 작은 즐거움만을 즐기려는 이기적인 잔인함에 대해서 놀라워 하지도 않는 다는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더 많이 채우기 위해서 우상을 숭배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자신의 나보다 다른 나를 우선 생각하는 마음으로의 삶이 인간의 평화일 것이기에 그 이치를 전하는 것이다. 

 

이곳을 통하여 불이 일원론의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인간의 평화로운 삶의 길을 구체적으로 적어나가 보려 한다. 

 

인간은 신으로 태어난다. 

욕망의 근원은,

자신의 본성인 순수의식, 즉 신을 망각하였기에 신(순수의식의 완전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세상 어느것도 내 마음대로 될 수 없는 것,  

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본성인 신을 믿고 신에 의지하며,

화두하나 지니는 삶. 

진리의 길이다.  

 

불이일원론은,

천지만물은 실재가 아니며, 오직 경험과 분리된 나, "순수의식"의 그것만이 실재함을 설명하기 위한 논리이며 일념의 법칙이다.

출처 : 비밀의 언어 불이일원론
글쓴이 : 진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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