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잠이 깊어 꿈도 생각도 없는데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장백산-1 2011. 10. 1. 15:27

 

‘잠이 깊어 꿈도 생각도 없는데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가’

 
항저우·쑤저우(중국) | 김석종 선임기자

 

지난 10~13일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이 마련한 ‘중국 간화선 선적지 순례단’을 따라 중국 남쪽 저장성(浙江省)과 장쑤성(江蘇省)의 선종사찰을 탐방했다. 저장성 닝보(寧波)시 아육왕사(阿育王寺)와 천동사(天童寺), 항저우(恒州)시 천목산(天目山)·고려사(高麗寺)·정자사(淨慈寺)·영은사(靈隱寺), 위항(余杭)시 경산사(徑山寺), 장쑤성 쑤저우(蘇州)시 천령사(天零寺) 등을 돌아보는 여정이었다.

 
한국 불교의 대표적 선지식인 고우스님(71·경북 봉화 금봉암 주지)과 대강백인 무비스님(65·부산 범어사 승가대학장)이 스님을 포함한 108명의 순례단을 이끌었다.
 

순례단은 아육왕사 주지 스님의 배려로 사리함 안에 모셔진 부처님 진신사리를 친견했다. 스님들이 친견에 앞서 절을 올리고 있다.


# 화두 하나로 진리를 꿰뚫다.

화두를 참구해
깨달음에 이르는 불교 수행법인 간화선은 중국 남송 시대 대혜종고 선사(1089~1163)가 주창했고, 고봉원묘 선사(1238~1295)가 만개시켰다. 공산화와 문화혁명 등으로 중국에서 불교가 쇠퇴하면서 현재 간화선 수행은 한국불교가 유일하게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대혜 선사의 ‘서장(書狀)’과 고봉 선사의 ‘선요(禪要)’는 지금까지 조계종 수행법의 근본인 한국 간화선의 기본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다.

간화선의 두 주역인 대혜 선사와 고봉 선사의 발자취를 찾아나선 길. 순례단은 태백산 황정봉 아래 아육왕사로 향했다. 순례단을 이끄는 고우스님은 이동하는
버스에서 “우리가 선을 공부하는 목적은 본래 부처의 자리인 공(空·비움)을 깨달아 날마다 향상되고 좋은 날이 이어지는 행복을 찾는 것”이라며 “바깥에서 찾는 행복을 버림으로써 부처가 발견한 진정한 행복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간절하게 느끼는 순례가 되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대숲에 둘러싸인 아육왕사는 1700년 전 동진시대에 처음 세워졌다. 대혜스님은 당쟁에 휘말려 귀양살이를 한 후 67세 때 이곳에 와서 3년 동안 주석하며 1만2000여 사부대중에게 법을 폈다. 선(禪)의 진작을 통해 요나라와 금나라의 침략으로 무너진 중화인의 자존심을 일깨우려고 했다. 그는 스님뿐 아니라 일반 불자들에게도 간화선을 가르쳤다. ‘서장’은 그가 40명의 사대부, 2명의 스님과 주고 받은 간화선 수행에 관한 편지글을 모은 책이다.

아육왕사에는 석가모니의 정골사리를 모신 사리보탑이 있다. 아육왕사 주지 스님은 “보는 이에 따라 검정색, 황금색, 갈색으로 달리 보인다”면서 사리함 안에 모셔진 부처님 진신사리를 순례단에 공개했다. 순례단은 한 명씩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한 채 사리함의 작은 틈으로 팥알 크기의 진신사리를 만났다. 개산당 벽에 걸린 대혜스님의 석판 초상이 아육왕사에 남아있는 스님의 유일한 흔적이다. 기둥에 붙어있는 ‘조고화두(照顧話頭·화두를 비추어보라)’ ‘염불시수(念佛是誰·염불하는 자가 누구냐)’ 같은 글귀에서 선종사찰의 전통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두번째 순례지인 천동사도 태백산 자락에 위치한 가람이다. 천동사 역시 승방이 999칸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웅장했다고 한다. 묵조선의 수행체계를 세우면서 같은 시대 대혜스님과 쌍벽을 이룬 굉지정각 선사(1091~1157)가 30년간 주석했다. 묵조선은 화두를 들지 않고 고요한 관조로 선정을 닦는 소극적인 수행법이다. 대혜스님은 묵조선을 ‘죽은 선’ ‘묵조 사사배’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굉지스님이 대혜스님에게 자신의 사후 법문을 부탁했을 정도로 우정도 깊었다고 한다.


# 죽음의 관문(死關)으로 나가다

대혜선사 초상(사진 왼쪽) 고봉선사 좌상

둘째날 순례단은 항저우시 북쪽 임안(臨安)에 있는 천목산을 찾았다. 저장성에서 가장 높은 천목산은 고봉선사의 치열했던 구도 현장이다. 순례단은 버스를 타고 해발 1500m의 정상부근까지 올라가 돌계단 등산로인 ‘천년고도(千年古道)’를 따라 도보로 하산했다. 지난해 중국정부가 새로 조성했다는 돌계단은 8㎞, 2시간30분 거리에 이른다.

첩첩산중 천목산에는 아직까지 고봉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었다. 정상 부근의 암자인 ‘개산노전(開山老殿)’은 그가 처음 천목산에 머물던 곳이다. 고봉의 금동좌상 좌우로 제자인 중봉명본, 단애요의의 좌상이 있다. 스님의 발우와 가사, 1319년 고려의 심왕(沈王)이 중봉스님에게 하사했다는 가사 등 유물이
보관돼 있다.

고봉스님은 개산노전에 사람들이 몰려들자 서봉 동공동에 ‘사관(死關)’이란 이름의 토굴을 짓고 숨어들었다. 사관으로 가는 길에는 수령 600∼1000년의 삼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장대했다. ‘나무의 왕’이라는 뜻의 ‘대수왕(大樹王)’, 나무 9그루의 뿌리가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이 드러난 ‘구룡벽(九龍壁)’ 등이 눈길을 끈다.

천길 절벽 바위 위에 사관이 있었다. 대혜가 입적할 때까지 15년간 죽음을 각오하고 면벽수도한 ‘무문관’이다. 고봉은 그야말로 철저히 죽어서 대자유를 얻기 위해 이곳에 들었다. 사관은 줄을 타지 않으면 오르기 어려울 정도로 험한 곳이었다.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토굴이었지만 시봉조차 두지 않았다. 사관 건너편 아득한 절벽에 부처
얼굴 형상의 바위가 매달려 있다. ‘불면암(佛面岩)’이다.

사관 옆에 지어진 사자구(獅子口)에는 ‘철저히 죽어야만 산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고봉의 사자후가 쓰여있다. 순례단에 동참한 수행자들은 사관의 서릿발 같은 기상을 온몸으로 느끼는지 숙연한 표정이었다.

58세 되던 해 고봉은 제자들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임종게를 설했다. “와도 사관에 들어온 일이 없으며/가도 사관을 벗어나는 일이 없네/쇠로 된 뱀이
바다를 뚫고 들어가/ 수미산을 쳐서 무너뜨리도다.” 제자 중봉은 “천목산이 높다고 하나 고봉의 높이를 넘지 못하고, 겹겹이 지옥의 관문이 험하다고 하나 사관(死關)의 험준함에 비교할 수 없다”고 스승의 고고함을 칭송했다.

고우스님은 사관에서 “중생은 열린 곳에서 닫힌 곳을 보지만 고봉스님은 철저히 닫힌 곳에서 열린 세계, 바로 공을 보았다”면서 “공을 이해하면 영원히 지혜로워지고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공동체의식이 생긴다”고 말했다. 이런 고봉의 가르침을 담은 책이 바로 ‘선요’다.


# 살고 죽는 것도 다만 이러하다

천동사 천왕전. 간화선 대혜선사와 쌍벽을 이룬 묵조선 굉지선사가 주석했던 사찰이다.

중국내 유명한 관광지인 서호(西湖) 주변에는 고려사와 정자사, 영은사가 흩어져 있다.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머물렀던 고려사는 우리나라와 관계가 깊어 순례에 포함됐다. 정자사는 고봉스님이 교종(敎宗)에서 선종(禪宗)으로 수행방향을 바꾼 절이다.

경산사와 천녕사는 대혜스님과 고봉스님이 시대를 달리하며 발자취를 남긴 곳이다. 경산사는 천목산맥 자락 아득한 곳에 있었다.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2시간 넘게 달려 깊고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하는 산악오지였다. 경산 오르는 길에는 산꼭대기까지 대나무밭과 차밭이 펼쳐져 있었다. 경산은 모죽산(毛竹山)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대나무가 많다. 또 중국의 명차로 꼽히는 경산차의 고향이기도 하다. 차와 선이 둘이 아니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도 이곳에서 꽃을 피웠다.

고봉스님은 24살 때 이곳에서 한철을 머물며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라는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화두에 몰두해 첫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대혜스님은 46세에 처음 경산사 주지 소임을 맡았고 이곳에서 입적했다. 대혜스님이 이곳에서 쓴 편지가 뒷날 ‘서장’으로 묶어졌다. 열반을 앞둔 대혜스님에게 제자가 임종게를 청했다. 스님은 이렇게 읊었다. “사는 것도 다만 이러하고/죽는 것도 다만 이러하네/게송을 남기고 남기지 않는 것/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당시에는 2000여명의 스님들이 살았다고 하지만 현재의 규모는 초라하다. 순례단은 이곳의 선방에서 철산스님(문경 대승사 선원장)의 죽비에 따라 잠시 선정에 들었다.

장쑤성 천녕사는 대혜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절이다. 고봉스님이 스승으로부터 ‘잠이 깊이 들어 꿈도 생각도 없고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때에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화두를 받은 절이기도 하다. 고우스님은 천령사에서 순례 마지막 법문을 했다.

“날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강행군으로 이번 간화선 순례는 매우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중도 하차하거나 지겹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공부의 목적이 간절하고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천목산이나 경산사 가는 길보다 훨씬 더 힘들고 험난할 수 있습니다. 순탄치 않은 인생 길일지언정 진리와 존재의 의미를 찾아간다는 목적이 뚜렷하다면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이 마음으로 일생을 살기 바랍니다.”

〈 항저우·쑤저우(중국) | 김석종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