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하는 의식의 양자세계는 수도 헤아릴수 없는 의식의 파동들이 존재하며 한번 존재한것은
영원한 자국을 남기고, 필요할때는 그 자취를 되불러 올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실체가 있으며, 실체가 있는 존재성은 운동역학에 반응을 합니다.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것은 실체가 없으므로 반응을 할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있다고 말할때 있다는 있다라서 일어나는 현상을 줄여서 있다고 합니다.
존재하는 있음의 의식적 파동은 근육을 강하게 하고 존재성이 약한것은 근육을 약하게 합니다.
사랑과 평화, 행복, 기쁨, 감사, 온유, 겸손, 포용성, 화목, 안정, 거룩함, 아름다운, 진선미, 이뻐,
중용, 용기, 진실, 하나님, 좋아요, 웃음, 깨달음, 수용성, 화합 상생등등...은
몸에 근육을 강하게 합니다.
물론 언어마다 고유한 리듬의 소리빛이 다르므로 각각 반응이 조금씩 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 슬픔, 미움, 저주, 증오, 원망, 시기, 질투, 시비, 전쟁, 폭력, 자살충동, 좌절, 우울증,
유황불못, 지옥, 악마, 짜증남, 조급, 분열, 이간, 당짓기, 집착, 비판, 험담 등은 현존하는 사랑의 에너지가 부재하므로 근육에 반응이 약하거나 반응하지 않습니다.
우주는 예, 와 아니오 로만 대답하므로 존재하거나 이로운것은 반응하고 몸에 이로운 에너지가
약해질수록 현존성이 떨어지므로 반응이 약하게 나타 납니다.
자~ 그러면 배워 볼까요,,,
(2011년 12월 17일 운동 역학 측정을 배우는 모임을 하였습니다. 녹음 파일이 없어 예전 동영상 첨부 합니다.)
운동역학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근육의 강약으로 체크하기에 동양에서는 오링테스트나 압력 측정기를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고 할매돌을 가지고 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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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게시물은 카페 모임에서 나눠드린 13페이지 프린터 내용물 입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가 <의식혁명>이라는 저서에서 사람들에게 소개한 <운동역학 측정법>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이 방법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우주를 초월한 자신의 근본인 무한한 신성을 통해서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건이나 사물의 진위여부를 판별해주는 방법입니다. 또한 자신과 다른 존재의 의식레벨을 측정할 수 있으며 어느 영적인 존재나 스승이 진짜이고 누가 가짜 스승인지 의식레벨을 측정해서 즉시 가려낼 수 있으며, 그 가르침의 진실도와 의식레벨도 측정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궁금해하는 모든 채널링 메시지의 진위 여부나 메시지의 진실도를 측정해서 진짜, 가짜 메시지를 구별해 낼 수 있을 겁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과 방법은 제가 카페에 올렸던 글과 다른 분의 글을 함께 올려드리니 보시고 많은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우리 모두 함께 채널링 메시지가 올라올 때마다 그 진실도를 측정해서 서로 비교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확한 방법으로 측정하면 측정치는 서로 같게 나온다 합니다. 앞으로는 모든 채널링 메시지의 진위여부를 우리 모두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존재계의 무한한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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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킨스 박사 - 운동역학 측정법
두 사람이 필요하다. 한사람은 피험자로서, 한 팔을 바닥과 수평으로 유지하며 옆으로 올린다. 시험자는 두 손가락으로 올려진 팔의 손목을 누르며 '저항하라'고 말한다. 피험자는 팔이 아래로 내려가는 압력에 온 힘을 다해 저항한다. 이것이 시험의 전부이다.
시험자와 피험자는 서로 말할수 있다. 피험자가 시험자의 질문을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피험자의 팔의 힘이 시험자의 누르는 힘에 의해 측정된다. 만일 언급된 사실이 부정적이거나 허위이거나 200 이하의 수치를 보이는 경우, 피험자의 힘은 '약해진다'. 만일 대답이 긍정적이거나 수치가 200 이상인 경우 피험자는 '강해진다'.
일단 수치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이 드러나면, 수치 측정으로 들어간다. 시험자는 '이것'(이 책,이 협회,이 사람의 동기 등)이 '100 이상' 인지,'200 이상' 인지,'300 이상' 인지를 물으며, 이 물음은 근육이 약한 반응을 보일 때까지 계속된다.
그런후 '220 이상?' , '225 이상?' '230 이상?' 등으로 더 자세한 수치를 결정한다.
시험자는 피험자와 역할을 바꿀 수 있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시험 방법에 익숙해지면, 회사나 영화, 개인, 역사적 사건의 평가, 혹은 당면한 인생 문제의 진단에 이 시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언급된 진술이 명확치 않은 경우, 시험 결과는 신빙성이 없어진다. 미래에 대한 진술에도 신빙성 있는 대답을 얻을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상태나 사건에 관한 언급만이 일관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시험 중에는 개인의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느낌이 상대방에게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피험자로 하여금 눈을 감게 하면 시험의 정확성이 높아지며, 배경 음악이 있어서는 안 된다.질문을 하기 전에 이런 질문을 해도 괜찮은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는 것이 유용하다. '아니오' 라는 대답을 얻는다면 시험자는 그 질문을 더 이상 하지 말거나, 왜 '아니오'의 대답이 나왔는지 원인을 찾아 보아야 한다.
시험자가 피험자의 대답이나 암시로부터 정신적인 갈등이나 곤경에 빠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때로는 피험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반응을 염려한 나머지, 질문이 전해 주는 상황이나 사건을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받아 들여 잘못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시험의 정확성을 위하여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안경(특히 금속 안경테는 안 된다)은 벗어야 하고, 모자(화학섬유로 된 모자를 쓰고 있는 경우엔 예외 없이 약한 반응이 나타났다)도 벗어야 한다.
시험을 하고 있는 팔에는 보석이나 수정시계 등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시험자의 향수나 부정적 감정이 담긴 목소리 등도 결과에 영향을 줄수 있다.그리고 질문은 항상 그 범위가 좁아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이다. 무엇보다도 말의 정확성이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결정이 잘 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잘된'것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누구를 위해서 잘되고, 그 기간은 얼마 동안이란 말인가? 정확한 의미를 갖는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잘 되다, 못되다, 좋다, 나쁘다는 생각은 주관적인 것일 뿐이다. 거기에 대한 우주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아주 다를 수도 있다.질문의 동기는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이 질문을 해도 좋은가?"를 묻도록 하라. 어떠한 대답이 나오든 자기 자신이 거기에 대처할 수없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믿고 있는 것과는 사실 자체가 전혀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수치로 나타나는 끌개 패턴의 힘은 진실의 수준이나 정직성 정도를 여실히 보여주게 되므로, 진실과 거짓, 건설적인 것과 파괴적인 것, 실용적이고 효과 있는 것과 비실용적이고 낭비적인 것들을 명확하게 분별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어떤 프로젝트나 각 개인들이 목표와 동기, 안건 등에 대해서도 감정할 수가 있다. 늑대가 양 가죽을 뒤집어쓰고 양인 척하는 일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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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측정하는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운동역학 측정법>
운동역학 측정법은 일반적으로 두 사람이 측정하는 방법이지만,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저서 <호모 스피리투스>에 보면 혼자서 측정하는 방법도 나와 있습니다.엄지와 다른 한 손가락을 붙여 ' O '자를 만들어 혼자 실험할 수 있는데,이것은 손가락 고리에 힘을 주고 있는 동안 그 고리를 떼는 데 드는 힘의 세기를 측정하는 것이라 합니다.
마음속에 옳은 진술을 품고 있으면 ' O '자 고리는 떼기가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옳지 않은 진술이면 고리는 약해져서 쉽게 분리된다고 합니다.이 방법 외에 저 개인적으로는 위 방법을 약간 변용한 방법과 펜듈럼 측정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정확한 측정법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과 특정 대상에 대해서 함께 측정수치를 비교 해봐야 그 정확도를 알 수 있겠습니다.운동역학 반응은 의식레벨 200 이상의 사람들만 측정 가능하며, 질문이 온전할 때,즉 200 이상으로 측정 될 때만 올바른 반응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즉,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남을 해코지 하거나 개인의 사욕을 채우는 질문은 우주를 초월한 우리의 근본인 무한한 참나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합니다.200 이상으로 측정되는 것은 무엇이든 진실이고 건설적이고 온전하며 생명을 지지하는 것이고,200 이하는 무엇이든 거짓이며 부정적이며 사람에게 해로운 것이라 합니다.
따라서 200 은 진실과 거짓을 가르는 임계수준이라 합니다.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저서 <호모 스피리투스>에서 2003년 측정시 전 인류의 78%가 200 이하의 의식레벨이라고 합니다. 즉,인류의 22% 정도만이 운동역학 측정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방법으로 과거와 현재의 어떠한 사건이나 상태의 진실도와 의식레벨을 즉시 알 수 있으므로 인류가 이 방법을 사용하게 되면 더 이상 남을 속이거나 불순한 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영적인 가르침 또는 서적이나 영적 가르침을 펴는 가짜 스승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즉시 그 가르침이나 서적의 진실도와 가짜 스승의 의식레벨을 측정 가능하며 200 이하면 거짓,가짜 이고 최소한 600 이상의 레벨이 넘어가야 깨달은 사람이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영적수행법이 자신에게 맞는 방법인지도 확인 해볼 수 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어떤 정당, 정치집단이나 정치가의 의식레벨과 진실도를 측정할수 있으며, 200 이하 수준이면 절대로 뽑아주어서도 안되고 그런 자들이라면 내놓는 정책이란 것들도 대부분 200 이하의 국민들을 속이고 죽여가며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기 위한 술수라고 생각하면 맞을겁니다. 정책의 진실도도 얼마든지 측정해볼 수 있읍니다. 또한 이 방법을 사용하면 연구 프로젝트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는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 연구가 과연 효용성이 있는지 미리 예측해서 실시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호모 스피리투스>에 보면 깨달음과 관련된 의식의 상태와 레벨이 나와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와 신경계가 감당할 수 있는 의식레벨은 1000까지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존재로는 붓다, 예수,크 리슈나, 브라만이 있다고 합니다.575 성인의 지위 / 600 깨달음 / 650 '나는 있다 I Am ' / 680 존재로서의 참나 / 700 현인-드러난 신으로서의 참나 / 750 전부임으로서의 '나'<참나-신성(지복,영적 시각)> / 800 깨달음의 스승 / 840 존재,혹은 비존재를 넘어선 것으로서의 참나 / 850 로고스로서의 신(참나) / 985 화신Avatar / 1000+ 예수,붓다,크리슈나,브라만 / 1000+ 궁극적 실상의 '나' / 1250 창조의 본질로서의 '나' / 50,000+ 대천사 / 무한: 신성/창조자로서의 드러난 신 / 무한: 지고의 신격-드러나지 않은 신 현인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답니다.
"나는 온 우주가 태어나기 이전에 있는 그것이고, 온 우주가 사라진 뒤에도 그와 같이 머물 것이다. 절대(the Absolute)인 나는 영원(Timeless)하며 더 이상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도 않는다."
참고로 <호모 스피리투스>에 보면 우리 모두의 생존은 참나에 의해, 그리고 자신이 상속한 카르마에 의해 이미 결정되고 보장되어 있고 죽음의 때는 태어날 때 이미 정확히 정해져 있으므로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우주에는 어떤 '우연'도 가능하지 않다고 합니다.전에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 서적에서 마하리쉬가 한 말이 생각이 납니다. 더 큰 힘이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우습게도 자신이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이 떠오릅니다.그리고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너희는 무엇을 먹고 입을지 걱정하지 말아라'는 구절도 떠오르네요.^^참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아직 명확히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좀 더 깊이 명상해보고 나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호모 스피리투스>에 보면 인류의 지배적인 평균 의식레벨은 최근까지 190 이하였다가 아주 최근에 207로 뛰어 올랐는데 이는 획기적인 변화이며 지구상에 그리스도 의식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는 신호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이 바로 그리스도 의식이 지상을 뒤덮으리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호모 스피리투스> 한국어판 서문에서 현재 깨달음의 가능성은 과거 천년의 인간 진화에 비해 천배 이상 높은 것으로 측정되며 지금 인류의 의식수준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 사람들이 선두에 서게 되리라는 것을 안다고 한국어판 서문에 적어놨습니다. 다함께 열심히 명상하시고 수행하셔서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세상을 만들어 가보죠.^^*<호모 스피리투스>의 뒷편 부록에 있는 '의식수준의 측정'에 나오는 일부 내용을 올려 드립니다.
▶ 의식의 에너지 장은 차원이 무한하며 특정 수준들은 인간 의식과 관련을 갖는데, 그러한 수준들은 1에서 1000까지로 측정되며 이러한 에너지 장들이 인간 의식을 반영하고 지배한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특정한 주파수나 미세한 에너지 장을 방출하는데, 이는 의식의 장에 영구히 남으며 이렇게 해서 과거에 살았던 모든 사람 혹은 모든 생명과 그들에 관한 모든 것, 예컨데 일체의 사건, 사고, 행위, 감정, 태도 같은 것들은 영구적으로 기록되고 그것은 현재나 미래의 어느 때라도 되불러올 수 있다.
운동역학 반응(근육 테스트)은 특정 자극에 대해 '그렇다'거나 '아니다'로 나오는 단순한 반응이다. 건강 상태가 양호한 피험자가 옆으로 팔을 죽 뻗고, 시험자는 손가락 두개를 이용하여 피험자의 손목을 가볍게 내리누른다. 시험자는 피험자에게 '힘 주세요'라고 말하는데... 팔은 강해지거나(질문의 내용이 진실하거나 이로운 반응인 경우,즉 200 이상의 측정치인 경우) 약해질 것이다(질문의 내용이 거짓이거나 해로운 반응인 경우,즉 200 이하의 측정치인 경우). 반응의 지속시간은 대단히 짧다. 그런 다음 신체는 신속히 회복되어 정상적인 근육 강도로 돌아간다.
질문(서술문의 형태)을 하기 전에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다.(내면의 참나에게) 즉,"나는 마음속에 있는 것에 대해 질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그렇다/아니다) 가능하면 조용한 환경이 좋고, 배경음악이 없어야 한다. 피험자는 눈을 감는다. 시험자는 서술문의 형태로 '질문'을 말해야 한다. 그래야 운동역학 반응에 의해 그 서술문에 대해 '예'나 '아니오'의 대답이 나올 수있다. 예를 들면 "이것은 건강한 말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부정확하며 그대신 "이 말은 건강합니다." 라던가 혹은 "이 말은 병들었습니다."와 같은 진술로 고쳐 말해야 한다.
진술한 뒤에,시험자는 바닥과 평행하게 팔을 뻗고 있는 피험자에게 "힘 주세요"라고 말한다.그런 다음 두 손가락으로 약간 힘을 주어 뻗은 팔의 손목을 재빨리 누른다.
피험자의 팔은 계속 강한 상태를 유지하거나('예'를 의미),아니면 약해지게('아니오'를 의미) 될 것이다.
반응은 대단히 짧고 신속하게 일어난다.운동역학 테스트는 미래를 예언하는 일에는 쓰일 수 없으면 질문이 온전하지 못하거나 이기적인 경우에는 허락이 거부될 수도 있다.(실험 전에 그 질문을 물어도 되는지 먼저 참나에 허락을 구할것)
측정시는 특정한 기준을 먼저 언급하고 실험한다.(일반적으로 우리는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수치레벨을 이용하게 될 것이지만 다른 기준이 있을 경우는 그 기준을 먼저 명확히 제시하고 실험하라는 뜻인것 같음)진술은 아주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어떤 직업이 자신에게 '좋다'는 식의 일반적 용어 사용은 피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 좋다는 건가? 급여수준이? 근무조건이? 승진기회가? 상사의 공정성이?
인구의 약 10%는 운동역학 테스트를 이용할 수 없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기氣 에너지의 불균형" 외에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테스트는 피험자와 시험자의 의식레벨이 모두 200 이상으로 측정되고 질문의 의도 또한 온전할 때에만 정확하다.
세계 인구에서 불과 22%만이 200 이나 그 이상으로 측정되는 까닭에 운동역학 테스트는 인구의 약 20% 정도에게만 적당하다.때로 적절한 피험자가 모순된 반응을 일으킬 때가 있다. 이런 상태는 대개 존 다이아먼드 박사가 발견한 '흉선치기'의 방법으로 해소할 수 있다.(주먹을 쥐고 흉골 상부를 세 번 치고 웃는다. 그리고 주먹으로 칠 때마다 "하하하"하고 말하며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 존경하는 인물<예를 들면 영적인 스승들>을 마음속에 떠올린다.)이렇게 하면 일시적인 불균형은 해소될 것이다. 그것은 최근에 부정적인 사람들, 예를 들면 헤비메탈 음악을 듣거나, 폭력적인 TV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것이 원인일 수 있다.
부정적인 음악 에너지는 음악을 끈 뒤에도 30분까지 인체 에너지 체계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텔레비젼 광고나 배경음악 또한 부정적 에너지의 일반적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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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혁명 -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 / 한문화 *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 -
인간 정신의 진화에 관한 전문가이자 명강의로서 널리 알려진 그는 1952년부터 정신요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미국 정신치료협회의 종신회원으로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다수의 과학 논문과 강연 테이프를 발표했으며, 1973년에는 <음식을 통한 정신 치료>를 노벨상 수상자인 라이너스 폴링과 공동 저작하여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여 년에 걸친 연구와 수천 명의 대상으로 한 실험의 열매인 이 책은. "표면의식에서는 모른다고 생각되는 것도 인간의 깊은 잠재의식에서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음"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그동안 잠자고 있었던 내면의 신성이 활성화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해 준다.
* 이 책에 반영된 연구 결과는 다이아몬드 박사의 테크닉에서 몇 단계 더 진전된 것이다.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생명을 더욱 생명답게 하는 것과 생명을 낭비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진실과 거짓까지도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 구비되어 있음이 밝혀졌다고 할 수 있다.
시험 자체는 단순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고, 너무나도 간단하다. 근육의 강한(양성) 반응은 객관적으로 진실일 때 나타나고, 약한(음성) 반응은 피험자가 거짓말을 들을 때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은 피험자가 주어진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견이나 지식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으며, 모집단의 문화적인 차이나 시간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이 시험은 과학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며, 어느 누가 실시해도 충분한 정당성이 있다고 믿는다.
이 기술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떠한 주제이든 그 거짓됨과 진실성을 온전하게 분별할 수 있는 객관성을 제공해 준다. * 인간 개개인의 마음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연결된 컴퓨터 터미널과도 같다.
이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는 인류의 의식 세계 자체이고, 우리 자신의 의식은 단지 모든 인류의 공통된 의식에 뿌리를 둔 데이터베이스의 개인적인 표현일 뿐이다. * 한 사회가 나아갈 길은 대부분 편의주의, 부정확한 통계, 감상주의, 정치와 언론의 압력, 개인의 편견과 기득권 등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
모든 사람들의 삶을 위한 중요한 결정은 항상 실패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이미 안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져 왔다.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어 나갈 뚜렷한 기준이 없으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힘에만 거듭거듭 의존함으로써 (법률, 조세, 전쟁, 법칙, 규칙과 같은 것) 비싼 대가를 치러 왔다.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력을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인간에게 주어진 감정과 이성의 능력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은, 개인이나 집단의 치열한 생존 경쟁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들은 이성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하곤 하지만, 사실은 초보적인 인식의 패턴을 작용시켰을 뿐일 때가 대부분이다. 자료를 논리적으로 배열하는 것은 인식의 패턴 체계를 강화시키는 데에 불과한데도, 그것이 곧 '진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진실'이란 상황의 진실 이외에는 존재할 수 없으며, 어느 특별한 관점의 견지에서 볼 때만 진실일 뿐이다. 진실이란 본질적으로 말해질 수 없는 무엇이다.
*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우리들 연구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 중 하나인 의식의 에너지 장이라는 지도책을 그리는 일은, 다른 학자들이 탐색해 온 모든 길들과 상호 관련됨은 물론 그들에 의해 인증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경험의 다양한 표현들이 전체를 포용하는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서 통합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그러한 통찰력에 의해서만 주체와 객체라는 인위적인 이원성을 우회할 수 있으며, 이원성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는 제한된 관점을 뛰어넘을 수 있다. 주체와 객체란 사실은, 하나인 것이며 같은 것이다. 주체와 객체를 동일시함으로써 우리는 시간 개념의 속박성을 초월할 수 있다.
시간의 제약이야말로 삶을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 커다란 장애가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 기억할 수 없는 먼 옛적부터 우리는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인간 행동에서 어떤 일관성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그런 노력은 수많은 학설을 낳은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이해하려는' 노력이란 선형적인 것, 다시 말하자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인생의 과정을 보면 유기체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비선형적이다. 이러한 모순이야말로 인간이 지적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원인인 것이다. * 우리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의식의 무한한 차원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의식 안에는, 타고난 '인간성'을 행동을 통해 발휘하도록 해주는 엄청나게 강력한 끌개 장이 존재한다.
그 거대한 끌개 장 안에는 상대적으로 연약한 에너지와 힘의 장도 존재한다. 이러한 에너지 장이 번갈아 가며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며, 그리하여 인간 역사를 관통하여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도 정의될 수 있는 패턴들이 일관성을 띠고 나타나게 된다. 끌개 장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다양한 상호 작용이 인류의 역사와 문명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연구는 노벨상 수상자인 존 에클리스 경이 도달한 결론과도 일치한다.
에클리스 경은 뇌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일련의 에너지 패턴을 받아들이는 수신기에 지나지 않고, 이 에너지 패턴은 의식이 생각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처럼 존재한다고 말한 바 있다. 생각이 '나의 것' 이라고 믿는 것은 에고의 헛된 수작에 불과하다. 비범한 천재들은 자신의 월등한 앎의 원천을, 많은 사람들이 '신성' 이라고 불렀던 모든 의식의 기저에 있는 그 무엇으로 돌리곤 한다.
* 우리 연구의 목적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의식의 에너지장에 관한 실제적인 지도를 그려내는 데에 있다. 독자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에너지 장의 수치 등은 대강의 숫자로 나타냈다. 밑에 나오는 '의식의 지도'에서 측정된 수치는 감정이나 인식, 태도, 세계관. 영적 믿음 등을 통해 나타나는 특정한 의식 세계와 서로 상응한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이 도표는 인간 행동의 전 영역을 포함하는 더 광범위한 것으로 확장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의식 세계를 수치화하는 데 있어서 '용기'의 수준인 200이 일종의 분기점이라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어떠한 생각이나 태도나 느낌이든 그 수치가 200 이하로 나타났다면, 그것은 근육반응이 약하게 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수치가 200 이상으로 나타났다면 그 생각이나 느낌, 태도, 사물, 혹은 역사적 인물들은 피험자의 근육 반응을 강하게 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 200이라는 수치야말로 끌개가 강하냐 약하냐, 영향력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의 분기점인 것이다.
의식의 지도 수치
신의 관점 세속의 관점 수준 감정 과정 700 자아 존재 깨달음 언어이전 순수의식 600 항상 존재하는 완전한 평화 축복 자각 540 하나 전부 갖춘, 기쁨 고요함 거룩함 500 사랑 자비로운 사랑 존경 계시 400 현명한 의미 있는, 이성 이해 추상 350 인정 많은, 화목한 포용 용서 초월 310 감화 주는, 희망에 찬, 자발성 낙관 의향 250 능력이 있는, 만족한 중용 신뢰 해방 200 용납하는 가능한 용기 긍정 힘을 주는 175 무관심한 요구가 많은, 자존심 경멸 과장 150 복수에 찬 적대의 분노 미움 공격 125 부정하는 실망하는 욕망 갈망 구속 100 징벌의 무서운 두려운 근심 물러남 75 경멸의 비극의 슬픔 후회 낙담 50 비난하는 절망의 무기력 절망 포기 30 원한을 품음 사악한 죄의식 비난 파괴 20 멸시하는 비참한 수치심 굴욕 제거 200 이하의 수준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삶의 태도는 '살아남기' 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은 가난과 결핍에서 비롯되는 절망과 우울의 영역이다. 그보다 높은 '분노'와 '욕망'의 단계에 이르면, 개인은 생존을 위해 자기 본위의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자존심'의 수준에 이르면, 살아남으려는 본능이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최초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긍정과 부정의 갈림길이 되는 '용기'의 수준에 이르면, 다른 사람들의 안녕이 점차 중요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500의 수치에 이르면,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고려하게 되어, 그것이 그 사람을 움직이는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600대에 가까워지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눈뜸에 관심을 갖게 되고, 600대에 이르면 인간의 선과 깨달음을 위한 추구가 삶의 기본적인 목표가 된다.
700에서 1000까지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한 삶이다. 앞의 도표를 봄으로써 우리는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지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겉보기에는 가치가 없어 보이는 태도들도 검증해 보면, 딱히 좋다거나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도덕적인 판단이란 수준이 높아진 상태에서만이 뒤를 돌아다보면서 할 수 있는 기능인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슬픔'에 차 있는 사람(에너지 레벨 75)은 '분노'의 수준(150)에 올라감으로써 휠씬 진전된 상태에 도달한다.
분노 자체는 파괴적인 감정이고 낮은 수준의 의식 상태이지만, 사회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개인뿐만 아니라 소문화권도 질식시킬 수 있는 '무기력' 상태보다는 더 활기찬 에너지라 할 수 있다.
절망에 찬 사람들이 절망을 벗어나서 어떤 것을 원할 수만 있다면('욕망'125), 그런 후 다시 '분노'(150)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자존심'(175)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면, 200의 수치로 측정되는 '용기'의 단계까지도 충분히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용기'의 수준은 개인이나 집단적인 상태의 개선을 비로소 생각하게 되는 분기점이다. 반면에, 조건 없는 '사랑'의 상태에 이르러 사랑이 주는 것이 생활화된 사람에게는 그 이하의 수준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의식 향상을 위해 나아감에 따라 우리의 생각은 향상의 방향으로 저절로 계속되고, 또 저절로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어, 결국은 자아 향상이 우리의 생활 자체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자기 연민이나 편협성 같은 부정적인 태도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조自助 그룹의 회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의식의 지도'에서 하위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 연민이나 편협성 등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 그들의 생각을 정당한 것으로 믿고 수호한다.
* 이 도표가 가져다주는 인식론적인 효과는 미묘하긴 하지만 광범위하다. 스포츠, 의학, 심리학, 정신의학, 인간관계와 행복에 대한 일반적인 탐구에 이르기까지 실용적으로 쓰여질 수 있다. 의식의 지도를 숙고하여 들여다봄으로써 인과관계에 대한 새로운 자각도 싹틀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의식 수준과 더불어 의식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인지 능력도 향상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사실은 '결과물' 이라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자기 자신이 인식한 결과물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됨으로써 그 사람은 비로소 피해자의 입장을 초월하여 '나를 지배하는 외부의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이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지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지, 배움의 기회로 작용할 것인지 우리를 억압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태도인 것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란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에 저항하거나 도피하고자 함으로써 스스로를 그물에 가두는 데서 생겨나는 것일 뿐,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 자체에 어떤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혈압을 올리는 시끄러운 음악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혼도 원하지 않을 때에는 큰 아픔이 되지만, 원하는 사람에게는 해방을 뜻한다.
* 우선 측정 숫자가 산수의 값이 아닌 대수의 값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수준 300은 150의 두 배가 아니라, 300의 10승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주 작은 수치가 증가하더라도 그 잠재력은 굉장한 진보를 이룩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수치의 증가에 따른 잠재력의 증가 비율은 엄청난 것이다. * 에너지 수준 20 : 수치심 수치심의 수준은 위험할 정도로 죽음과 가까운 상태로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지만 자살을 할 수도 없으니 마지못해 살아간다는 식의 자세이다.
이 수준의 공통점은 죽음이라는 것을 피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체면을 잃었을 때'의 아픔이나, 모욕을 당하거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을 때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수치심'의 단계에서는, 자기 자신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슬그머니 도망친다. 원시 사회에서는 수치스런 죄를 저지른 자를 추방했으며, 추방이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성폭행과 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은 '수치심'을 초래하므로 이를 치유하지 않으면 그 피해가 평생 계속된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수치심은 신경증을 초래한다. 또한 정서적-심리적 건강에 파괴적으로 작용하여 열등감에 사로잡혀 지내게 되며, 이로 인해 신체적 질병으로까지 발전하기 쉽다. '수치심'이 성격의 바탕이 되면 수줍음을 잘 타고 내성적이며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수치심'은 잔인성의 도구로 쓰이며, 여기에 희생된 피해자는 자기 자신들 또한 잔인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수치심'에 찬 어린이들은 동물을 학대하고, 자기들끼리도 잔인하게 굴곤 한다.
의식 수준이 단지 20대에 머무는 사람들의 행동은 아주 위험하다.
그들은 비판적이거나 피해망상적인 환상을 보기 쉽고, 정신병 환자가 되거나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쉽다.
'수치심'이 바탕이 되는 성격의 사람들은 융통성 없는 완벽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수치심을 보상하려고 하며, 무엇에 사로잡힌 것같이 자기 자신을 몰아간다. 수치심에 사로잡힌 과격한 도덕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무의식적인 수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영하여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자신들을 정당화시킨다.
* 에너지 수준 30 : 죄의식 처벌과 농간의 수단으로 우리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죄의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자기 연민이나 자기 학대, 피해의식에서 생기는 여러 증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무의식적인 죄의식은 정신 이상에 원인이 있는 신체의 질병을 초래하고, 사고를 저지르기 쉽고, 자살을 감행하기도 한다.
전 생애를 바쳐서 죄의식과 싸우는 사람들도 많고, 죄의식을 전면 부인함으로써 필사적인 도피를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역시 죄의식의 소산이다. '죄의식'에 가득 찬 사람들은 종교단체의 선동자들에 의해 강요당하고 조종당하기 쉽다. '죄와 구원'을 파는 파렴치한들은 응징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죄의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덮어씌우는 경향이 짙다.
자학 증상이 심해지면 공공연한 동물 학살로 잔인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죄의식은 분노를 일으키고, 살상은 이러한 분노의 표현이 된다. 사형이란, 죽이는 행위가 죄의식에 물든 사람들을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에 지나지 않다. 용서에 인색한 미국 사회는 그 죄인들을 언론으로 실컷 두들긴 후 형벌을 결정한다.
하지만 형벌 때문에 범죄가 억제되었다는 사례는 지금껏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 에너지 수준 50 : 무기력 이 수준은 빈곤, 절망, 자포자기로 특징지어진다. 현재와 미래가 황폐해 보이고, 비애가 인생의 주제로 보인다. 이 단계는 아무 희망이 없는 상태로서, 여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도움이 필요하나 그 도움조차도 그들에게는 쓸모없게 느껴질 뿐이다. 보살펴주는 사람에 의해 외부의 에너지가 조달되지 않는 한, 무기력에 의한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살려는 의욕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자극에 무감각하며, 시선은 더 이상 사물을 좇지 않고, 주어진 음식을 삼킬만한 에너지가 없는 상태에 이른다. 집도 없이 헤매는 사람들과 사회의 낙오자가 이 수준에 속한다.
나이 든 노인들의 체념 상태이기도 하고, 또 만성 질병이나 심한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의 수준이기도 하다.
무기력한 사람들은 의지해야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무거운 짐처럼 느끼기가 쉽다. 사회에서는 자원의 낭비로 보이는 이 수준의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만한 동기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조차 갖기 힘든 희망의 포기 상태이다.
* 에너지 수준 75 : 슬픔 이 상태는 슬픔, 상실, 낙담의 수준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경험을 하지만 이 수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되는 후회와 우울함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비탄, 공허, 그리고 과거에 대한 후회가 이 수준을 지배한다. 어렸을 때의 커다란 상실은 슬픔과 비탄을 삶의 필요악인 것처럼 받아들이기 쉽게 만든다. 비탄에 빠진 사람들은 만사를 슬픔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린이들이 자라는 것도 슬프고, 세상만사 돌아가는 것도 슬프고, 삶 자체가 슬프다. 바라보는 모든 것이 슬픔으로 채색된다. 잃은 것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으며 그 기억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다는 생각이야말로 상실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폐해이다.
그들은 하나를 잃어버렸으면서도 전부를 잃어버린 양 일반화시키고,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사랑 자체의 상실이 된다. 그러한 감정적인 상실은 심각한 우울증이나 죽음을 불러오기도 한다. '슬픔'은 인생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지만 '무기력'의 상태보다는 더 많은 에너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충격받은 무기력증 환자가 울기 시작하면 그것은 회복의 조짐이다. 또 일단 울기 시작하면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음식을 먹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 에너지 수준 100 : 두려움 100의 수준에는 좀더 활발한 에너지가 보인다.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건강한 반응인 것이다.
세상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런 두려움이 인간을 활동하게 하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적에 대한 두려움,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거절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사회적인 다수의 두려움은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동기가 된다. 두려움의 확산은 인간의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세상이 온통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두려움은 강박관념이 되어 여러 가지 형태로 번져간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는 데 대한 두려움은 질투를 유발하고, 만성 스트레스를 초래한다.
두려움은 편집증이나 신경증적인 상태로 진전될 수 있고, 전염성이 있어서 사회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다.
두려움은 개인의 성장을 제한하고 억압 상태를 초래한다. 두려움의 수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뚫고 일어설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거기에 짓눌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그보다 높은 수준으로 갈 수 없다.
그러므로 두려움의 수준에 사는 사람들은 이를 극복한 것으로 보이는 강력한 지도자를 희망하며, 그 그림자가 자신들을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기대한다.
* 에너지 수준 125 : 욕망 욕망의 수준에는 더 많은 에너지가 발견된다.
경제적인 욕구를 위시한 욕망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광범위한 동기로서 작용한다. 광고업자들은 본능적인 욕망을 이용하여 육감적인 유혹을 한다. 목표 달성과 보상을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욕망은 우리를 다그친다.
금전, 명예, 권력에 대한 욕망은 '두려움'의 수준을 벗어난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욕망은 또한 집착의 수준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때로는 욕망이 인생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 동기가 어디에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끊임없이 요구를 함으로써 사랑과 관심을 오히려 잃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성적인 매혹에 대한 욕구는 화장과 패션 산업의 번영을 불러왔다. 욕망이란 축적이나 탐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욕망이란 언제나 계속되는 에너지 장이기 때문에 만족이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를 채우고 나면 다른 무엇인가를 또 채우고 싶어진다. 백만장자들은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욕망의 수준이 무기력이나 슬픔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인 것은 분명하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원하는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사람은 성취로 가는 출발선 위에 설 수 있다.
* 에너지 수준 150 : 분노 분노는 살인이나 전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에너지 수준 자체는 죽음의 주위에서 맴도는 단계에서 훨씬 벗어난 상태이다. 분노는 파괴적일 수도 있고 건설적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무기력이나 슬픔에서 벗어나 두려움을 극복하는 상태에 이르면, 이제 그들은 무엇인가를 원하기 시작한다. 욕망은 좌절감을 초래하고 좌절감은 분노를 가져온다. 그런 이유로, 분노는 억압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 사회에 대한 희생은 분노를 유발하고, 그것이 사회 구조에 대변혁을 가져온 커다란 사회 운동으로 발전된 경우가 적지 않다. 분노는 좌절된 욕구에서 생기므로 그 아래 수준인 욕망의 에너지 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좌절은 지나친 욕망에서 온다. 분노는 증오로 전환되기 쉽고, 증오는 한 개인의 삶을 부식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 에너지 수준 175 : 자존심 175로 측정되는 자존심은 미국 해병대를 통솔할 만한 충분한 에너지 수준이다. 이것이 미국 국민이 대부분 동경하는 수준이다. 이 수준에 이른 사람들은 낮은 에너지 장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긍정적이다. 자존심의 향상은 낮은 의식세계에서 그들이 경험한 모든 고통의 진통제가 되어 준다.
자존심은 삶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는 버팀목 구실을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자존심의 팽만은 추락하기 일보직전'이라는 점이다. 자존심이 방어적이고 약점 투성이인 것은, 자존심이란 외부 조건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이며 또 그것 없이는 언제라도 낮은 수준의 의식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부풀어 오른 자존심은 비난에 약하다.
자존심은 아주 쉽게 수치심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여전히 약한 의식 수준이다. 자존심은 분열과 파벌주의를 초래하며, 그래서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람들은 자존심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치루어 왔으며, 군대는 지금도 애국심이라는 자존심 아래 서로를 죽이는 짓을 멈추지 않고 있다. 종교 전쟁, 정치적인 테러리즘, 중동과 중세 유렵의 광적이고 무서운 역사는 자존심의 대가이고, 사회 전체가 치루어야 했던 벌이었다. 자존심의 약점은 오만과 부정이다. 이러한 특성상 자존심에 가득 찬 사람들은 의식의 성장을 스스로 차단한다. 자존심이 있는 한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존심에 가득 찬 사람들은 감정적인 문제임에도 그것을 부인하거나, 자신의 성품이 갖고 있는 약점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정하는 문제의 근원에는 자존심이 자리 잡고 있다. 자존심은 진실한 성장과 명예를 안겨 줄 수 있는 참된 내면의 힘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인 것이다.
* 에너지 수준 200 : 용기 200의 수준에서는 내면의 참된 잠재력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수준에서 비로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갖기 시작하며, 이 단계야말로 탐구, 성취, 인내, 결단의 영역이다.
용기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인생이 흥미롭고, 도전적이고, 자극적인 것이 된다. 용기는 우리에게 기꺼이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게 도와주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긍정적으로 전환시켜 준다. 이 수준에 이르러 우리는 비로소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기회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이 수준에 이르면 두려움이나 성격의 결함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두려움이나 결점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수 있으며, 걱정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낮은 의식 수준에서와는 달리 노력 자체를 마비시키지는 않는다. 200 이하의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마는 장애물을 만난다 할지라도 잠재력을 갖기 시작한 이 수준의 사람들은 이를 자극제로서 활용한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자기가 흡수하여 소모하는 에너지만큼 세상에 그 에너지를 되돌려 보낸다. 반면, 낮은 수준의 사람들은 사회로 환원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여 에너지를 흡수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성취함으로써 또 다른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힘을 얻고, 더욱 더 용기백배하게 된다.
바로 이 수준에서 비로소 생산성이 생기기 시작한다. * 에너지 수준 250 : 중용 이 수준이 매우 긍정적인 에너지인 것은, 낮은 수준의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편파적인 관점으로부터 해방을 뜻하기 때문이다. 250이하의 수준에서는 사물을 이원적이고 융통성 없는 관점으로 바라보며, 이 때문에 흑과 백을 분명히 가를 수 없는 복잡다단한 세상사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편파적인 태도는 극단적인 대립을 초래하고, 대립은 분열과 반대를 낳는다.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반대와 장애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중용의 태도는 유연성과 포용력,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파악 능력을 갖게 해준다. 중용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결과를 비교적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패배하거나 좌절하거나 놀라는 일도 없게 된다. 중용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끼고,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자기 신뢰를 잃지 않는다. 함께 지내기가 쉽고, 친하게 지내더라도 전혀 위험하지 않다.
그들은 대립이나 경쟁심리, 죄책감 등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화하고 근본적으로 정서가 안정되어 있다.
그들의 태도는 비난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다는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중용에 다다른 사람들은 자유를 아주 중시하므로, 그들을 규제하려는 일은 아주 어렵다.
* 에너지 수준 310 : 자발성 이 수준의 사람들은 성장이 빠르고, 마치 향상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보인다. '자발성'이란 인생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저항을 극복하고 기꺼이 참여하는 마음이다.
200 이하의 사람들은 마음이 답답하게 닫혀 있지만, 310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은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이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실직을 해도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고, 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들은 밑바닥 일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내면의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배움에 장벽을 두지 않는다. 곤경으로부터의 회복 능력, 시련을 통한 배움을 통해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수준으로 향상한다.
그들은 자존심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결점을 기꺼이 바라보려고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배우려고 한다. 이들은 아주 중요한 학생들이며 또 쉽게 가르칠 수 있어서, 사회의 중요한 자원이 된다.
* 에너지 수준 350 : 포용 이 수준에 이르면 우리 자신이 인생의 모든 경험을 창조하고 원천이 된다는 이해를 하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책임감이야말로 이 단계의 특징으로, 인생의 여러 외적인 힘에 대응하면서도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200 이하의 사람들은 무기력하며, 자신들을 인생이란 폭군의 피해자로 바라보기 쉽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행복이나 문제의 근원이 '밖'에 있다고 믿는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 수준에 이르면 행복의 근원이 자신 속에 존재한다고 깨달음으로써 커다란 도약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외부'의 그 어떤 것도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 또 사랑이란 다른 사람들에게서 오거나 그들에 의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포용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옳고 그름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문제 해결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정열을 쏟는다. 어려운 과제나 일을 만나더라도 괴로워하거나 곤혹스러워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눈앞의 목표보다는 장기적인 목표가 항상 중요하고 자기 훈련과 일의 숙달이 무엇보다 우위에 있다. 포용의 수준에 이르면 대립되는 의견이나 갈등에도 극단주의를 택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고 보고, 평등의 가치를 중요시한다. 저급한 수준의 사람들이 융통성 없이 경직된 사고에 사로잡히기 쉬운 반면, 이 수준의 사람들은 문제 해결 과정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형태의 대답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으로써 차별과 편협을 초월한다. 평등이란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에 눈뜸으로써, 거부하기보다는 포용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 에너지 수준 400 : 이성 이 수준에 이르면 이보다 하위 수준의 감정 단계를 벗어남으로써 지성과 이성이 삶의 전면에 떠오르게 된다. 이성의 단계에서는 광범위하고 복잡한 자료들을 처리할 능력을 갖고 있어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을 보여준다.
관계의 미묘함, 점진적인 변화와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 것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지고 추상적인 개념과 상징 체계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과학, 의학, 그리고 개념화에 대한 이해 수준이 점차 증가되는 것도 이 수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교육과 지식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추구되고 한다.
이해와 정보가 성취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점이, 400 수준의 가장 뚜렷한 특성이다.
이 수준의 결점은 상징과 그 상징이 뜻하는 바를 뚜렷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또 세상사에 대한 객관적-주관적인 이원론 때문에 사물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 수준에서는 나무에 가려 숲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쉽고, 개념과 이론의 탐닉에 의해 본질의 중요성을 찾지 못하고 지식 자체로 그치고 마는 경우가 흔하다. 이성의 수준은 본질이나 복잡한 문제의 핵심에 대한 통찰력을 갖지 못함으로써 한계를 갖게 된다. 이성만으로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성은 광범위한 지식과 문헌을 생산해 내지만, 방대한 자료와 결론 사이의 모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모든 철학 이론은 저마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이지적인 방법론이 지배하는 현 사회에서 이성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더 높은 의식세계로 나아가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수준을 초월한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 에너지 수준 500 : 사랑 언론이나 방송에서 묘사하는 사랑은 여기서 말하는 수준의 사랑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란 육체적 매력, 소유욕, 통제, 탐닉, 에로티시즘, 신선함 등의 격렬한 감정과 결합된 형태를 띤다. 그러한 사랑은 속절없이 무너지기 쉽고, 주어진 조건에 따라 파도치곤 한다.
사랑에 좌절하게 되면 그동안 숨겨졌던 노여움과 의존성이 발가벗겨져서 그 정체를 드러낸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같이 되어 있지만, 이러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지독한 감상주의의 소산인 것이다. 자존심에서 비롯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그런 관계 속에서는 사랑이 머무르지 않는다. 500의 에너지 수준은 조건 없고 변함없고 영원한 사랑에의 눈뜸으로 특정 지을 수 있다. 사랑이란 외부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내부에서 그 근원을 찾기에 이 수준에서의 사랑은 오르내림의 파동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것이 존재 자체가 된다. 사랑은 용서와 보살핌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사랑은 지적인 것도 아니고, 표면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고양시켜 주고, 그 동기의 순수성으로 인해 크나큰 성취감을 주기도 한다. 이 수준에 이르면 사물의 본질을 분별할 수 있는 역량이 증대하여 문제의 핵심을 꿰뚫을 수 있게 된다.
이성의 수준을 넘어서게 됨에 따라 문제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전후과정을 섬세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성은 문제를 일일이 따지는 경향이 있지만, 사랑은 전체를 다룬다. 직감 또는 육감이라고 불리는 이 사랑의 능력은, 사물을 꼬치꼬치 따지지 않아도 즉각 알아차릴 수 있게 한다.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일어나는 현상 자체는 아주 구체적이다. 사랑의 느낌을 가지면 뇌에서는 엔돌핀이 분비된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사랑은 신분이나 입장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가진다. 사랑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있을 수 없기에 '너와 나의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자아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켜 준다.
사랑은 삶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하여 삶을 힘차게 긍정하게 한다. 사랑은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공격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여 그것을 녹여 없앤다. 이 수준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단계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열심히 사랑이라는 주제에 매혹당하고 있고 현존하는 모든 종교가 500 혹은 그 이상의 수치로 측정됨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0.4% 만이 이러한 수준의 의식에 도달한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 에너지 수준 540 : 기쁨 사랑에 조건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내면의 기쁨이 점차 차오르게 된다.
이 수준에서의 기쁨이란 사건의 변화에 의해서 오는 갑작스런 즐거움이 아니라, 모든 활동에 동반되는 항구적인 것이다.
기쁨이란 외부의 어딘가에 근원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매순간마다 솟구치는 것이다. 540의 수준에서는 치유가
시작되며, 영적인 자조그룹이 이 수준에 속한다. 540 이상부터는 성인, 영적 치유자, 그리고 그 제자들의 영역이다.
이 에너지 장의 특징은 계속되는 역경 속에서도 인내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수준의 특징은
이들이 갖는 자비의 마음 상태이다. 이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들에게는 사랑과 평화를 널리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수준에 이르면 창조의 정교한 아름다움과 완전함에 눈뜨게 된다. 세상 만물은 억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랑과 신성의 표현이다. 이 세상 모든 개개인은 신의 뜻에 따라 생명을
부여받았고, 신성 안으로 녹아들어갈 것이다.
이들은 우리들이 기대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에너지 장의 잠재력이 발현된 것이지, 어느 한 개인의 힘은 결코 아니다.
* 에너지 수준 600 : 평화 이 에너지 장은 초월이나 자아실현, 신 의식 등의 용어로 묘사되는 경험과 깊이 관련된다.
이 수준은 천만 명 중 한 명꼴로 나타나는 아주 드문 현상이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주관과 객관의 차이가,
또 특별한 관점이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복의 상태에 잠겨 있으므로 세상일에 더 이상 흥미를 갖지 않는다. 기존 종교의 형식을 초월한 이 수준의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순수한 영성의 소유자들이다. 600이나 그 이상의 수준에서는 아무것도
멈춰 있지 않는데도, 아니 오히려 발랄하고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는 세상인데도, 세상 전체가 시간과 공간이 멈춰
서 있는 가운데 마치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
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데도 불구, 그들은 이 세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무한한 가능성과 의미로 가득 찬 진화의 춤을 추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놀라운 계시는 이성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의 마음은 그 무엇도 개념화시키는 일이 없이 절대의 침묵에 잠겨 있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구분이 사라지고, 바라보는 사람이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가 풍경과 하나가 된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지금 여기 계시는' 분에 의해 연결되어 있고, 그분의 힘은 무한하고, 끝없이 온화하고, 그
러면서도 바위처럼 견고하다. 600-700의 수치로 측정되는 위대한 미술, 음악, 건축 작품 들은 잠깐 동안이나마
우리들의 의식을 더 높은 세계로 고양시켜 주며, 시간을 뛰어넘어 영감을 불어넣는 원천이 되어 준다.
* 에너지 수준 700-1000 : 깨달음 이 수준은 영적 완성자의 단계로서, 수많은 세대를 통하여 군중들이 추종하고 따르며
영성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 사람들은 신성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이들 자체가 신성과 동일화되기도 한다. 심오한 가르침은 사람들의 정신을 앙양하고 인간성의 자각에 눈뜨도록 부추긴다.
이러한 비전을 갖는 것은 '은총'이라 불리며, 이 은총에 의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의 단계에서는 시간과 개별성을 뛰어넘게 된다. 육신인 '나'에 대한 관념이 없어져서, 운명이라는 것에도
연연해하지 않는다. 육신이란 마음의 창문을 통한 의식의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의사소통에 필요한 것일 뿐이다.
자아는 보다 큰 '진아'에로 녹아간다. 이 단계는 이원성을 뛰어넘는, 완전한 '하나'의 수준이다. 의식의 분화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며, 항상 깨어있는 의식으로 살아간다. 역사에 기록된 인간으로서는 가장 높은 수준으로서, 주(lord)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주 크리슈나, 주 부처,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들이다.
카페명이 진실을 찾아서에서 2011년 12월 17일로 진리로(싸이트:http://www.way2truth.org/)로 변경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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