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이 만드는 세상은 가짜다
信念이 만드는 世上은 가짜다
사람은 처음 태어나면서부터
數많은 經驗을 하게 된다.
처음 태어났을 때 마주치는 經驗은 온전하다.
아무런 是非 分別도 없고,
다만 經驗 그 自體로써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은 天眞無垢하다.
칼을 들이 대더라도 울지 않고,
불을 보더라도 뛰어 들곤 한다.
그들에게 있어 모든 經驗은
다만 經驗 그 自體일 뿐
좋고 싫은 것도 아니고, 옳고 그른 것도 아니다.
아무런 分別 없이 다만 經驗할 뿐이다.
다만 느끼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天眞佛 어린 아이도 조금씩 經驗에다
是非와 分別을 붙이게 된다.
是非와 分別은 곧 信念을 만들어 낸다.
經驗을 通해 信念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어떤 한 가지 經驗을 했으면
그 經驗을 通해 한 가지 信念을 쌓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信念은
또다른 經驗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經驗은 또다시
그 信念을 뒷받침해주고 證明해 주게 된다.
그럴수록 그 信念은 보다 確固해지고
信念이 確固해질수록
그 信念에 점점 더 執着하고 固執하게 된다.
이윽고 그 信念이 ‘옳다’고 確定짓는다.
그럼으로써 信念과 價値觀, 固定觀念이 늘어간다.
그것이 늘어갈수록 혹자는 그것을 知識이라고도 하고,
價値體系라고도 함으로써 그것이 올바른 것인 양 錯覺하게 만든다.
점점 더 우리의 信念은 깊어간다.
그러다가 내 信念과 衝突되는 다른 사람의 또 다른 信念을 만났을 때
相對의 信念은 ‘잘못된 것’이 되고
나의 信念이 ‘옳은 것’이 되다 보니
나의 信念을 相對에게 注入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러면서 다툼도 일어나고
좌절도 일어나고
모든 괴로움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어떤 한 가지 信念에 대해
보다 確固한 經驗을 返復的으로 많이 했을 수록
그 信念은 더욱 깊어져
自己 안에서 眞理처럼 받아들여진다.
깊이 믿으면 믿을 수록
그 信念으로 인해 相對와 부딛칠 일이 많아진다.
그러더라도 自身은 옳고 相對는 그르기 때문에
쉽게 信念을 포기하지 못한다.
내가 옳고, 내가 眞理이며, 내가 正當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眞理라도
固執하고 執着하면 그것은 더 以上 眞理가 아니다.
眞理는 유연하며 그 어떤 것에도 執着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에서도
부처님 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하물며 법 아닌 것에 집착하겠는가 하는 말이 나온다.
다시말해 信念으로 因해 만들어진 經驗은 참이 아니다.
그것은 眞理가 아니다.
그것은 억지스럽고 作意的이며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참이 아닌 것에 執着할 필요가 무엇인가.
自身 안에 强한 信念이 자리하고 있다보면
그 信念이 모든 經驗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經驗은 참이 아니라는 말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어떤 한 가지 ‘옳다’는 信念이 있게 되면
그 信念 때문에 繼續的으로 그 信念과 關系된 經驗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마음(心)이 世上을 만들고,
마음(心)에서 그렇게 믿는 것은
그대로 世上에 나타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信念이 그 經驗을 만들어 낸 줄 모르고
자꾸 經驗을 하니까 그 信念이 옳은 것인 줄 錯覺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信念을 내 안에 만들어 놓으니까
자꾸만 그 信念대로 經驗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信念으로 인해 經驗하는 境界는 참이 아니라는 말이다.
요즘 마음공부와 명상이 사람들의 키 워드가 되면서부터
온갖 종류의 마음공부와 명상 프로그램 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어떤 곳에서는 바로 이 점을 惡用하고 있기도 하다.
信念이 世上을 만들어낸다는 事實.
바로 이 하나의 事實만을 가지고
그 信念을 바꾸도록 온갖 方法으로 이끈다.
信念이 바뀌면 經驗이 바뀐다는 事實,
믿는대로 이루어진다는 事實,
그 하나의 事實만을 가지고 眞理를 운운하면서
信念 바꾸는 프로그램에 수많은 돈을 내고 참여하도록 독촉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크게 看過하고 있는 点이 있다.
바로 信念이 만들어내는 經驗은 참이 아니라는 点.
바로 이 点을 看過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도
마음(心)이 世上을 만들어낸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世上은 거짓이라고 하셨다.
꿈이고 幻想이며 신기루이고, 공(空)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心) 以前의 자리를 깨닫도록 이끄셨지,
마음(心)을 가지고 是非 分別을 하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信念을 또다른 信念으로 바꾸거나 덮어버림으로써
問題를 解決하도록 하지는 않으셨다.
信念 그 自體를 비워버릴 수 있도록 이끄셨다.
一切 모든 信念과 固定觀念을 打破하도록 이끄셨지
하나의 固定觀념을 다른 固定觀念으로
부숴버리도록 하지는 않으셨다는 말이다.
물론 方便의 가르침으로
어떤 한 가지에 크게 執着할 때는
그 執着을 깨주기 위한 方法으로 方便설을 하기는 하셨지만
本來의 가르침은 一切의 모든 알음알이(識)를
비워버리고 놓을 수 있도록 이끄시고 있다.
그런데도 그러한 부처님 本來의 法에서 멀어져
信念을 바꾸는 作業을 프로그램화 하여
돈벌이로 장사하는 장사치의 일을
마치 佛法인 양 道量에서 버젖이 하는 일이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信念을 또다른 信念으로 바꿈으로 眞理를 體驗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모든 信念 그 自體를 놓아버렸을 때 眞理는 온다.
善과 惡을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善을 擇하는 것은
작은 깨달음이고 방편의 가르침일 뿐,
本來에서 본다면 善과 惡이 없기 때문에
따로이 善을 擇할 것도 없이
善惡이라는 觀念 自體를 놓아버릴 때 眞理는 드러난다.
부처님은 모든 信念을 버리라고 하셨다.
그 어떤 見解나 經驗에 對해서
‘옳다’ ‘그르다’ 하며 나누지 않아야 한다.
信念을 가진다는 말은
어떤 한 가지 見解를 ‘옳다’고 固定짓는다는 말이다.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나누고 분별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분별없이 다만 멈추고(止) 바라보기(觀)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本來의 平和가 찾아온다.
信念이나 見解, 옳고 그른 分別 以前의
딱 끊어진 本來의 참됨과 마주할 수 있다.
그 어떤 信念도 固定觀念도 놓아버려라.
그리고 다만 바라보라.
그랬을 때 모든 참된 眞理를 經驗할 수 있다.
그러나 그 眞理의 經驗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分別된 모양(貌樣)이 아니다.
眞理안의 그 어떤 經驗도
아무런 是非 分別이 없는 無差別의 智慧가 된다.
거기에는 그 어떤 信念도 따라 붙지 않는다.
그 어떤 信념이나 固定觀念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分별하지 않고,
判斷하지 않고,
信念이나 固定觀念을 만들어 내지 않고
다만 치우치지 않은 正見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그 어떤 經驗이든
그 經驗에 價値判斷을 하게 되고
信念을 付與하게 되면
그 때부터 그 經驗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진
거짓의 經驗이 되고 만다.
信念을 가지면
이 모든 眞理의 經驗이
그로 因해 삐뚫어지고 왜곡된다.
바람이 불고, 새가 하늘을 날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
내가 이렇게 호흡을 하고, 걷고, 움직이는 것,
내 앞에 펼쳐지는 一切의 모든 經驗은
分別하지 않고, 信念으로 投影하지 않으면
그대로 眞理의 經驗이 되는 것이다.
이미 이 宇宙 法界 森羅萬象 그 自體는
그대로 부처(佛)이고, 그대로 온전한 부처님(佛)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따로 깨달을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깨달아 있는 것이다.
恒常 온전한 眞理가 우리 앞에 늘 그렇게 펼쳐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다만 分別하지 않고,
그 어떤 信념이나 見解, 固定觀念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眞理를 經驗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眞理를 經驗하지 못하는 理由는
분별하고 나누며
自身 안에 信念이라는 틀을 만들기 때문인 것이다.
分別하지 말고
信念을 덮씌우지 말고
다만 모든 分別을 멈추고 바라보기만 하라.
- 법상스님 -
-결가부좌 명상도량/ 자비선원-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本性의 힘 (0) | 2012.03.02 |
---|---|
관념적인 사람은 계속 자신과 싸운다 (0) | 2012.03.01 |
[스크랩] 체험은 믿음에 따라 결정된다 (0) | 2012.03.01 |
대원경(大圓鏡) 안에서는 서로 다른 法이 없다 (0) | 2012.03.01 |
[스크랩] 일체 유심조 (0) | 2012.0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