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야 할 필요와 <나> / 만공스님
나라는 意義가 絶對 自由로운 데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自在 할 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自由가 없고, 무엇 하나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망아(妄我)가 주인이 되고 진아(眞我)가 종이 되어 살아 나가는 까닭이니라.
妄我는 眞我의 所生인데 現在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心)은 곧 사심(邪心)이요
眞我는 정심(正心)으로 처음도 끝도 없고, 존망(存亡)도 없고, 形相도 없지마는
오히려 조금도 不足함이 없는 <나>이니라.
사람이 나를 잊어버린 바에야 개, 돼지 등과 같은 人間이라 아니 할 수 없나니,
짐승이 本能的으로 食慾과 淫慾에만 팔려서 허둥거리는 것이나
人間이 제 진면목(眞面目)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現實에만 끌려서 헤매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인가!
世上에서 아무리 偉大하다는 人物이라고 하더라도 自己眞面目을 모른다면
사생 육도에 윤회하는 한 분자(分子)에 지나지 않나니라.
동업(同業) 衆生이 사는 이 사바세계에는 너와 내가 다 같은 生活을 하기 때문에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렇거니 하고 무심히 살며, 자기들 앞에 가로놓인 무서운 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다가 죽음이 닥치면 앞 길이 망망(茫茫)하게 되나니라.
나라고 하는 것은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生死도 없고
불에 타거나 물에 젖거나 칼에 상하는 것이 아니어서 일체 얽매임을 떠난 獨立的인 <나>이다.
人生은 말꼬리에 매달려 울며 뒹굴려 가는 죄수처럼, 업의 사슬에 끌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의 길을 永劫으로 輪回하고 있는데, 그 쇠사슬은 自己의 智慧의 칼이라야 능히 끊어 버릴 수 있게 되나니라.
사회에서 뛰어난 학식과 인격으로 존경을 받는 아무러한 사람이라도 이 일을 알지 못하면
기실 사람의 精神은 잃어버린 인간이니라.
석가 세존께서 탄생 시에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天上天下 唯我獨存」이라 하신 그 아(我)도 <나>를 가리킨 것이니라.
各者가 부처가 될 性品은 지니었건만,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하나니라.
一切가 다 <나>이기 때문에 극히 작은 하나의 털끝 만한 精力이라도 이 <나>를 찾는 以外에는
어떤 다른 것에 소모하는 것은
나의 損害이니라.
누구든지 肉身?業身?法身의 세 몸을 지녔는데, 세 몸이 一切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一切 行動은 法身이 하는 것이나, 肉身과 業身을 떠난 法身이 아닌 까닭에
현상(現像) 그대로가 곧 生死 없는 자리이니라.
生死 없는 그 자리는 有情物이나 無情物이 다 지녔기 때문에 한 가닥 풀의 정(精)이라도
全 宇宙의 武裝으로도 解體시킬 수 없나니라.
世上에는 나를 알아보느니 찾아보느니 하는 말과 문구는 있으나 업식(業識)으로 아는 <나>를 생각할 뿐이요, 정말 나는 어떤 것인지 想像조차 하지 못하나니라.
<나>는 무한극수적(無限極數的) 壽命을 가진 것으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金鋼不壞神이라,
이 肉體의 生死는 나의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일 뿐
人間이라면 自身이 所有한 生死의 옷쯤은 自由自在로 벗고 입을 줄 알아야 되나니라.
보고 들어서 얻는 知識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나라는 생각만 해도 그것은 벌써 내가 아니니라.
나는 무념처(無念處)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無念處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부처를 대상으로 하여 구경(究竟)에 이르면 내가 곧 부처인 것이 발견되나니,
結局 내가 내 안에서 나를 發見해야 하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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