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의 寂滅性과 虛無主義의 正體 佛性과 創造主, 法界緣起와 大宇宙, 輪廻와 生命의 循環, 唯識論과 認識論, 空과 般若와 빅뱅이론으로 이어지는 방대한 불교의 철학적 사유는 엄청난 깊이와 빈틈없는 논리로 현대인들을 완전히 압도한다. 그래서 오늘날 불교는 현대과학의 물질적 측면과 종교의 미신적 측면을 극복하고 인간의 윤리의식에 진리적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현대적인 종교로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나의 경우에도 불교 속에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완전한 모델과 진리의 궁극적 실체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젊은 시절에는 불교대학원에 들어가 진리의 실체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를 공부하면 할수록 이상한 것은 그 철학적 완전성과는 달리 그속에는 불자들의 삶을 염세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들며 세상을 정체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非現實性이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卽, 모든 좋은 일은 하고 모든 나쁜 일은 금하며 과연 宇宙의 實狀이 오늘날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정녕 공하고 허망한 것이며
과연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인지에 대해 根本的인 疑問을 가지곤 했다.
만약 불교의 주장대로 宇宙의 實狀이 정녕 空하고 虛無한 것이라면
어떠한 삶을 살던지 간에 산다는 것 自體가 苦痛이고 幻(그림자)이기 때문에
더 以上 世上을 살 이유가 없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불교이론가들은 현실적 모순에서 벗어나고자
현실에 참여하되 집착은 갖지 않으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하지만 현실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실존의 문제로서
놀이삼아 가볍게 대한다면 대부분 생존경쟁에서 패배하여 낙오자가 되고 만다.
따라서 지엄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교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거부해야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도달한다.
만약 불교의 본질이 진실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현실을 살아야만 하는 우리는 불교를 믿어서는 안되며
오늘날 불교가 왜곡된 것이라면 다시 정법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나라는 大乘佛敎의 空思想과 無爲自然의 道家思想이 동양철학의 전부인 줄 알고 있었기에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이 무엇인지 生覺하기 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학문의 발달로 小乘佛敎를 비롯한 初期佛敎의 實體를 알 수 있게 되었고
희귀한 진리의 인연으로 事實과 虛構를 밝힐 수 있는 눈을 얻을 수 있었기에
世上의 眞實과 永遠한 眞理를 밝히신 부처님 法의 참 모습을 다시 드러내게 되었으니
因緣있는 분들은 거짓과 幻想으로부터 벗어나 永遠한 眞理와 事實의 世界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럼 먼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 힌두적 환경 속에서 무엇을 전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부처님이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 당신이 보신 것은 宇宙의 實狀과 世上을 이루는 完全한 理致였다. 깨달았다는 말은 業에 가려진 衆生들이 보지 못하는 世上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부처님의 깨달음은 事實을 事實대로 본 것으로 그 가르침은 事實과 一致하였고 따라서 그 가르침대로 行動하면 世上의 흐름과 調和되어 참되고 방황없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생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眞理라 하고 그분을 正覺을 이룬 聖者라고 尊敬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解脫心에 비친 實狀과 理致는 이 世上이 하나이고 이를 構成하는 眞理도 하나이므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하나로 똑 같다. 부처님은 논리로 이치를 만들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事實과 그 속에 存在하고 있는 理致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인고법아함경에 여러 장소에서 같은 말을 한 구절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이와 같이 恒常 같은 現狀 속에는 언제 어디서나 같은 理致가 되풀이 되고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如來는
참된 말만 하며,
事實만을 말하며,
眞實만을 말하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으며,
事實과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고 傳해지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業이 사라진 解脫한 마음으로
六途輪廻의 實狀과 人間의 삶속에 흐르고 있는 理致를 밝힘으로써
당시 브라만교의 幻想과 迷信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神의 어둠에서 벗어나서 存在하고 있는 事實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셨고
삿된 欲望과 無知에서 벗어나 不幸과 苦痛없이 살아가라고 하셨다.
부처님에게 있어 이 世上은 宇宙의 眞理가 나타나 있는 實狀의 經典으로
그것을 있는 그대로 表現하면 그대로 完全한 眞理가 되었다.
즉, 自然이야말로 眞實이며 世上의 모든 法이 나타나있는 가장 偉大한 經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기에 부처님이 傳한 法을 事實에 關한 法이라 하여 유법(有法)이라고 하는데
부처님 법을 연구 전파하기 위해 모인 초기 승단을 유부(설일체유부)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사실에 근거하여 상호간의 인과관계를 밝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을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만물을 이루고 있는 원리(법, 다르마)를 밝혀 세상을 설명하려 했다.
이 학파의 철학체계는 장기간에 여러 단계를 거쳐 완성된 것이지마는
'모든 것은 있다'고 하는 것이 기본 입장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과 외면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것들을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를 내면세계와 객관세계로 나누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
이것을 諸法分類법이라고 하는데, 소위 5위 75법이라 하여
이 世上을 構成하고 있는 精神世界과 物質世界를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고
이를 다시 75가지로 나누어 細分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유적 요소로서
이들의 多樣한 因果關系에 의해 世上이 이루어지므로
緣起法으로 모든 것이 解析된다고 본다.
즉 모든 것은 유적 존재로서
부처님의 해탈 또한 인과관계의 결과로 나타나는 유적 존재이며
법(法)도 삼세 어디서나 존재(法體恒有)하는 유적요소라 하여 삼세실유론(三世實有論)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부처님 사후 600여년이 지나 나타난 大乘論者들은
法은 實在하지 않는 것으로 그 實體를 空이며 幻이라고 주장하면서
부처님은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해 방편으로 事實法을 가르쳤을 뿐
根機가 높은 제자들을 위한 참된 法으로는 오직 空한 理致를 남겼다고
旣存 敎理와 反對되는 主張을 하기 시작했다.
즉 부처님은 우주의 근원을 꿰뚫어본 분으로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에 불과한 초기불교의 교훈만 가르치지 않았으며
염화시중의 미소와 같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이치와 정법안장과 같은 비법을 남겼는데(不立文字 敎外別傳)
그 깊은 뜻과 비법은 秀第者들에게만 秘密리에 傳해지다가
大乘佛敎에 이르러 그 숨은 뜻이 나타나 哲學的 宗敎的으로 完成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후대에 중국에서 발전한 교판론(敎判論)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불멸후 약 500여년이 지나 점차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인도에서 성행한 여러 불교경전들이 한꺼번에 중국으로 밀려들어오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자 인도에서의 불교의 변천과정을 잘 모르는 중국의 학승들은
이 모든 경전들을 부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여
자신들의 알음알이로 그 내용의 철학적 깊이와 전후과정을 나누고
이를 순서대로 분류하여 정리하려 했다.
이러한 흐름을 敎判論이라 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인 중국 천태종의 지자대사는
부처님의 一生을 다섯 時期로 나누어 불법의 변천과정을 기술하였다.
첫째는 화엄時期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처음 21일 동안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을 넘어서는 더 완전하고 미묘한 법일까?
부처님은 宇宙의 모든 實狀을 꿰뚫어본 三世의 스승이라고 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과 같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않는 한
아무도 해탈의 경지에서 본 부처님 법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런데 아직까지 역사속에 부처님과 같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성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른 법이 나왔다는 것은
그것이 부처님 法을 發展시킨 것이라기보다는 歪曲시킨 것일 可能性이 높은 것이다.
만약 대승경전을 편찬한 이들이 진정한 정각을 얻어 완전한 진리를 보고 대승경전을 지었다면
내가 깨닫고 보니 실상이 이러하였다고 당당히 자신의 이름으로 대승경전을 지었겠지만
부처님 사후 600여년이 지나 나타난 모든 대승경전들이 부처님의 이름을 가탁하고 있는 것은
부처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논리를 펴고 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적은 초기 경전에는 因果의 理致와 實像의 世界 以外에는 없다.
만약 그분이 自然의 經典에서 본 事實的인 모습과 이치 以外에
다른 超越的인 뜻과 이치가 존재하는 것을 보셨다면
반드시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것이며 초기 경전에 그런 내용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 대승경전이 나타났을 때
초기 500년간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오면서 온갖 견해와 논리로 부처님 법을 샅샅이 해부했던 상좌부에서
대승경전을 단순한 이야기책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하고
대승의 공법을 불법을 파괴하기 위해 나타난 악마의 설이라고 전면 부정했던 것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초기 경전 속에 그러한 理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불교의 變質을 明確히 理解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변질되고 대승화했는지 그 변천과정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各者 自己와 因緣있는 地域으로 흩어져 부처님의 法을 펴기 시작하였다. 덧붙여 대장경을 편찬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경은 팔리어로 쓰여진 3차 경전과는 달리
힌두 귀족들이 사용하는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는데
그만큼 인도 문화와 힌두교의 영향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며
이 경전들이 북방으로 전해져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한역대장경의 원전이 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초기불교라고 인식하고 있는 한역 아함경은
부처님 사후 약 700년간에 걸친 부파불교의 이론화가 반영된 카니시카왕의 4차 결집의 산물로서
이때는 이미 대승불교가 흥기하기 시작한 때라 힌두교의 영향이 많이 반영된 것이니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 초기불교 속에 나타난 법의 변질을 살펴보자.
부처님 법이 그 진리성으로 말미암아 널리 전해지고 따르는 제자들이 많아짐에 따라
여러 부파가 형성되고 각 집단별로 고유한 이론이 전개되었다.
이를 부파불교(아비다르마)라고 하는데 그 수는 초기의 『설일체유부』를 비롯하여 20개에 달한다.
그들은 부처님이 사람들을 만나 행한 질문과 답변 속에 관련된 사실과 이치를 모두 집어넣어
완벽한 문장과 체제를 갖추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기에 부처님은 완전하신 분이니
조금의 흠도 없는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많은 가르침 중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선택하여
각각의 의미에 대해 상세히 해설하고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렸으며
그 특성에 따라 일정한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때 가장 두드러진 방식은 관계있는 교설을 숫자에 따라 정리하는 방법으로
일법(一法), 이법(二法), 삼법(三法)과 같이 순서대로 배열하는 방법과
동일한 주제를 한 곳에 모아 정리하는 방법이 대표적이었다.
삼법인, 사제, 육근, 육경, 팔정도 12연기라는 분류들도 원 가르침에는 없는 단어들로서 부파불교의 논사들이 정의하고 개념화한 것들이다.
그들은 법(다르마, 진리)이 무엇이며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논리적인 체계 속에서 차근차근 틀을 구축해 갔다.
초기 경전의 내용이 복잡하고 관념적이며 나열적인 것은 바로 제자들의 이러한 노력 덕분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전해지고 있는 불교는 부처님이 일상 속에서 중생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부파불교의 논사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부처님의 위상에 맞게 가공하여 체계화시킨 것이니 그 진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깨닫지 못한 第子들이 自身들의 思惟와 論理로
四聖諦, 八正道, 無常. 無我라는 槪念을 構築해 나가는 過程에서
그들이 내린 단편적인 정의들이 부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깨닫지 못한 중생이 완전한 시각에서 본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 마음대로 규정지은데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초기 부파불교에서는 그들이 정의내린 주요명제들과 부처님의 말씀간에 나타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온갖 철학적 논리를 전개하게 되는데
부파불교간의 치열한 논쟁은 바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쟁점이 無我論이었는데
그들이 생명의 주체를 무아로 결론 내리자
이는 과거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手記를 주며
다음 생에 분명히 부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즉 手記를 주었다는 것은
바른 行爲와 功德을 다음 生에 이어가는 輪廻의 主體가 있다는 말인데
我의 主體가 없다고 하면 業을 이어가는 輪廻의 主體가 사라지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이 成立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제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논리를 세우는 과정에서 부처님의 정법과 본래 취지가 많이 훼손되게 된다.
그럼 먼저 三法印 四聖諦로 대표되는 불교의 기본명제가 잘못 이해되고 있는 점에 대해 살펴보자.
佛敎에서는 3가지 基本原理로 “諸行無常 一切皆苦 諸法無我”의 「三法印」을 설정하고 있으며 여기에 涅盤寂靜을 넣어 四法印이라고 하기도 한다. 부파의 논사들은 모든 存在는 緣起의 原理에 따라 쉴새없이 變化하므로 고정된 실체는 없으며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므로 永遠하지 못한 一切는 苦痛스럽다고 定義 내린다. 그러나 緣起論의 本來 뜻은 오늘날 불교인들이 배워왔듯이 모든 것이 상호의존하여, 독자적인 게 없으므로 실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밝은 삶과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인 것이다. 즉 緣起論은 오늘날 불교가 주장하듯이 世上의 無常함과 苦의 原因을 밝히려는 이론이 아니라 後生의 나에게 어김없이 이어지므로
八正道로 心身을 닦고 功德을 쌓으면 마침내 그 善根이 完成되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제자들에게 부처가 될 거라는 手記를 주셨던 것이다. 만약 無我論의 논리대로 나의 實體가 없다면 좋은 공덕과 선근을 익혀 다음 생에 부처가 될 수기를 받는 輪廻의 主體가 사라지기 때문에 모든 나쁜 原因을 짓지 말고 모든 좋은 原因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는 칠불통계(諸惡莫作 衆善奉行)의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無我說이 오늘날 불교의 기본 입장이라고 보는 것은 매우 危險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諸法無我는 불교의 기본원리로 윗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靈魂의 實體에 대한 問題는 부처님이 논의를 거부했던 14무기 속에 들어 있는 사항인데 후대 논사들에 의해 제법무아라는 결론으로 오늘날 불교의 윗자리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 定義가 眞實이 아닐 可能性이 높은 것이다. 부처님은 永遠히 不變하는 나의 實體는 없지만 變轉하는 輪廻의 主體는 있다고 말하셨다.
불경에서는 이를 비유로써 모순없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많은 고리로 이루어진 사슬을 생각해보면
비록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連續的으로 이어진 가닥은 없지만,
각 고리가 서로 끊어지지 않고 하나의 사슬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고리 사이의 連結이 있어 同一體로서 連續性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過去에서 現在로 이어지고 있는 人間의 單一性과 持續性도 같은 것은 아니지만
긴밀한 因果的 連結에 의하여 이어지기에 全體的으로 同一性을 維持되는 것이다.
다른 예로, 촛불을 생각해보자.
촛불은 단일한 불꽃으로 지속적인 빛을 주며 하나의 촛불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불꽃은 每瞬間 마다 타오르는 밑부분의 기름이 다른 것이니
現在의 빛과 過去의 빛과 未來의 빛이 같은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앞의 불꽃과 곧바로 이어지는 뒷 불꽃 사이에
앞이 없으면 뒤가 存在할 수 없는 緊密한 因果的 連結이 있기에
불꽃이 하나로서 認識되는 것이다.
靈魂도 이와 같다.
그동안 輪廻主體와 관련한 논쟁은 초기불교 이래로 수천년간 이어져 왔으며
아직까지 명백히 밝혀지지 않아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러한 철학적 논란 대신에
意識과 輪廻와 意識의 主體에 대한 實狀을 밝힘으로써
無我의 논의에 대한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부처님의 법은 추상적 논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實狀의 眞實을 밝힘으로써 모든 희론을 잠재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人間의 靈魂은 氣運의 形態 속에 意識이 깃들어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살아있을 때 肉體 속에 居住하면서
完全한 因果法에 따라 삶의 모든 經驗을 自身 속에 담게 되고
죽어서는 그 사람의 結實로 分離되어 이 法界를 맴돌며 後生의 原因이 된다.
世上에서는 이것을 靈魂이라고 한다.
이렇게 한 人間의 삶의 結果로 나타나는 靈魂은 自身이 지은 業과 因緣에 따라 後生을 받게 되는데
성경말씀처럼 잘 지은 열매는 풍성한 수확을 낳고 잘못된 쭉정이는 버려지게 된다.
즉 欲望과 잘못된 삶으로 恨과 執着 속에 죽은 이는
그 靈魂이 편히 쉬지 못하고 地獄의 幻想 속에서 苦痛을 받다 흩어지거나 消滅하고
平凡한 삶을 살아 人間의 根本을 크게 망치지 않은 사람은
다시 人間으로 나며 그보다 더욱 昇化한 자는 더 높은 次元인 天上에 나게 되는 것이다.
즉 바른 삶의 길을 알고 좋은 原因을 지은 者는 그 靈魂이 맑고 깨끗해져
가벼운 것은 높이 오르는 自然의 原理에 의해 天上에 오르며
그 좋은 善根으로 말미암아 밝은 智慧와 좋은 마음을 지니고 태어나
마침내 解脫이라는 人間完成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循環과 再生의 흐름 속에는 宇宙 誕生의 秘密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般若의 關門이 있다.
즉 한알의 밀알이 완전히 썩지 않고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없듯이
모든 인간이나 신도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根源의 世界 속에 自身을 묻어야 하는데
이때 通過하는 關門을 般若라 한다.
즉, 사람이 죽으면 輪廻하게 되는 靈魂은
죽음과 더불어 깊은 잠에 빠지면서 般若로 스며들게 되는데
이곳에서 旣存의 모든 記憶이 사라지고 새로운 生命으로 다시 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色卽是空 空卽是色 現狀인 것이다.
이곳은 모든 것이 새로 始作되는 根源의 자리여서 過去의 記憶을 가지고는 通過하지 못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 중에서는 모든 業이 사라져 마음이 淸淨해진 사람만이 이곳에 들 수 있으며
이곳에 든 자는 解脫에 이르게 되는 것이며
根源에 닿을 수 있는 맑은 마음이, 모든 것과 通하여(=하나가 되어), 모든 法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般若深經에도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에 듦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通過하여 새롭게 태어난 靈魂은 깨끗한 狀態로 새 人生을 始作하게 되는데
그런 關系로 새로 태어난 모든 人間은 過去의 記憶을 모두 잊고 白紙狀態로 태어나는 것이 定狀인 것이다.
그러나 이때 過去의 모든 記憶은 사라지지만
過去 自身이 習得했던 智慧와 性品과 資質 등은 繼續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마치 콩을 심을 때 그 출생지가 어디인지 몰라도
콩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 그콩이 어떤 품종이며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사람도 過去에 그가 누구였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그 사람의 性品과 氣質을 보면
過去에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輪廻의 흐름 속에는 六塗를 오고가는 靈魂의 離合集散이 있어
前生의 나와 後生의 내가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가 더욱 어렵다.
輪廻의 흐름에서 人間의 靈魂도 다른 生命體와 똑같은 生命의 秩序에 의해 規律받는다.
그래서 가벼운 것은 높이 오르고 무거운 것은 낮은 곳으로 가라앉으며
弱하고 稀微한 것은 흩어지는 理致에 依해
昇化한 靈魂은 높이 오르며 墮落한 靈魂은 무거워 낮은 곳을 헤매다
苦痛 속에 흩어지는 現狀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 完成으로 나아가는 靈魂은 그 意識이 맑게 淨化되어 점점 結晶體(解脫心)가 되어가나
幽界를 헤매는 靈魂들은 人間의 根本도 간직하지 못하고 흩어져
迷物의 靈體나 풀의 氣運이 되기도 하고 消滅하기도 한다.
마치 高等生物의 경우 種子를 적게 낳으나 下等生物은 많은 種子를 퍼뜨리는 것과 같은 現狀이
人間의 靈魂世界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니
人間의 靈魂도 嚴正한 生命의 秩序에 의해 흩어져 다른 많은 生命의 原因이 되기도 하고
迷物의 靈體가 昇化해 人間의 靈魂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過去의 靈魂이 後生의 靈魂과 同一한 것이라고 말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다.
부처님이 靈魂과 我의 實體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러한 理由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도 我가 아니고 저것도 我가 아니라고 我에 대한 斷定을 피하셨으며(14무기)
나의 實體가 없다는 無我論은 주장하지는 않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이론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無視하고 무아론이 정통이 되어 있으니 반드시 後生에 그 結果가 나타나는 것이니
良心있고 理性있는 者라면 自身이 지은 原因이 가져올 必然的인 結果에 대해 責任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自身의 行爲에 責任져야 하는 것은,
그가 空中에서 펑하고 태어난 宇宙의 唯一無二한 存在가 아니라,
過去, 現在, 未來의 因果的 고리로 이어지는 同一 連續線 上의 靈魂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緣起的 輪廻設이 人間의 良心과 倫理에 주는 意味는 매우 크다.
모든 人間이 自身의 行動이 가져올 後生의 結果에 대해, 充分히 理解하고 責任을 질 때
人間의 良心과 道德的 基準이 回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나의 행위에 책임지지 않고 함부로 惡業을 짓는다면
나의 業報는 後生에 惡業을 지닌 人間 속에 나타나 世上을 어둡게 할 것이며
나의 家族과 親知와 後孫들은 이러한 惡業을 지닌 人間들에 의해 不幸하고 苦痛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世上의 人心이 동굴이나 정글 속에 살았던 옛 조상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貪慾스럽고 잔인하여 法과 良心을 無視하고 짐승들보다 더 邪惡한 戰爭을 일삼고 있는 것은 過去 우리 人間들이 歷史를 지어오면서 설마 나의 業이 後生에 이어지지 않겠지 하는 近視眼的인 無知에서 함부로 저지른 惡業의 結果를 지금 이땅에 받고 있는 것이다. 사성제(苦集滅道)에서도 이러한 歪曲은 계속 나타나고 있다. 먼저 고성제에 대해 살펴보자. 오늘날 불교에서는 이 세상은 幻이며 생노병사는 삶에 따른 필연적 운명이기에 삶은 苦이며 이 세상은 苦痛의 바다라고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 이 世上 모든 것은 循環을 通해 끝없이 이어지며 새로운 生命力을 얻기 때문이다. 죽고 다시 나는 것은 健康한 生命을 維持하기 위한 宇宙의 基本秩序이니 이러한 莊嚴한 秩序를 無意味하다거나 苦痛이라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人間이 다시 태어나는 것은 無意味한 輪廻의 쳇바퀴를 끝없이 돌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합이 백합을 낳고 수선화가 수선화를 낳듯이 佛性이 自身의 씨앗을 뿌려 解脫이라는 完成의 열매를 맺으려는 自己 循環의 原理에서 나타나고 있다. 佛性이 世上을 創造하고 人間을 나게한 理由는 모든 것이 움직임과 循環을 通해 自身을 存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世上 모든 것은 움직임이 없으면 認識할 수 없으며 認識할 수 없는 것은 存在할 수 없다.
그러므로 佛性도 고요히 寂滅에 머물지 않고 佛性을 내어 活動과 循環을 일으키고
解脫이라는 完性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自身의 完全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人間의 탄생은 完全한 佛性의 自己 表現이며
宇宙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祝福의 機會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祝福스럽고 貴한 因緣을
現 불교에서는 삶 자체를 無明의 所産이며 幻으로 보기 때문에
苦痛과 無常으로 結論 내리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無命의 所産이라고 한 적이 없다.
부처님은 重生들이 苦痛에 빠지는 原因을 無命이라 했으며
眞實과 바른 理致를 잘못 봄으로써 생겨나는 어둠을 無明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고통스러운 것은 올바른 이치와 실상을 모르는 중생들의 삶인 것이며
眞實을 알고 眞理의 길을 가는 善根있는 者들에게는
이 世上은 完全한 法界이며 人間完成에 이르는 祝福의 場인 것이다.
멸성제(滅聖諦)
오늘날 불교는 世上 自體를 存在하지 않는 幻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執着과 分別을 버리고 깨닫고자 하는 마음마저 버리면 解脫이 온다고 한다.
즉 선과 악에 대한 구별과 깨달음을 향한 노력도 業의 일종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 本來부터 여여한 眞如(佛性)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힌두사상의 영향에 의해 불교로 들어온 관념들이다. 힌두사상에서 이 세상은 절대자 브라마(梵天)가 심심풀이 유희(리라)를 위해
환력(幻力;마야)으로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본질은 본래 실재하지 않는 것이며 실재하는 것은 오직 브라만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현상의 실체가 공임을 깨닫고
모든 분별과 집착과 존재를 벗어버리면 곧 바로 해탈이 온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법과 힌두사상의 반대되는 差異點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이 因果法에 의해 한치의 오차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바른 原因을 지으면 점점 그 善根이 커져
마침내 좋은 世上과 人間完成을 얻게 된다는 因果에 의한 유적 완성을 말씀하셨는데
힌두즘의 마야사상은 이 세상이 모두 幻想이고 苦海이니
세상이 한바탕 꿈이라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어떠한 구별과 노력이 없이도 곧 바로 진여에 도달하게 된다는 無法論과 無爲論을 주장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선과 악,
친해야 할 것과 친하지 않아야 할 것,
정법(正法)과 사법(邪法),
연기법(緣起法)과 외도의 법(非緣起法)등을
옳고, 바르게, 사실대로, 아는 것을 바른 견해(正見)라고 했으며
이를 실천하는 것을 정업(正業)이라고 했다.(아함경)
즉 부처님은 事實을 바로 알고 바른 理致를 實踐함으로써
좋은 自身을 만들고 功德을 지으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대승과 브라만 사상은
선악을 구분하는 것을 分別이라 하고
선을 행하는 것을 執着이라고 하며
선업도 업의 일종이니 모두 버리라고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事實을 無視하고 正法을 否定하는 말은 없는 것이다.
世上은 버리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기 위해 태어난다.
이것은 이 宇宙에 存在하는 모든 것에 共通的으로 適用되는 循環法則이다.
모든 씨앗이 피어나서 그 열매를 맺을 때 自身을 完成하듯이
佛性도 人間을 내어 그 佛性을 키워 解脫이라는 열매를 맺음으로써
自身의 完全性을 證明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과 힌두사상은 現實을 否定하고 因果에 依한 實踐을 拒否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나기 以前으로 돌아가라고 하고 있으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正反對인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根源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피어나기 전의 어린 씨앗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열심히 가꾸어 열매를 맺는 것은, 타고난 根本을 完成시켜 循環의 法則을 完成시키는 것이니
後者가 生命의 本質에 充實한 삶인 것이다.
이것이 道聖諦의 진정한 뜻이며
부처님이 말씀하신 선근의 길과 수기의 가르침과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이론은 힌두즘의 마야사상과 이어져
모든 것을 空과 虛無로 돌리고 善惡의 區別과 삶의 實踐마저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불교를 믿는 나라에는 밝은 理致와 實踐的인 삶이 사라지고
無知와 幻想, 無氣力과 締念, 어둠과 不幸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불교 속에는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대로 傳해지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힌두적 감염은 부처님 사후 600년이 지나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불교의 본질적인 부분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한다.
<대승불교의 성립>
사실 대승불교가 일어나게 된 데는 기존 소승불교의 잘못도 크다.
부파불교의 진행으로 교리의 이론화와 힌두적 관념화가 진행되면서
초기 부처님의 생생한 가르침은 진리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갔고
기존 승려집단은 승원을 중심으로 고도의 철학적이고 난해한 논리를 전개하면서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알 수 있는 고급종교가 되어
왕실과 귀족들의 지원아래 중생들과 유리된 엘리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재가신자들과 개혁적인 승려들은 중생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추상적인 사변만 일삼으며
권력과 유착하여 일신의 안락만 추구하는 기존 승단을 비판하면서
부처님의 本來 精神으로 돌아가 衆生들을 求援하는 참된 불교가 되자고 대승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들은 기존 승려들의 이기적이고 귀족적인 모습을 '소승'이라 공격하고
스스로를 모든 것을 담는 ‘대승’'이라 칭하면서
대중적인 신앙운동을 발전시키고 대승경전을 편찬하게 된다.
그러나 그 意圖는 좋았지만 그들에게는 眞理의 빛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중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수단을
당시 중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힌두 신앙과 철학으로부터 借用했던 것이다.
그들은 힌두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박티 신앙을 받아들여
부처님을 믿기만 하면 法을 몰라도 求援을 얻을 수 있다고 阿彌陀佛 信仰을 發展시켜 나갔고
부파불교를 오염시켰던 브라만 사상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대승불교의 철학적 기초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AD 1세기경에는 반야계통의 대승경전이 나타나고
AD 2세기경에 화엄경이, AD 4세기경에 법화경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대승경전이 출현하자 기존 불교교단에서는 이야기책에 불과하다고 근본적으로 부정하였던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現狀을 單純하게 生覺해서는 안된다.
역사와 법통을 가진 거대한 기존 교단에서 대승사상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대승의 교리가 기존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면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대승의 이론적 기반인 空思想에 대해 살펴보자
空思想은 3세기 경 나가르주나(Nagarjuna:龍樹)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그는 여러 저술들을 통하여 <반야경>의 공(空)사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면서
부처님의 사실적인 견해와 기존 힌두교의 주장들을 모두 비판 배척하게 된다.
용수는 모든 존재는 연기에 의하여 생기므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으니,
이것을 깨달으면 眞空中道의 바른 見解를 얻을 수 있다는 般若空觀을 설하였는데,
이 설에 기초를 둔 학파를 중관파(中觀派)라고 한다.
용수는 『중론』에서 모든 사물은 상호 의존적인 연기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自性이 없으며 모든 實體는 空하다고 한다.
自性이란 因과 緣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自立的인 것으로
다른 것에 依存하지 않고 홀로 存在할 수 있는 固定不變한 實體라고 할 수 있는데
상호의지하는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선 홀로 존재하는 自性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世上의 本質은 무자성(無自性)이며 空이라고 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最高의 眞理(Param rtha, 眞諦, 勝義諦)란 事物의 있는 그대로의 實體로서
인간의 思考 내지 認識作用이 미치지 않는 超越的 狀態를 말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 본질의 세계와 유사하며
세상의 흐름과 무관한 영원한 무루의 실체를 말한다.
이에 비해 덮힌 진리(俗諦, 世俗諦)는 相對的인 眞理로
인간의 시각과 사유에서 본 法을 이야기하는데
플라톤의 현상의 세계, 동굴의 세계를 의미한다.
진제에 의하면 이 세상의 일체 사물은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늙고 죽은 것도 깨달음도 모두 거짓된 觀念에 불과하다고 한다.
따라서 사물이 생겨나고 멸하며, 인간이 늙어서 죽는 것은 <덮힘>의 결과에 지나지 않으니
이 <덮힘>을 제거하면 불생, 불멸의 무루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용수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덮힘>의 세상으로 환영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눈을 뜨기까지 그것은 마음을 괴롭히는 고통의 바다지만
일단 눈을 떠버리면 고통스럽던 꿈은 이슬과 같이 사라지고
영원한 평안과 해탈 속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용수는 이와 같이 <반야경>에 나타나는 空을
歪曲된 緣起設로 이론적으로 논증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철학적 위상을 정립하였지만
생생한 깨달음의 實體인 解脫至境을 實體가 없는 觀念的인 空으로 바꿔버림으로써
불교를 事實에 關한 法에서 觀념이 支配하는 推想的인 法으로 變質시키고 말았다.
즉 부처님의 해탈지경은 業이 사라진 인간의 완성된 마음으로
宇宙의 實狀과 眞理를 비추는 살아있는 거울이었지만
관념론자의 사고와 논리에 의해 般若는
哲學的 思惟로만 存在하는 觀念的인 空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은 범부들이 執着하고 있는 것과 달리 實體가 存在하지 않으며
五蘊을 필두로 하는 諸法은 本來 存在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눈을 가리고 있는 幻想(덮힘)에서 벗어나면
본래 속박되지 않고 해방되지도 않은 제법의 본래 모습인 진여를 보게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브라만의 마야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정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꿈이나 幻과 같으며
諸法은 本來 存在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깨달음마저도 하나의 差別觀念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용수는 부처님을 넘어서는 正覺을 얻지 못하였으면서도
觀念과 論理로 부처님의 생생한 깨달음을 否定하고
事實과 理致에 立刻한 초기 가르침의 근본 사상인 三世實有論 마저 拒否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논리가 불교의 차원높은 사상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그야말로 末法時代가 도래한 것이다.
이렇게 대승불교에서 一切를 否定하고 宇宙의 本質이 空하다는 結論을 내리자
불교는 힌두교와 差異가 거의 없게 된다.
처음부터 브라만적 환경 속에서 생겨나 자라온 불교였고
힌두교와 더불어 교리의 변천이 이루어졌으며
결국 힌두교 속으로 함몰되어버린 불교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의 事實的인 가르침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교리변천을 거치면서 마침내 힌두교화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이슬람권의 침입으로 印度社會가 흔들렸을 때
힌두교는 살아남았지만 불교가 사라진 것은
불교의 眞理로서의 生命力과 特異性이 사라졌기 때문에
인도인들은 힌두교만 믿어도 불교를 내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唯識派>
중관파와 더불어 대승불교를 구성하고 있는 또 하나의 거대한 사상은 유식파이다.
이들을 요가짜라라고 하는데 그 말은 '요가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이들은 요가선정의 體驗에서 오는 마음의 作用을 중시하여
용수의 般若空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空 대신에 마음을 이 宇宙의 實體로 본다.
왜냐하면 그동안 인도 명상수행의 전통에 따라 오랜 동안 선정을 닦은 수행자들은
요가선정의 과정에서 意識의 根源으로 느껴지는 텅빈 마음의 세계를 많이 經驗했기 때문에
宇宙의 根源을 이루고 있는 것이 空이 아니라 마음(心)이라고 理解했던 것이다.
그들은 우주의 근원인 마음이 깨달음을 낳는 원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혹의 세계를 낳는 원인이 된다고도 하여
업과 깨달음과 불성의 관계를 밝히는 여래장연기설과
인식의 근원을 밝히는 유식론을 주장하게 된다.
그들은 기존에 계속 되어오던 불교의 근본적 모순인 무아설과 부처님의 수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禪定 속에 나타나는 意識의 根本을 말라식과 아뢰야식으로 나누어 논리를 전개했다.
즉 기존 불교에서 人間의 感覺을 6識(眼耳鼻舌身意)으로 나눈 것에 더하여
그들은 2識(나의 主體인 말나識과 宇宙의 主體인 아뢰야識)을 추가하여 8識으로 認識하였던 것이다.
즉 인간의 자아의식의 바탕에 깔려있는 불변의 의식체를 우주의 근본으로 인식하고
자아의식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우주의 근원인 불성과 이어질 수 있다고 하여
자아의식인 말나식과 우주의식인 아뢰야식의 상호관계와 깨달음의 가능성을 탐구한 것이다.
그들은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 manas-vij na)을 세세생생 윤회하는 주체로 보았는데
이것이 요즘 말하는 자아의식에 해당된다.
그들은 우주와 자아의 근원적 바탕인 아뢰야식 속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아치(我癡)ㆍ아견(我見)ㆍ아만(我慢)·아애(我愛) 등 근본번뇌가 일어나고
이들이 業의 흔적(業種子)을 남기게 되는데
제7 末那識이 이것을 '나와 내것’이라고 錯覺함으로써
煩惱의 根本인 탐(貪)·진(瞋)·치(癡)가 始作된다고 한다.
그래서 선정을 통하여 이러한 業種子가 幻임을 깨닫기만 하면
말나식은 저절로 사라지고 아뢰야식은 불성으로 돌아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業種子가 幻임을 깨닫는 것은 世俗에서는 不可能하기 때문에 요가 修行을 해야 하는데
오직 禪定에 의해서만 業이 消滅되고 아뢰야識으로 돌아가 解脫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들은 말라식(칠식)과 아뢰야식(팔식, 근본식)의 관계를 파도와 물에 비유한다.
파도가 물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듯이,
말라식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나타나지만
파도가 잠잠해지면 파도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맑은 물만 남듯이
파도가 환임을 깨달을 때 모든 번뇌와 자아(말나식)가 사라지고
아뢰야식(불성)만 남아 해탈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유식학파의 核은 바로 이러한 '전식득지(轉識得智)’이다.
즉 禪定으로 홀연 모든 分別과 因識이 幻임을 깨달으면
아뢰야識에 얼룩진 業種子가 저절로 사라져 衆生心이 佛性으로 變한다는 것이다.
卽 意識을 한번 크게 돌려 宇宙의 實狀이 空하다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한 瞬間에 解脫할 수 있다는 것이 唯識論의 要體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事實을 否定하고 法을 歪曲하는 根本的인 誤謬가 있다.
그들은 부처님이 가르친 삶을 通한 實踐과 因果法에 의한 功德보다는
一切를 마음의 장난으로 보고 禪定으로 모든 것을 깨달으려고 하는 觀念的인 方法을 擇함으로서
自身과 現實을 變化시키는 原因을 하나도 짓지 않고
오직 마음만으로 깨달음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完全한 宇宙의 法則인 因果法을 어기고
괭이를 대지 않고 땅에 있는 보물을 캘려고 했으며
산에 가서 물고기를 잡으려 했기 때문에
대승불교가 성행한 수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선정으로 평생을 보냈지만
正覺을 이룬 자가 단 한사람도 나타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삶이 살아 숨쉬는 이 世上은 幻想이 아니며
우리 속에 內在되어 삶에 영향을 주는 業 또한 幻想이 아니다.
이러한 要素들은 嚴然한 因果의 法則에 依해 수많은 生 동안 지어놓은 原因들이니
가만히 앉아 無明과 幻임을 깨닫는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며
치열한 삶을 通해 뉘우치고 返省해 큰 自覺을 얻어야만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그토록 事實을 重視하고 八正道의 實踐을 强調하신 理由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부처님께서 명확하게 밝히신 바 있다.
부처님이 선정의 최고단계인 非相非非相處에까지 오르셨으나
마음의 어둠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해탈을 얻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이 因果의 實踐을 通해 業을 지우려 하지 않고
旣存의 傳統에 얽매여 禪定으로 모든 業을 지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
“나의 깨달음은 선정과 고행으로 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生을 通해 쌓은 攻덕이 世上을 덮을 정도가 되어
그 善根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땅에 와서 解脫을 얻은 것이니
모든 제자들은 부지런히 법을 배우고 노력하여 깨달음에 이르라“고 하신 것이다.
이처럼 業과 因果의 理致를 事實로 보고 삶의 實踐指針으로 삼느냐
아니면, 存在하지 않는 幻想이며 그림자로 보아 벗어 던지느냐에 따라
부처님 法과 힌두 및 大乘思想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韓國 佛敎의 中心인 禪불교도 바로 이러한 唯識論的 修行法을 基本으로 하고 있다.
선가에서는 선수행은 염화시중의 미소로서 마하가섭에게 직접 전해진 법으로서
부처님은 하근기를 위해서는 염불과 기도를, 중근기를 위해서는 팔정도에 의한 연기적 수행을, 상근기를 위해서는 홀연 깨닫는 선수행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後代에 만들어진 말이며 초기불교의 가르침 속에는 그런 구절이 전혀 없다.
부처님께서는 당시 유행하던 모든 요가行과 苦行을 모두 經驗하시고
‘나의 깨달음은 苦行이나 冥想에 依해 온 것이 아니라’고
그당시 유행하던 수행법의 헛됨과 실체를 명확히 밝혔건만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그 주변에 있던 마음이 어둡고 게으른 자들은
자신들의 밑천을 버리기 아까워 幻想을 좋아하는 後人들에게 冥想術을 가르치면서
佛敎의 正法인 因果의 實踐法이 사라지고
가만히 앉아 단 한번에 요행을 노리는 冥想法이 盛行하게 되었던 것이다.
人間의 삶은 너무나 所重하고 진지한 것이어서 잠시라도 헛되이 보내서는 안된다.
人間은 實踐을 通하여 自身을 닦아야지
現實과 유리된 冥想을 通해서는 결코 自身을 닦을 수 없다.
世上의 모든 일(事)은 活動을 通하여 變化하며
自己가 짓는 原因에 따라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앉아서 하는 冥想이나 呼吸같은 것은 原因을 짓지 못하기 때문에
自身의 根本을 좋게 만드는데 기여하지 못한다.
땅으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지금 市中에 나와 있는 冥想技법을 修行하게 되면
自身과 世上을 變化시키는 原因을 짓지 못하여 結局 쭉정이 人生만 남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疑心이 든다면
熱心히 冥想을 하고 呼吸을 한 後 世上에 나가 現實問題를 解決해 보라!
바른 理致와 맑은 마음(心)을 버리고, 空을 받아들였으니
머리는 텅비고 눈은 흐려 世上이 흘러가는 理致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것이며
世上의 因緣에서 멀어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自身을 發見하게 될 것이다.
世上에서 가장 重要한 것은
발을 딛고 사는 現實이며, 世上이 흘러가는 事實的인 理致이니
事實이 아닌 것에 執着하면 삶이 虛荒하게 되며
世上이 흘러가는 理致를 어기면 삶이 不行해지는 것이다.
요즘 젊은 時節에 잘못된 觀念이나 이상한 단체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事實이 아닌 幻想에 빠져 理致에 맞지 않은 삶을 살게 되면
한치도 어김없는 因果의 法則이 주는 人生의 패배자라는 膳物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自身이 허황된 幻想과 거짓에 빠져 살았음을 알게 된다.
잘못된 觀念에 빠진 사람들은 삶도 修行이며 冥想도 修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分明히 말하거니와 冥想은 人生을 닦는 것이 아니며 單純히 마음을 보는 技術에 불과하다.
사람은 삶을 通하여,
人生의 意味와 價値를 배우고,
欲望과 習을 버리며,
맑고 강한 精神을 얻을 때, 眞定한 修行을 하게 되는 것이지
冥想을 한다거나,
소리(音)나 빛(光)에 集中하거나,
氣를 돌려서는 결코 自身의 精神을 닦을 수가 없다.
조용히 冥想에 들어 모든 刺戟을 끊고 自己 마음(心)을 들여다보면
흙탕물이 가라앉듯이 욕망의 흐름이 가라앉고
그 위에 맑은 마음이 고여 宇宙의 모습과 法이 비치는 現狀이 나타난다.
修行者들은 이러한 마음의 고요 속에 비치는 神秘를 보고
마치 깨달음을 얻은 듯이 生覺하여 見性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갖고 있는 작은 신비를 일시적으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解脫心을 얻은 것이 아니다.
이 狀態는 世上과 因緣을 끊고 고요히 앉아 있음으로 業이 活動力을 잃고 잠시 가라앉은 狀態이기 때문에
다시 世上 因緣을 만다면 業이 活成化되어 마음이 온통 흙탕물이 되고 만다.
그러나 正覺을 얻은 者의 解脫之心은 業이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쌓여있는 모든 業의 뿌리를 뽑아내어, 다시 헝크러질 먼지 自體를 지워버린 狀態이기 때문에
아무리 흔들려도 더 이상 흐려질 것이 없으며, 行住坐臥 語默動靜간에 恒常 眞如가 빛나
世上 모든 일(事)이 그 위에 비쳐, 모든 法을 보고 智慧를 밝히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선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보림행을 하거나 면벽 구년을 하였으면서도
결국 세상에 아무 빛도 전하지 못하고 말없이 스러진 것은
그들이 흙탕물이 가라앉은 마음의 고요만 보고
모든 흙먼지가 사라진 밝게 빛나는 眞情한 般若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結果를 빚은 가장 重要한 理由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永遠한 法則인 因果法에 어긋난 修行으로
수많은 生을 通해 實質的으로 쌓아온 事實的인 業을 無視하고
조용히 앉아 아무런 原因도 짓지 않고 生覺만으로 이를 지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이 世上의 理致이다.
따라서 수많은 覺者가 나타났다는 東洋社會에 아직도 幻想과 어둠이 넘치고
사람들의 삶이 無知와 苦痛 속에 헤매는 것은
아직 世上을 밝히는 부처님과 같은 正覺이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明白한 證擧인 것이다.
요즘 많은 修行團體에서는 唯識論의 基本 觀念과 論理를 이어받아
모든 것이 空하고 마음 조차도 幻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 修行法으로
더 以上 求할 것도 없고 걸릴 것도 없는 大自由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虛空을 보고 마음의 喜悅을 얻은 들
慧解脫을 얻어 實狀을 보는 눈을 얻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眞情한 깨달음은 法과 智慧로서 證明되기 때문이다. 眞情한 깨달음이란, 나 혼자만의 기쁨이나 자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世上의 理致를 밝히고, 衆生을 祝福하는 智慧를 發輝함으로써
비로소 그 意味와 價値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들은 世上을 밝히는 智慧가 없는 解脫은 正覺이 아니라는 지적에 대해
世上은 無明의 所産으로 모두 幻에 불과하므로, 더 以上 世俗에 얽매지 않는다고 하며
世上 모든 것이 그대로 佛性이고, 모든 衆生이 다 깨달은 存在이므로
더 以上 求할 것도 안타까워할 것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주위에서 처절하게 아파하는 수많은 이웃을 두고
모든 것이 부처이고, 佛性이며, 幻이라고 誤導하며, 혼자 悅樂에 머무는 것은
非良心的이며, 事實을 無視하는 錯覺이다.
부처님이 非相非非相處에 이르렀으면서도 보리수 아래서 목숨을 건 修行을 한 것은
衆生들의 아픔을 곁에 두고 혼자서 悅樂을 즐길 수 없었기 때문이며
나의 경우에도 百會가 열리는 황홀감 속에 걸리지 않는 安樂을 누렸지만
그곳에 머물 수 없었던 理由는 이웃의 아픔을 두고 혼자만 喜喜樂樂하는 것은
良心이 容納하지 않는 유치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동양에서는 數千年동안 이러한 論理와 觀念에 依해
많은 修行者들이 世上을 버리고 혼자만의 기쁨에 머물렀기에
그들은 삶이 世上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自己 人生을 쭉정이로 만드는 愚를 범하였던 것이다.
觀念的인 末法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世上이 空이며 幻이라고 自身마저 던져버리면
이때 主人이 사라져 버린 텅빈 意識 속에 自我喪失과 自我完成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實狀은 正反對이며 그 差異는 天上과 地獄의 差異만큼 큰 것이다.
요즘 이러한 잘못된 觀念과, 空鬼의 영향으로, 수많은 求道者들이
自我와, 良心과, 理致를 버리고, 미치광이처럼 사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와 같이 自我를 喪失하면, 눈앞의 일을 보고서도 알지 못하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고 만다.
이처럼 불교는 正법 以後 數千年이 흐르면서
기본교리에서부터 수행법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하게 變質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불교를 통해 참된 진리와 생명의 빛을 얻고 해탈로 나아가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變質된 法은 거짓된 法보다 危險하다.
거짓된 法은 사람들이 미리 알아 境界하지만
變質된 法은 自身도 모르게 감염되기 쉬운 까닭이다.
變質된 法은 상한 飮食과 같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問題가 없으나 먹고 나면 生命에 致命的인 충격을 주듯이
變質된 法도 겉으로는 아무 問題가 없으나
그 內容 하나 하나가 삶의 方向을 根本的으로 誤導하기 때문에
人間의 精神을 病들이고 삶을 亡치게 하는 것이다.
肉體가 病드는 것은 한 몸이 消滅하는 것에 그치지만
精神이 病들게 되면, 病든 生覺과 習이, 世世生生 그 靈魂을 갉아 먹어
人間으로 태어난 意味와 價致를 亡치고, 輪廻의 種子마저 消滅시키는 最惡의 結果를 招來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한번 世上의 實狀과 理致를 밝힌 부처님의 正法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부처님 法 中에 事實과 理致에 根擧한 가르침을 찾아 이를 根本種旨로 삼아야 한다.
부처님 法은 幻想과 無知와 거짓을 깨고, 實狀과 理致를 밝힌 것이기 때문이다.
이 世上이 完全한 法界라는 것,
完全한 自然法인 因果의 法則이 한치의 誤差없이 世上을 이루고 있다는 것,
모든 것이 持續的으로 輪廻하고 있다는 것,
人間에게는 完成의 境地인 解脫이 있다는 것,
이 世上은 原因과 結果의 連續體로서 모든 것이 반드시 原因과 結果가 있다는 것,
原因과 結果의 變化 속에 모든 變化를 일으키는 主體인 나(自我)가 있다는 것,
惡한 일(事)에는 반드시 나쁜 原因이 있고 좋은 結果에는 반드시 좋은 原因이 있다는 것,
眞理를 배우고 行하면 반드시 人間完成이 온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眞實이며 眞理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도 善과 惡을 밝혀 모든 惡은 짓지 말고 모든 善은 熱心히 行하며 마음(心)을 淨化하여 人間完成의 경지인 解脫에 이르라고 共通的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불교에서 이러한 실상에 입각한 사실과 자연의 흐름에 따른 진리를 모은다면
다시 한번 부처님의 正法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 보람있고 참된 삶을 이루며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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