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시인은 듣던 대로 능변가였다. 2시간 30분간 이어진 대담에서 쉼없이 화두를 이어갔다. 문명사적 전환, 동학사상, 국제정치, 경제, 문화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화법은 인상적이었다. 때론 유머와 비속어를 사용하며 대중에 웃음을 안겼다. 14일 해운대문화회관에서 열린 '북콘서트'에서였다. 북 콘서트는 김지하 시인의 시집 '시김새'(신생) 발간을 기념하는 자리.
그는 부산의 시 전문계간지 '신생' 관련 시인들과 인연이 깊다. 이날 대담에서도 그는 부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줬다. 그중 하나가 "부산이 아시아 네오 르네상스의 중심이 돼라"는 것이었다. 그는 7년 전 동아시아 태평양 경제전문가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들려줬다. 세계 경제 허브가 서(대서양)에서 동(태평양)으로 이미 이동했다고. 그는 "대서양 문명의 중심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이었다"며 태평양 문명의 중심인 '동로테르담'은 부산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말했던 '남진원만 북하회(南辰圓滿北河回)'란 구절을 들었다. '남쪽 별이 원만을 얻으면 북쪽 강물이 방향을 바꾼다'는 말이다. 남쪽에서 진정한 개벽의 별이 뜨면 기존 문명인 '세계의 북쪽'의 뒤틀린 문명사적 경도가 바뀔 수 있다는 것. 그 개벽과 역동의 시작은 반도 남단에서 이뤄지며, 그 중심이 부산이라고 했다. 거대한 우주적 시각으로 문명의 전환을 바라본 것이었다.
해운대 동백섬의 모습이 '바다를 바라보는 신령한 거북과 같다는 흥미로운 사례도 들었다. 그는 '영구망해(靈龜望海)'라 일컬었다. 부산이 먼 바다인 태평양 시대를 개척한다는 뜻이다. 프론티어에 선 부산이 사상과 문화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는 K팝과 한국 영화 등 한류 문화의 저력을 실감한다고 했다. 특히 지적이고 자존심 센 프랑스 여성들이 K팝 추가 공연을 요구하는 모습에 감명 받은 듯 했다. 부산도 이런 한류 콘텐츠를 만들어 태평양 문명의 허브가 돼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는 청중에세 "르네상스는 멀리 있지 않고 여러분 안에 가까이 있다"란 화두를 던졌다. 특히 "여성이 세상을 바꾸는 주체가 된다"고 했다. '여성 경제력을 생산 시스템에 반영해야 현대경제가 유지된다'는 폴 크루그먼 등 많은 경제학자의 주장을 인용했다. 여성들이 남성보다 뛰어난 '시장소비 판단력'를 갖고 있기 때문이란다.
오랜 세월 타자로 억압받고 질곡의 삶을 살았던 여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이른바 동학의 핵심인 '모심사상'이다. 여성들이 개벽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한국 민족예술의 핵심미학인 '시김새'와 맞닻기 대문. 판소리의 시김새는 인생의 신산고초를 겪으면서 삶의 슬픔과 고통, 억울함을 삭혀서 내는 깊은 맛의 소리다. 고통 속에서 희망을 찾고 그늘 속에서 흰빛을 찾는 시인은 "오늘날 세계를 휩쓰는 한류가 시김새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했다. 결국, 부산도 여성 중심의 시김새 미학을 펼쳐나가야 한다는 말일까. 시인이 광대하게 풀어낸 수많은 화두는 어쩌면 듣는 이들에게 카오스(대혼돈)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찬찬히 곱씹어보면 혼돈 속에서 코스모스(질서)를 찾을 수 있다. 그 또한 시김새의 미학이리라. 김상훈 기자
'삶의 향기 메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국의 문 (0) | 2012.05.22 |
---|---|
부부 생활법칙 (0) | 2012.05.21 |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 (0) | 2012.05.19 |
[스크랩] 의성 산운마을 작약 (0) | 2012.05.17 |
나 한 줌 흙이었으니 (0) | 2012.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