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황에서 눈을 번쩍 뜨고 보니 석가 세존만 열반이 아니라
나도 열반이요! 나도 열반이요, 산도 열반이요, 들도 열반이요,
전 대지 모두 다 열반입니다.
열반을 알고 보면 석가釋迦것도 아니요, 가섭 것도 아니요,
중생 것도 아니요, 오직 눈뜬 장부丈夫만이 수용할 뿐입니다.
* 세상만사는 무비도
천하만물(天下萬物)이 무비선(無非禪)이요
세상만사(世上萬事)는 무비도(無非道)로다 .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이런 말할 때 언하(言下)에 自己 人生을 깨닫고 부처님 뜻을 척 알고 나면,
全部 모든 物質이 眞理 아닌 게 없고 모든 일(事)이 道 아닌 게 없습니다.
도(道) 속에서 恒常 생활하면서도 도(道)는 부처님이나 도(道)하고
산골 도사님이나 道(도)하는 줄 이렇게 錯覺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먹을 줄 알고, 똥 눌 줄 알고,
잘 때 잘 줄 아는 이것이 바로도(道)입니다.
밥솥이 도(道)를 하루 세 번씩 일러주는 것입니다.
밥솥한테 부끄러운 줄 알고 미안한 줄 알면 거기에 도(道)가 있습니다.
여기 온 사람들이 다 10년, 20년 이상 30년, 50년 밥을 먹어도
밥솥한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미안한 줄도 모르는 작자가
부처님 앞에 와서 넙적넙적 절만 하면 뭐 하겠습니까?
도(道)라는 것은 부처님 뱃속에 들어가도 도(道)가 없어요.
環境과 物質과 여건에서 도(道)가 척척 나오는 겁니다.
내가 한 가지 예를 들어서 말하면,
부산에 석암스님이라 하면 아마 부산 신자는 다 알 겁니다.
돌아가시고 5재를 선암사에서 지낸다고 해서 석암스님한테
신세를 많이 졌기 때문에 5재(齋)에 참석하러 갔습니다.
주지 스님이 ‘스님, 오늘 5재 때 법문하나 해 주시오.’ 해서
내가 법상에 떡 올라가니까 20년 동안 걸망 메고
선방외호(禪房外護) 하신 석암스님 생각이 났습니다.
절에서 내려가면 당감동 다리거리에 거지가 한 사람 있었는데,
‘스님, 스님 한 푼 주시오’ 하면 스님께서 올라갈 때 주고 내려갈 때
주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놈이 많이 컸습니다. 한 번은 석암스님이 걸망에다
뭐를 잔뜩 지고 오니까,
그 거지가 술이 취해 진흙물에 굴러 가지고 ‘대사! 대사!’ 했습니다.
그땐 술이 취해서 ‘대사! 대사, 한 잔 사게.’ 대사가 시줏돈으로
술 받아줄 수도 없고 또 술 취한 놈 술 사줄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거절하니까,
‘대사, 자비심 어데 팔아 먹었노? 한 잔 사게.’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말을 못 따라가지만 술을 사줄 수 없는 형편이라서….
또 진흙물로 홀아비 옷을 자꾸 문대니까 빨기도 귀찮은데….
언쟁 중에 짐은 무겁게 지고 부화가 나서 ‘이 새끼가 왜 지랄이냐!’ 고
욕을 한 마디 탁 하니까. 그 거지가 ,,,술 취한 거지가 하는 말이
‘야! 대사야, 술 취한 거지도화를 안 내는데,
부처님 제자가 거지보다 먼저 화를 내고… 부처님 앞에 너 어이 갈래?’
하는 것입니다
.
거기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가지고 앞이 가려서 엉엉 우니까,
거지도 붙들지도 않고 술사라는 소리도 않고 물러갔습니다.
시주받은 물건을 안 지었으면 석암스님은 거기서 죽었습니다.
시주물(施主物)을 지었기 때문에 내버릴 수가 없어서 선암사 까지
지고 올라가면서 계속 통곡했습니다.
또 시주물을 부엌에다 져다 놓고 자기 방에 들어가서
사흘을 울고 나서 석암스님 얼굴에 화(火)를 안내고 살았습니다.
당감동 다리거리 술 취한 거지한테 한방 크게 맞고
석암스님이 사람이 된 겁니다.
그러면 살 줄 아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살 줄 아느냐?
하루에 24시간, 8시간 자고 8시간 놀고 8시간 일하고 하면 24시간인데,
한 時間씩만 自己가 뭔가 인생을 한 번 돌아보는 겁니다.
사람은 20년 크고, 20년 동안 여물어지고, 사십이 넘어가면
눈썹도 하나 희어지고 머리도 하나 희어지고 이빨도 하나 흔들 해져
나사가 늘어집니다.
40대부터 늘어져 가지고 20년 내려가면 육십.
육십 내려가면 그 다음 20년은 들어갈 준비해야 됩니다.
천 년 만 년 살 거라고 기대 걸지 말고, 정말 몇 십 년 보장할 수 있는
계약서도 없는 이 몸을 태산같이 믿고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어요!
限定되어 있습니다. 이건 생물(生物)이야!
이 生物을, 自己 生물, 몸뚱이 管理하는 법도 모르는 작자가
부처 된다고 왔다 갔다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몸은 물질(物質)이야! 物質은 따뜻한 기운, 물 기운, 바람 기운,
이 세 가지가 멀어지면 끝장나는 겁니다.
그러면 염불(念佛)을 많이 하면 극락(極樂)간다고 하지만은
죽은 뒤에 극락 가려면 반드시 내 발로 걸어 다닐 때, 내 눈으로, 두
눈으로 똑똑히 볼 때, 극락세계가 어디 있는지, 가는 길은 어느 길인지,
가긴 누가 갈 건지,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 짓지 못하고,
자기 발로 걸어 다니고 지 눈을 떠 가지고 있을 때도 못 가는 작자가
죽을 때 당황해서 천지가 아득할 때, 극락세계 간다는 것은
서울 김서방네 집 찾아가는 격입니다.
막연 漠然 하게 어디로 갈 거냐는 것입니다.
그런 공짜 念佛 그만하고 뭔가 한 번 生角해봐야 될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염불하는 것도 부처님 부르는 때도 부르는 이유가 분명히 서야 됩니다.
왜 부르는지, 무엇 때문에 부르는지, 반드시 부르면 한 번 불러서
안 나오고 두 번 불러서 안 나타나면 세 번 만에는 삼천대천세계가
둘러꺼지게 불러 가지고 부처님을 만나 봐야 합니다.
삼천대천세계가 바깥 세계가 아니고
내 탐심(貪心), 내 진심(瞋心), 내 치심(癡心)이 다 무너지고
마음의 門이 탁 열리면 자성극락(自性極樂) 아미타[阿彌陀]요,
自己 性品이 바로 극락세계가 됩니다.
自己 마음이 바로 부처라, 반드시 부를 때는 만나볼 각오가,
목적과 기대와 희망이 서 가지고 척 불러서 하루 한 마디씩 불러,
3일만에 완전히 만나보고 끝장을 내야 합니다.
始作했으면 結論이 나와야 되는데, 천 년 만 년 불러도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집에 손자가 할아버지 할머니 열 번만 계속 부르면
‘저놈의 새끼, 왜 자꾸 쳐 부르기만 하느냐’고 작대기 들고 나갈 겁니다.
우리 부처님은 너무 착하고 점잖아서 매일 불러도 화도 안 내고
가만히 있는 것은 워낙 점잖으니 가만히 있습니다.
나부터라도 다른 할아버지라도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부르는 目的이 分明히 있어 가지고 부르면, 확실히 세 번 불러서
척 만나 놓고 보면 정말 자아[眞我]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부른다는 개념은 그렇게 불러야 합니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