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道에 대해서 生覺해 본다. 요즘 정치권에서도 중도실용주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중도는 부처님 가르침의 核心이다. 부처님 첫 설법의 중심 내용은 中道였으며, 불교사상사의 흐름 속에서도 中道는 스펙트럼을 달리하며 불교를 새롭게 수놓았다. 禪에서도 역시 中道는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간화선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화두 또한 中道의 구조로 설명된다.
스팩트럼 달리하며 불교 새롭게 수놓은 ‘중도’
中道는 兩極端을 떠나는 것이며 調和로운 삶의 樣式을 일컫는다. 그것은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는 最上의 狀態를 말한다. 그 최상의 상태에서 身心도 쾌적해지는 것은 물론 事態를 透明하고 맑은 視線으로 보는 眼目이 열린다. 그러한 眼目이 부처님과 역대 조사님들이 世上을 보는 눈일 것이다. 그것은 어둡고 닫힌 視野가 아니라 아침햇살처럼 밝고 열린 視野다.
中道는 갖가지 偏見을 부수고 解體한다. 執着의 壁을 허문다. 執着의 壁은 極端으로 달리기 십상이다.
過有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얘기다. 몸에 좋다고 약을 過用하면 그것이 오히려 毒이 된다. 毒도 適切한 포인트에선 藥으로 作用한다. 善 또한 惡을 품고 있다.
과학적 진리도 한편에서 利益이라면 다른 한편에서는 害惡을 일으킨다. 人類文明을 進步시키는 科學의 發展은 大量 殺傷 武器를 開發해 내고 山川을 오염시킨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승리자의 얼굴 뒤에는 패자의 얼굴이 감추어져 있다.
“世俗的 삶에서 絶對的 眞理는 없다”
얼마 전에 치러진 전국 기초단체장 선거를 보자면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한나라당을 크게 앞섰다. 한나라당을 지지한 사람들은 기분이 우울하고 맥이 빠졌을 게다. 그들은 민주당이 원망스럽다. 아주 꼴도 보기 싫은 것이다. 그렇게 서로 觀点이 다르다. 그 觀点에 따라 善과 惡, 眞實과 거짓, 利害와 損失이 달리 다가온다. 세속적인 삶에서 과연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보는가? 결코 없다.
세속적 진리가 그렇게 相對的이라면, 그렇다면 道德的 眞理나 宗敎的 眞理는 과연 絶對的이고 옳게 作用했는가? 幸福을 가져다주었는가? 歷史上 선(善)과 의(義)라는 明分으로 社會와 國家, 世界를 啓導하고 革命하려 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時代를 멍들게 하고 人類를 戰爭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했는지 살펴볼 必要가 있을 것이다. 또한 도덕주의자의 명분 속에 사람들은 얼마나 위선을 假面을 쓰고 불안해하는지 스스로 돌이켜 보면 잘 알 것이다.
眞理 수호라는 종교적 성전(聖戰)속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다른 思想을 抹殺시켜 버렸는가? 종교마저도 사랑이라는 美名下에 자신만이 진리이고 타자는 악이요 허위라고 주장하면서 얼마나 사람들을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했는지는 역사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自身만이 眞理라는 極端的인 執着의 結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선악, 진위는 ‘나’ 中心의 思惟作用 結果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은 입장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하는 이성적 사유작용이 작용한 결과이다. 理性的 判斷이 介入하는 瞬間, 視野는 흐려지며 어느 한 極端에 빠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善惡의 色眼鏡을 벗어버리고 事態 自體를 客觀的인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眞情한 眞理에 이르는 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善惡의 分別과 判斷을 떠나 참된 眞實에 눈을 뜰 수 있는가?
《덕이본 육조단경》에서는 전하는 사연을 들어보자. 혜능선사는 행자 신분으로 5조 홍인스님의 법을 전해 받고 6조가 된다.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던 일개 행자가 깨달음을 열어 스승의 법을 계승한 혁명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생각해 보라. 홍인스님 문하에는 모든 대중들로부터 촉망을 받는 신수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갓 출가한 풋내기 행자가 후계자로 낙점되어 차세대 리더로 입지를 굳힌 것이다.
아무리 普遍性과 和合, 眞理와 無差別 平等性을 품고 사는 승단에서도 그러한 事件은 容納하기 힘들었나보다. 그래서 혜능선사는 야밤에 傳法의 表示로 받은 가사와 발우를 지니고 그곳을 떠난다. 속된 말로 야밤도주를 한 것이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 추격대가 조직되어 그를 쫒는다. 그 중에서 장군 출신인 혜명이 혜능선사의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고 대유령 고갯마루까지 쫒아 온다. 그러자 혜능선사는 가사와 발우를 던지며 말한다.
“이 옷은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니, 힘으로 다룰 수 있겠는가. 그대에게 맡길 테니 가지고 가시오.” 혜명이 다가가 들려고 했지만, 가사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혜명은 두려움에 떨며 말한다. “저는 진리를 구하러 왔지 옷 때문에 온 것이 아니오. 원컨대 행자께서는 깨달음을 열어 보여 주십시오.” 혜능선가 말한다. “선(善)도 生覺하지 않고 악(惡)도 生覺하지 않을 때, 그대의 本來 面目은 어디에 있는가?” 이 말을 듣고 혜명은 그 자리에서 크게 깨닫는다.
惡 포기하고 깨달음 구하려는 태도가 善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 한 것이 惡이라면 그것을 포기하고 깨달음을 구하려는 태도는 善이다.
이렇게 혜명은 惡에서 善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 狀態로는 깨달음의 世界, 眞理의 世界에
들어설 수 없다. 善惡의 價値 判斷과 分別的 思惟에 물들어 있는데, 어떻게 眞理를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혜능선사는 혜명에게 ‘不思善 不思惡’의 質問을 던져 善과 惡의 價値 判斷을 衝動질하는
生覺의 길목을 遮斷케 한 것이다. 理性的인 分別作用은 물론 그러한 分別을 일으키는
無意識속에 潛在된 生覺의 뿌리마저 끊어 自身을 가두고 있던 단단한 壁을 허물어버린 것이다.
“調和와 均衡이 中道에 가깝다”
글머리에서도 말했지만 中道는 兩 極端을 떠나는 것이다. 是非, 善惡, 美醜, 이것과 저것 등등의
判斷과 執着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事實 兩極端을 떠나 中道의 자리에 서는 것이 쉽지 않다. 무엇을 일컬어 中道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 그리고 어느 지점이 선과 악을 떠난 中道의 地点인가? 적절히 절충한다고 해서 中道는 아니다. 어쩌면 調和와 均衡이 中道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正確한 中道의 地点은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도 알 수가 없다. 그 境地는 말과 生覺을 떠나 있기 때문에 分別과 價値 判斷을 끊은 體驗으로 到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용수보살은 중도를 규명하기 위해 모든 판단작용에 대한 부정에 부정을 거듭했던 것이다. 혜능선사는 또한 그 중도의 길을 선과 악의 분별작용을 차단시키는 일종의 화두로 열어주어 혜명을 깨달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불교는 선악을 떠난 자리를 투명한 눈으로 보라고 한다. 이념과 가치, 도덕과 선으로 사람의 어께를 무겁게 하지 않는다. 반면 기독교는 신의 왕국을 구축하기 위해서 신이 내린 이념으로 오히려 사람의 마음에 족쇄를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이로 비추어 보건대 불자들 또한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傳하되 無條件 불교에 執着하는 盲目的 불교주의자는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명석/조계종 포교연구실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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