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마음의 눈을 뜨자

장백산-1 2012. 11. 3. 21:41

 

 

 

 

마음의 눈을 뜨자

 

 

 

 

마음의  눈을  뜨자

  /성철 스님

 

 

불교에서 恒常 하는 말이

모든 것이 마음(心)이다 (一切唯心)라고 합니다.

마음(心) 밖에는(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心外無物) 동시에

마음(心)이 곧 부처다(卽心是佛) 라고도 합니다.

 

 

 불교는 그 敎理 全切가 八萬大藏經에 담겨있는 만큼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다 봐서야

불교를 알터인데 누가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다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불교를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불교는 모르고 마는 것 아닙니까?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事實 알고 보면 마음“심(心)” 한 字에 있습니다.

가장 簡單합니다.

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음 “심” 한 字 위에 서 있습니다.

마음 “심” 한 字의 問題만 옳게 解決하면 一切의 불교문제를 해결하는 同時에

一切萬法을 다 通察할 수 있습니다.

그런 同時에 마음을 알게 되면 부처를 알고, 마음이 부처이니까

그래서 삼세제불(三世諸佛) 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초지종(自初至終)이 마음에서 始作해서 마음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내가 恒常 “마음의 눈을 뜨자.”

“마음의 눈을 뜨자.”하는 것 아닙니까?
그 뿐입니까.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自己가 먼 천지개벽(天地開闢) 부터

이미 벌써 成佛했다는 事實,

천지개벽 前부터 成佛했으니 現在는 말할 것도 없고 未來劫이 다하도록

成佛한 그대로 임을 알게 됩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結局 자성(自性)을 보는데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成佛하는 方法이 여러가지 있습니다.

관법(觀法)을 한다, 주력(呪力)을 한다, 경(經)을 읽는다, 다라니를 외운다 등등 

온갖 것이 다 있지만 그런 여러가지 方法 가운데 가장 수승한 方法이 參禪입니다.
參禪하는 이것은 자기 마음을 밝히는 이기 때문에

불교에서만 參禪하는 것이 아니고  딴 종교에서도 參禪 많이 합니다.

 

 

參禪 하겠다고 내한테 화두(話頭) 배우러 많이 옵니다.

며칠 전에도 예수교 믿는 사람들 셋이 와서 3,000배 절하고 화두 배워 갔습니다.
그 사람들한테 내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절을 하는데 무슨 조건으로 하느냐 하면 하느님 반대하고

예수 제일 많이 욕하는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도록 그렇게 축원하고 절하시오」
이렇게 말해주면 참 좋아 합니다.

이런 것이 宗敎人의 姿勢 아닙니까.
(우리 종교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좋은 곳으로 가고, 우리종교 안 믿는 사람은 전부다

나쁜 곳으로 가고…)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있습니까.

이것은 神士 아닙니다.

 

 

나를 辱하고 나를 侵害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더 尊敬하고, 그 사람을 더 도우고,

그 사람을 더 좋은 자리로 앉게 하고, 부처님께서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參禪해야 된다는 것은 마음을 닦아야 된다는 것 여기에 對해서는

예수교나 다른 종교를 믿어도 關心을 많이 가질 뿐 아니라 努力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修道院의 아빠스(수도원장)라는 분이 내한테서 話頭를 배운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요새도 종종 오는데 話頭 工夫는 해볼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와서 화두 배운다고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신네들 天主敎에서는 바이블(Bible) 以外에는 무엇으로써 교리의 의지(依支)로 삼읍니까?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의 신학대전(神學大典)입니다.
-그렇지요 그 이야기를 들을려고 하는 말입니다.

아퀴나스가 그 冊을 거의 完成하게 되었을 때

自己 마음 가운데 큰 變動이 일어나서, 그래서 다시는 그 冊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完全히 손을 떼어버렸습니다. 結局 그 冊은 未完成으로 남았습니다만

그래도 그 冊이 하도 훌륭하므로 예수교에서는 그것을

신학교리의 큰 權威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自己 冊이 처음에는 금덩어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썩은 지푸라기인 줄 알고 차버린 그것에 매달리지 말고, 그토록 心境 變化된 그 마음자리, 그것을 한 번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화두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익히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교 사람들도 參禪은 누구든지 해야 된다고 해서 實際 하는 사람이 많은데,

불교 믿는 사람이 도리어 參禪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그 根本 工夫인 선(禪)이란 것을 알아서

이 工夫를 해봐야 되는데 딴 종교에서는 이에 關心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불교를 믿는 사람은 너무 無關心한 것 같습니다.

내가 잘못 보았다면 다행이지만 그래서 딴 종교의 사람을 例로 들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參禪을 하려면 무엇을 根本으로 삼아야 되느냐 하면 話頭를 根本으로 해야 됩니다.
話頭를 배워야 됩니다.

話頭,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마음의 눈을 떠서 確徹히 깨쳐야 알지

마음의 눈을 떠서 깨치기 前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 좋은 法文이 있습니다.

 

오색 비단구름 가운데 신선이 나타나서(彩雲影裏神仙現) .
손에 쥔 빨간 비단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手把紅羅扇遮面)
누구나 급히 신선 얼굴을 볼 것이요(急須著眼看仙人)
손에 든 신선의 부채는 보지 말아라(莫看仙人手中扇


生覺해 보십시오.
神仙이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빨간 부채로 낯을 가리였습니다.

 

神仙을 보기는 봐야겠는데  낯가린 부채만 보고 神仙 봤다고 할것입니까?
모든 법문이 다 이렇습니다.

“정전백수자” (庭前柏樹子)니

“마삼근”(麻三斤) 이니

“조주무자”(趙州無字)니  하는 것은 다 부채입니다.
부채 !

눈에 드러난 것은 부채일 뿐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神仙 본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神仙을 보려면 부채에 가려진 그 얼굴을 봐야지,

빨간 부채를 보고서 神仙 보았다고 하면 그 말 믿어서 되겠습니까?


 

話頭를 참구(參求)하는 根本姿勢가, 話頭는 暗號인데 이 암호 內容을 어떻게 해야 풀 수

있느냐 하면, 잠이 꽉 들어서도 일여(一如)한 데에서 깨쳐야만 풀 수 있는 것이지

前에는 못 푼다는 것, 이것이 根本的으로 딱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을 확실히 뜨면 이것이 見性인 同時에

뜰 앞의 잣나무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란 것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고 많지만,

똘똘 뭉치면 마음 “심(心)”字 한 字에 있습니다.

가장 간단합니다. 마음 “심(心)”字 !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 일체 만법을 다 알 수 있는 것이고,

삼세제불을 다 볼 수 있는 것이고, 일체법을 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 뭐냐 하면 自性을 보는 것인데 見性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工夫 부지런히 부지런히 하여 話頭를 바로 아는 사람,

마음의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냥 “견성하자” “성불하자”하면 너무 불교의 전문적인 것이 되어

一般 大衆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자”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좀 가깝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또 사실도 그렇고.

그래서 “마음의 눈을 뜨자”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가만히 生覺해서 하나라도 좋고 반쪽이라도 좋으니,

실지로 마음의 눈을 바로 뜬 이런 사람이 생겨서

부처님 혜명(慧明)을 바로 잇도록 노력합시다.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