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견성성불(見性成佛)
육조혜능은 말하기를
“나의 이 법문(法門/禪))은 原來부터
무념(無念)을 종(宗)으로 삼고,
무상(無相)을 체(體)로 삼고,
무주(無住)를 본(本)으로 삼는다
무념(無念)은 生覺 속에서 生覺이 없는 것이다.
무상(無相)은 모습 속에서 모습을 벗어나는 것이다.
무주(無住)는 사람의 本性이다.”라고 하였다.
禪의 본질이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無住)라는 것이다.
生覺 속에서 生覺이 없고,
모습 속에서 모습을 벗어나고,
마음에 머무는 곳이 없는 것이 곧 선(禪)이다.
혜능의 이 말과 “모든 모습은 전부 허망하다. 만약 모든 모습이 모습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를 방편으로 이용하여
見性成佛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 본다.
(1) 모든 모습은 虛妄하다
무릇 모습은 모두 虛妄하다. 왜 그럴까?
모습은 分別된 것이고, 모습을 본다는 것은 分別한다는 것이다.
모습은 分別에서 나온 것이므로 虛妄하다. 分別은 망상(妄相)을 낳는 根本 바탕이다.
마치 하나하나의 물결을 分別함으로써 本來 하나인 물을 놓쳐 버리듯이,
하나하나의 모습을 分別함으로써 本來 하나인 마음을 놓쳐 버리게 된다.
本來 물결은 다만 물의 움직임일 뿐이고 물결이란 무엇이 따로 있지 않은데도
물결의 모습에 머물러 물결의 모습만 보게 되면, 眞實을 놓치고 헛것을 붙잡으니 妄想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本來 하나의 마음이 움직여 森羅萬像을 分別하는데도 森羅萬像의 모습에 머물러
森羅萬像의 모습만을 分別한다면, 역시 眞實을 놓치고 헛것을 붙잡으니 妄想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는 “무릇 모습은 모두 虛妄하다.”라고 하였고,
또 “몸의 모습으로는 如來를 볼 수 없다.”라고 하였고,
또 “모든 모습을 벗어난다면 부처라고 부른다.”라고 한 것이다.
“밖으로 分別된 모습을 벗어나는 것이 선(禪)이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定)이다.” - 육조혜능
“밖으로 모습에 執着하면 안의 마음이 어지럽고, 밖으로 모습을 벗어나면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
- 육조혜능
“意圖的으로 깨끗함에 執着하여 도리어 깨끗하다는 망상(妄相)을 내지만,
妄相은 있는 것이 아니므로 執着 역시 虛妄하다.
깨끗함에는 모습이 없는데 도리어 깨끗하다는 모습을 세워 그것을 工夫라고 말하지만,
이러한 見解를 낸다면 自己의 本性을 가로막고 도리어 깨끗함에 얽매이게 된다.” - 육조혜능
“그대는 坐禪을 배우고자 하는가, 좌불(坐佛)을 배우고자 하는가? 만약 坐禪을 배우고자 한다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다. 坐佛을 배우고자 한다면, 부처는 定해진 모습이 아니다.
머묾 없는 法에서는 取하거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대가 坐佛을 따른다면,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만약 앉은 모습에 執着한다면, 그 理致에 通하지 못한다.” - 남악회양
“根源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 이름을 따르고 모습을 좇으면,
迷惑한 生覺이 妄靈되이 일어나 여러 가지 業을 짓게 된다.” - 마조도일
“모두 自己가 한 瞬間 망상(妄想)을 일으켜 거꾸로 모습을 取하여 있는 것이다.”
- 백장회해
“마음은 虛空과 같아서 한 物件도 머물러 두지 않고 또한 虛空이라는 모습도 없다.”
- 백장회해
“다만 중생은 모습에 執着하여 밖으로 求하니 求할수록 더욱 잃는다.” - 황벽희운
“오늘날 道를 배우는 사람들은 自己 마음 속에서 깨닫지 못하고
마음 밖에서 모습을 붙잡고 境界를 取하니 모두가 道와는 어긋난다.” - 황벽희운
“만약 부처를 보고 깨끗하고 밝고 해탈했다는 모습을 만들고,
중생을 보고 더럽고 어둡고 삶과 죽음에 매여 있다는 모습을 만든다면,
이러한 見解를 만드는 者는 강바닥의 모래알 같은 歲月을 지나더라도
마침내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니, 모습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 황벽희운
“道 닦는 이들이여! 참 부처와 참 法은 모습이 없는데, 그대들은 다만 허깨비 위에서 모습을 만들고 있구나. 설사 求하여 얻는다 하더라도 모두가 들여우요 도깨비일 뿐 참 부처는 아니니, 곧 외도(外道)의 見解이다. 眞實로 道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부처도 取하지 말고, 보살․나한도 取하지 말고, 삼계(三界)의 뛰어난 것도 取하지 말고, 멀리 홀로 벗어나 事物의 拘束을 許諾치 말아야 한다.” - 임제의현
“하늘과 땅이 뒤집어져도 나는 다시 疑心치 않고, 十方(宇宙)의 모든 부처가 눈앞에 나타나도
한 生覺 마음에 기쁨이 없으며, 삼악도(三惡道)의 地獄이 문득 나타나도 한 生覺 마음에 두려움이 없다.
왜 그러한가?
나는, 모든 法이 헛된 모습[空相]이어서 變化하면 있고 變化하지 않으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뿐이며(眞空)
만법(萬法)은 오직 식(識)일 뿐이다.(妙有)
그러니 꿈이요 허깨비인 헛된 꽃을 무엇 때문에 애써 붙잡으려 하는가?” - 임제의현
-무진장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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