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장백산-1 2012. 11. 6. 10:04

 

 

              "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出發地를 댈 것이다. 그 前에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自身의 住所나 原籍地를 말할 것이다. 또다시 그 前에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선뜻 입을 열 수가 없다. 부모의 뱃속인가? 本來 없는데 因緣 따라 思惟하는 헛짓인가? 여기서부터 思量分別心이 必要해진다. 각자 자신의 思惟限界를 말할 수밖에 없다. 輪回를 한다든지 創趙主가 보내서 왔다든지 本來 없다든지, 뭐라고 말하던 그것은 自身도 모르는 答辨이다. 설령 그럴싸한 답변을 했더라도 다시 물으면 스스로 무너진다.

 

그럼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目的地를 댈 것이지만 죽어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또 헷갈리기 始作한다. 輪回를 한다든지 救援을 받는다든지 갈 곳이 없다든지 本來 오고감이 아니라든지, 뭐라고 答辨해도 솔직히 自身도 모르는 答辨일 뿐이다. 實際로 自己의 靈魂이 있는지 없는지, 있으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온 곳도 갈 곳도 알게 아닌가? 自身의 實體를 모르고서야 어떻게 오고감에 대해 답변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듣고 배워 아는 知識을 아무리 동원한들 自身이 實際로 모르는데, 正答인지 誤答인지도 모르고 입을 연다면 그는 修行者가 아니다. 自身을 探究하고 眞理를 터득하려는 眞實함이 아니다.

 

석가모니는 가진 것을 다 버렸다. 名譽도 사랑도 知識도 심지어는 生命마저 내놓았다. 석가모니는 다 비웠다. 怨望도 恨도 덜어내고 모든 평선을 뛰어넘어 빈 마음으로 앉았다. 오직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 내가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의혹뿐이었다. 나는 無相無我인 宇宙의 所産이니 참나가 아니요, 온갖 知性과 感性과 緣起에 依해 일어나고 滅하니 또한 내가 아니다. 석가모니의 몸뚱이를 받아들기 以前의 나는 무엇이었으며, 중생의 옷을 벗어던지고 떠날 나는 무엇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다 버리고 다 비워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마음의 實體는 무엇인가?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 坐靜하여 三昧에 들었다. 한 生覺도 일으키지 않았다. 한 生覺이 일어나면 그것이 바로 한 생(生)이다. 이미 일어난 生覺이 마음의 主人이 되어 여섯 門을 열고 온갖 것들을 接觸하여 百八煩惱를 만든다. 知識도 感情도 닥치는 대로 受入하여 이곳저곳에 가득 쌓으며 그 무게에 짓눌려 苦惱한다. 설령 뿌리치더라도 또 다른 한 生覺이 主人이 되어 똑같은 衆生演技놀이를 한다. 結局 거듭되는 生覺으로 數百生 數億生이 겹치고 얽히고 진짜 主人인 참나가 나타나도 알아보지 못하고 문전박대를 하고, 主客이 顚倒되어 끊임없이 六途輪回를 한다. 석가모니는 三昧에 들어 한 生覺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 든 것은 이미 다 들어냈고, 三毒心으로 불타는 火宅에서도 벗어나 텅~ 비어 있었다. 한 生覺도 일으키지 않았으니 석가모니의 輪回는 잠시 쉬는 狀態였다. 가지도 멈추지도 어느 것에 매이지도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한 生覺이 일어난다면 즉시 멱살을 움켜지고 어디서 왔는가를 물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生覺을 일으킨 實體가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빈 마음으로 삼매에 든 석가모니는 여섯 門을 열어놓고 들어서는 한 生覺을 붙들려고 몇날 며칠을 기다렸다. 世上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녘 밤하늘엔 반짝거리는 밝은 별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막 잠에서 깨어나려는 山川 草木들이 道伴으로 華嚴三昧에 들어 있었다. 世上萬事 어느 것 하나 삼매의 밖으로 나가지 않고 同伴三昧에 들어 있었다. 六途輪回가 쉬기에 나지도 죽지도 않는 三昧만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석가모니는 三昧에 든 채 눈을 떴다. 그 瞬間 그를 지켜보던 밝은 별(明星)이 안문(眼門)으로 들어서며 한 生覺을 일으켰다. 그 瞬間 석가모니는 한 生覺을 일으키는 마음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6년 동안이나 삼매의 목로를 놓고 기다렸는데 어찌 그 瞬間을 놓칠 수 있겠는가. 석가모니는 마침내 들어오는 마음을 보았다. 한 生覺이 生起는 것을 잡았다. 이것이 바로 견성(見性)이다. 마음이 生起는 것을 보았다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밝은 별(明星)을 보는 瞬間 眞理를 깨우쳤기에 이를 견명성오도(見明星悟道)라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별을 보았는가? 밤이면 밤마다 하늘 가득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을 보았었다. 그러나 그동안 그 별을 본 것은 이미 한 生覺이 일어나 한 生을 살고 있는 동안의 六途輪回를 보았던 것이다. 그가 슬픔의 生을 살 때는 함께 울어 주었다. 森羅萬相이 이미 만들어진 마음 위로 왔다가 다시 제자리로 갔었다. 그것들은 한 生을 살아가는 중생의 마음 따라 喜怒哀樂의 對相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瞬間 석가모니는 별(星)을 보고 별(星)生覺을 했지 별(別/分別)生覺을 했겠는가. 별(星)을 보는 석가모니의 마음에 이미 다른 生覺이 있었다면 별(星)을 보며 別別 生覺을 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고 별(星)은 별(星)로 나누어 相對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마음은 텅 ~ 빈 三昧였다. 한 生覺도 없었다. 별을 보는 瞬間 드디어 한 生覺이 일어났다. 만약에 그 瞬間에 나무를 보았더라도, 아니면 물소리나 새소리를 들었더라도 그는 똑같이 움켜쥐었을 것이다. 여섯 門 어디로든 들어오는 瞬間 붙들었을 것이다. 한 生覺이 일어나는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마침내 깨우쳤다. 마음의 實體를 보았다. 어디서 오는가를 알았다. 그러니 돌아가는 것도 알았다. 山川草木이 바람결에 이슬을 쏟아 내리며 박수를 쳤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어울려 祝歌를 불렀다. 산짐승. 들짐승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좋아했다. 하늘에서는 꽃비가 흩날리며 大地를 보듬어 주었다. 석가모니는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나도 남이 아니고 죽어도 죽음이 아닌 世上으로 다시 태어났다. 생불생(生不生) 사불사(死不死)니 두 번 다시 輪回를 하겠는가. 드디어 輪回의 사슬로부터 解脫한 것이었다. 이제야 天上天下 唯我獨存이 되었다. 이미 生死의 고리(輪回)를 끊었는데 누가 있어 다시 태어난다는 말인가. 나는 다시 生을 받지 않으리라는 외침이 삼계(三界)에 울려 퍼졌다. 그동안 석가모니의 話頭는 "마음이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였다. 새벽 하늘의 밝은 별을 보는 瞬間 한 生覺이 일어났으니 석가모니의 마음인가. 明星의 마음인가? 그것이 석가모니의 마음이라면 다시 한 生이 始作될 것이니 輪回의 始作이고, 별(星)이 일으킨 마음이라면 보는 이 마다 왜 다르단 말인가. 그것은 석가모니의 마음도 아니고 별(星)이 일으킨 마음도 아니다. 석가모니의 三昧와 별(星)이 만나는 瞬間이 한 生覺을 일으키는데 함께 있었던 것이다. 둘이 共存했으나 한 生覺으로 한 生을 始作하지 않고, 별(星)은 별(星)자리에 그대로 있고, 석가모니의 한 生覺도 그대로 있어 더 以上 한 生의 수레바퀴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本來 無一物뿐인데 因緣에 따라 한 生命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것을 본 者도 없고 보인 者도 없었다. 서로 따라나서지도 않았고, 다른 意味도 付與하지 않았다. 별은 無常이오, 마음은 無娥였다. 無常과 無我로 緣起가 作用했다. 만약에 별이 存在하고 석가모니의 마음에 석가모니의 어떤 마음이 있었다면 그것은 만남이고 보탬이고 分別이니 깨우침이 아니다. 마음이 生起는 것을 捕捉한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生覺 하나가 더 보태진 것이고 煩惱 하나가 늘어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그때 無我였다. 마음이 輪回를 멈추고 三昧에 들어 있었다. 석가모니는 마음의 實體를 보았다.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부모로부터 부여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죽어 가지고 갈 것도 없었다. 그 마음은 부모가 生起기 前부터 있었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에 이미 있었는데 누가 주고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은 實體가 없다. 마음은 支配하는 者도 없고 束縛하는 者도 없다. 오직 한 生覺 일으켜서 스스로 온갖 是非長短을 양념 삼아 業障을 짓고 그 안에 갇혀 世世生生을 輪回하고 있는 것이었다. 석가모니는 깨달았다. 時間도 없고 空間도 없고 마음도 없음을 깨달았다. 時間이 흘러야 生老病死가 생기고, 空間이 있어야 森羅萬像이 形像을 짓고, 마음이 있어야 因緣을 지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時間은 無常이고 空間은 無我고 緣起는 涅槃이다. 일어남도 사라짐도 因緣에 依持할 뿐 生滅하는 實體가 아니다. 한마디로 그가 깨달은 것은 무(無)였다. 그렇다면 宇宙萬像은 무엇이란 말인가. 因果應報에 의한 過程들이다. 時間도 空間도 마음도 虛空에 이는 한점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졌다 할 뿐이다. 석가모니는 5百生 동안 켜들고 다니던 智慧의 등불을 꺼버렸다. 自身이 밝혀든 불빛 밖이 더 어두워진다는 事實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마음도 놓아버렸다. 아무리 尊貴한 것이라도 들어 올리면 生死의 바퀴가 돌기 始作함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석가모니는 마침내 見性한 붓다가 되었다. 깨우침을 얻은 大覺者가 되었다. 석가모니는 한마음도 얻지 않았다. 過去佛도 그렇게 마음의 오고감을 보았고, 未來의 미륵불도 그렇게 見性할 것이다. 過去.現在.未來가 同時 存在이듯이, 過去佛.現在佛.未來佛도 하나다. 宇宙는 가득히 붓다의 몸으로 채워져 있고 三世의 붓다가 하나임을 깨달았다. 過去도 얻은 바가 없이 生覺을 내었고, 現在도 얻은 바가 없이 生覺을 일으켰으며, 未來도 얻은 바가 없이 이를 確認할 것이다. 그러니 三世의 붓다는 깨우쳤을 뿐 아무것도 얻지 않았다. 때문에 석가모니는 훗날 금강경을 설할 때 응무소주(應無所住)이생기심(以生其心)하라고 했다. 마음이 어딘가에 머무름이 없듯이 그렇게 마음을 일으켜 쓰라고 했다. 過去不可得, 現在不可得,

  未來不可得인데

응유소주(應有所住)할 居處가 어디에 있겠는가. 한 生覺을 일으켜 한 生을 사는 어떤 마음에 머물러서 내는 마음은 業障만 늘어날 뿐 見性에 이르지 못한다. 석가모니는 가아(暇我)로 六途輪回하는 衆生들을 放生하여 遷道시키려고 衆生을 向해 내려왔다. 本來無一物인 眞理 속으로 契合되어 버렸다면 그를 法다이 간 여거(如去)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衆生 放生(解脫/解放)을 위해

法다이 내려왔기에 여래(如來)라 부르게 되었다. 정다운 스님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쎈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