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머무는 곳마다 주인되어 진실되게 사는 법(隨處作主 立處皆眞

장백산-1 2013. 1. 25. 14:20

 

 

 

머무는 곳마다 主人되어 眞實되게 사는 法 / 혜국스님


                         

 

머무는 곳마다 主人되어 眞實되게 사는 法 /

隨處作主 立處皆眞

혜국스님


 

가는 곳마다 主人이 된다는 말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내 感程에 속지 않고 내가 내 主人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일은 쉽기로 말하면 참으로 쉬운 일 일 수 있고 어렵기로

말하면 참으로어려운 일 중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自身이 살아온 人生을 돌아보면 肉身, 卽 感情의 덩어리로 된 몸뚱이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넣어주고 성을 내달라고 하면 火를 불같이 내주는 등

感情이 해달라고 하는 대로 感情의 奴隸가 되어 사는 時間이 많지,

참마음이 主人되어 行動을 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八萬四千 煩惱 모든 慾心과 嗔心과 痴心의 어리석은 妄想煩惱가

우리의 主人 자리를 차지하고 내 마음의 主人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임제 스님은 가는 곳마다 主人 되는 世界를 일컬어

“修行者가 부처를 求하면 부처를 잃게  되

 祖師를 求하면 祖師를 잃게 되고

 道를 求하게 되면 道를 잃게 된다”

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떻게 主人노릇을 해야 되고 내 主人이 어떠한 姿勢인가를

잘 表現한 가는 곳마다 主人 되는 世界입니다.

 
貌樣이 있거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거나 무슨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主人자리가 아닙니다. 虛空은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虛空에는 아무런 貌樣도 없고 소리도 색깔도 없기 때문에 이 조계사 법당은 물론

많은 대중들이 다니거나 소리를 질러도 아무런 탈이 생기지 않습니다.

만약 虛空에 貌樣이 있거나 소리나 색깔이 있다면

우리가 마음 놓고 虛空에 依持하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虛空은 먹물을 끼얹어도 물들지 않고 침을 뱉어도 묻지 않습니다.

바로 이 汚染되지 않는 자리를 主人된 자리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몸 안에서 몸이 썩지 않도록 지켜주는 主人公,

法門을 들을 줄 알고 눈을 뜰 줄 알도록 하는

昭昭靈靈한 그 氣運이 내 마음의 主人公일진대

主人을 내버려두고 感情이 하자는대로 이끄는대로,

도적놈 感情이 主人노릇 하도록 가만두어서는 안됩니다.

마음부처라고 하는 法堂에 내 스스로 感情과 欲望의 도적놈을 불러들여

主人노릇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일은 부처님을 믿는 제자라면 있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主人公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를 冷澈하게 돌아보십시오.

얼마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山堂靜夜坐無言(산당정야좌무언) 산당의 고요한 밤에 말없이 앉았으니
寂寂寥寥本自然(적적요요본자연) 적막하고 조용함이  본래의 세계이다.
何事西風動林野(하사서풍동임야) 서풍은 어찌하여 수풀을 흔드는가
一聲寒雁長天(일성한안려장천) 겨울 기러기 한 울음이 장천을 울리도다.

여러분의 눈으로 自身의 눈이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입니다.”(대중)
그러면 마음을 갖고 마음을 보면 마음이 보입니까? “안보입니다.”(대중)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찾으려고 하거든요.

찾으려고 한다는 것은

찾는 내가 있고 찾는 對相이 따로 있을 때만 可能한 일입니다.

自身의 눈으로 自身의 눈을 보지 못하듯이

마음이라는 것은  찾는 主人과 찾는 對相이 나눠진 狀態가 아니고

主와 客이 分離되기 以前  世界입니다.

찾으려고 하면 이미 잃어버리는 것이 되거든요.

 

그래서 부처를 求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를 求하면 조사를 잃게 됩니다.

또 도를 求하면 도를 잃는 것입니다.
요즘 參禪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 急합니다.

그런데 道를 그렇게 빨리 얻을 수 있으면 누가 얻지 못했겠습니까.
또 “요즘 참선을 하는데, 이러이러한 것들이 보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것을 보길 원하는 마음이 아직 남았으니 보이는 겁니다. 그건 그림자지 實相이 아니에요.

보고 싶은 마음의 그림자가 밖에 나가서 黃金色으로도 보이고 부처님으로도 보이고 그러는 것이니 絶對로 현혹되지 마세요. 實相은 눈에 보이지 않는 世界입니다.

話頭가 무엇입니까?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는 話頭가 있는데,

話頭가 庭前柏樹子 이 다섯 글자입니까?

아니면 조주 스님이 ‘庭前柏樹子’하기 前  그 마음 속에 숨겨진 의(意), 입니까?
말(言) 나온 다음의 것은 話頭가 아닙니다.

그 말 나오기 前, 조주 스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여러분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닌 狀態를 話頭라고 합니다.

이 화두는 들어가고 나오는 자리가 아니거든요.

 ‘空’하면 傳해질 소리인데 이걸 알아듣는 사람이 흔치 않아요.

‘뜰앞에 잣나무’라는 소리가 나오기 以前 조사 스님의 그 뜻이 話頭입니다.

疑心을 하기 위한 疑心이 아니라 祖師 스님들이 이미 보여주었으니

마음의 눈을 떠야 할 것이 아닙니까.

마음의 뜨는 方法이 疑情이요 疑心입니다.

話頭라고 하는 것은 그 뜻이 나와 壁이 허물어져버린 狀態를 보여준 것이니까

話頭가 내가 찾아야 할 對相이 아니라 바로 내 自身입니다.

내 自身을 對相化시켜 버린 것이고

찾으려고 하는 놈과 찾아야 할 對相을 둘로 나눠버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뜻을 읽을 수가 없는거예요.

이 狀態로는 百날이 가도 修行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自身의 몸뚱이를 내 것이라고 生覺을 하죠? “예.”(대중)
아니라면 내가 가져가서 밥도 짓게 하고 더러는 팔아서 불사에도 보태고 할테니까.

여러분 몸뚱이가 여러분 꺼라면 마음대로 되어야 하죠. 그런데 맘대로 됩니까?

안되죠? “예.”(대중)

앞으로 여러분 꺼라고 하지를 말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 것이라고 하는 내 몸뚱이도 내 마음대로 안되는데 어떻게

家族들을 내 마음대로 하고 이 世上이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겠느냐.

이 世上이 내 마음대로 되고 내 가족이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거든

마음을 먼저 길들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主人이 되면 眞實되게 살게 된다고 하신 겁니다.
우리가 話頭를 들고 싶어도 내 몸뚱이 속에 있는 煩惱欲望이 

(話頭가)들어오게  가만히 놔둡니까.

여기서 注意해야 할 것은 煩惱妄想과 話頭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点입니다.

妄想煩惱가 일어나면 煩惱妄想을 話頭로 바꾸는 것이로구나, 

卽 煩惱妄想이라는 知能을 가지고 話頭라고 하는 부처를 造成하는 것이니까,

參禪法이라고 하는 것은 이 煩惱妄想을 부처로 만드는 作業이라 할 수 있습니다.

‘煩惱가 곧 菩提’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할려면 話頭를 정말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話頭하는 그 時間 만큼은 내가 나와 같이 춤을 추는 時間이고 부처와 같이 있는

時間이구나. 일어나는 煩惱妄想을 없애버리고 話頭를 하는 것이 아니라

煩惱妄想을 가지고 ‘어째서’ ‘왜’하고 살피다가

조금 더 나아가면 어째서?도 없어지고 왜?도 없어지게 됩니다.

오로지 조주 스님의 意情만 남게 된다 이 말이에요.

이렇게 分明한 것이라면 話頭 修行에 나를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話頭 참선법은 一生을 바칠 가치가 있습니다.

自身의 人生問題는 나만이 해결할 수 있어요.

참나를 찾아 나서는데 무슨 瑕疵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聖人은 씨앗 심는 것을 重要시하지만 衆生은 結果만 얻으려고 합니다.

씨앗을 심지 않으면 結果가 나오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어째서’하고 疑心을 품을 때 그것이 씨앗 심는 것입니다.
그 時間은 부처가 된 것입니다. 이는 話頭가 作用이 된 것이거든요.

거기에 疑心이 가고 잘못될 것이 없는 것처럼 理由를 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컵을 들어보이며)이걸 뭐라고 합니까?
“컵이요.”(대중)

이 컵을 몸뚱이라고 합시다. 이 컵 안에는 물이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는 어떤 물이 있습니까. 妄想煩惱라는 물이 있습니다.

妄想煩惱는 흙탕물이 되어 우리 몸안을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흙탕물이 돌아가듯이 돌아갈 때는 그 안에 찌꺼기가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입니다.”(대중)
여러분이 텔레비전을 보거나 다른 사람하고 말할 땐 그 안에 있는 妄想煩惱가

보일 리가 없습니다. 점점 찌꺼기를 집어 넣고 있으니 오히려 더 커져갈 뿐이죠.

그런데 가만히 놔두면 안에 찌꺼기가 가라앉습니다.

이때는 지금까지 내 속에 있던 찌꺼기가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보여요.”(대중)

 
妄想煩惱는 바깥에서 들어온게 아니라 내 속에 있으면서

主人 行勢를 하고 있습니다.

話頭는 이 妄想煩惱를 볼 수 있을 程度로 가라앉게 해주는데, 대단하지 않습니까?

내 속에 있는 이 妄想煩惱를 話頭로 바꾸는 이게 工夫입니다.

이건 딱딱 맞아 떨어지는 일이라구요.

話頭 드는 修行者는 왜 뜰앞에 잣나무라고 했는지

照思觀을 打破하는 것이 目的입니다.

화두 조사관을 타파하고 道를 깨닫는 걸 목적으로 해야지,

하는 도중에 뭐가 나타나거나 뭐가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세요.

여러분도 오늘부터는 話頭를 등불·스승으로 삼고

話頭에 依持해서 妄想煩惱에 속지 않고 살아가 보세요.
이 좋은 參禪法을 만났으니 話頭에 人生을 바칠 수 있는 씨앗 되기를 바랍니다.

 

현대불교신문사 : 박봉영 기자


'묻고 답하기'

<문> 出家를 하고 싶었으나 세연에 얽매여 출가를 하지 못한 불자입니다.

지금도 출가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출가하지 못한 우리 재가불자들은 어떠한 공부를 해야 하겠습니까?

 

<답> 출가가 그렇게 큰 의미가 있습니까.

몸뚱이는 출가를 했지만 마음은 출가 못한 사람도 있고, 몸뚱이는 출가하지

못했지만 마음은 출가했다고 생각하고 수행자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몸뚱이를 출가못했다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은 출가를 했으니, 진실된 수행자의 길을 걸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세요.

참선법을 출가의 계로 삼고 화두를 스승으로 삼아 공부해 간다면 이미

출가한 사람과 다름없습니다.

<문> 뜰앞의 잣나무’가 話頭가 아니라 그 以前의 뜻, 즉 참생각이 화두라고

하셨는데 참생각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답> 화두라고 하는 것은 當處를 말합니다. 直前자리를 話頭라고 합니다.

참生覺이라고 하면 거기에는 거짓生覺이 存在한다는 것이거든요.

말에 떨어지지 말고 그 뜻에 着眼을 하세요.

제가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전백수자’ 속에 숨겨진 뜻을 話頭라고

했습니다.

 

조주 스님은 이미 뜰앞의 잣나무라는 말과 그 뜻이 둘이 아닌 狀態였습니다.

깨달았을 때 話頭를 바로 보게 되는 것이지요. 깨닫기 以前에 내가 說明을 한다면

나는 허물을 쌓는 것이고, 여러분은 그 말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話頭는 나와 남 또는 主와 客이 둘로 나눠지지 않은 根本자리입니다.

 

장님에게 아무리 虛空을 說明해도 바르게 理解할 수가 없습니다. 虛空을 보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장님이 눈을 뜨게 만들어야겠지요?

說明이 必要 없는거에요.

說明이 붙을 수 없는 자리를 話頭라고 합니다.

장님에게 虛空에 對해 많은 說明을 해줄수록 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문> 참선을 하다보면 전혀 새로운 境界가 나타납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답> 참선을 하다보면 부처님이 환하게 나타날 수도 있고 낙숫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아주 맑아져 빗줄기 소리 하나하나가 달리 들리기도 합니다.

그때쯤 되면 물체와 광명이 보이기도 합니다.

내 몸속에 있는 망상번뇌가 어느 정도 바꾸어졌다는 말이에요.

몸속의 妄想을 話頭로 바꾼 만큼의 世界가 보이는 것이에요.

이 때 보이는 것은 내 몸 안에서 비쳐진 그림자일 뿐입니다.

나한테 없는 것은 宇宙森羅萬象에도 없어요.
劇場에서 映畵보는 것을 비유로 들어보면,

우리는 畵面에 비친 모습에 울고 웃고 하는데 그게 本質이 아닙니다.

 

필름에서 비쳐진 그림자를 보고 울고 웃거든요.

工夫하다가 비친 것도 畵面에 비친 그림자일 뿐이에요.

‘아 이것도 그림자구나’ 하는 生覺도 하지 말고 더욱 細密하게 工夫를 해야 합니다.

어떤 境界든지 내 마음의 그림자니까 境界는 보지 마세요.

 

---------------

해솔님이 올린 글

-무진장-행운의 집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닫고 싶으면 보아라  (0) 2013.01.25
妙法  (0) 2013.01.25
---나누면서 살다 가자---  (0) 2013.01.25
기묘한 형상과 좋은 글  (0) 2013.01.23
고집(固執)  (0) 2013.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