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생물학으로 풀어본 우리 몸의 비밀] 관세음보살님 손은 왜 천수(千手)일까
〈30〉진화의 굴절적응과 손발의 변신
굴절적응(屈折適應: exaptation)이라는 용어가 있다. 진화과정에서 신체기관이 본래의 기능과 다르게 쓰이는 현상을 의미하는 학술용어다. 예를 들어서 새의 깃털은 원래 들짐승의 털과 같이 보온 기능을 하였는데, 나중에는 하늘을 나는 데 사용된다.
요컨대 담요가 날개가 된 것이다. 벌이 산란기관에서 침을 쏘아 적을 물리치는 것이든지, 포유류에서 땀샘이 유선(乳腺)으로 바뀌어 젖을 분비하는 것도 굴절적응의 예들이다. 찰스 다윈은 이런 현상을 전적응(前適應: preadaptation)이라고 명명하였지만 ‘목적론의 오해’를 야기할 수 있기에 최근에는 굴절적응이라는 술어(術語)가 주로 쓰인다.
사지(四肢)의 경우는 더 드라마틱하다.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육기어류의 앞뒤 지느러미가 양서류와 파충류의 네 다리가 되었다. 물을 밀어서 헤엄치던 네 지느러미가, 땅을 밀치고 전진하는 파충류와 포유류의 네 발이 된 것이다.
‘하나 속에 무한이 담긴다’ 화엄의 이치
상황에 맞춰 용도 나타나는 연기(緣起) 결과
포유류 가운데 일부가 포식자를 피해서 나무 위에 오르면서 땅을 기던 네 발이 나뭇가지를 잡는 네 손으로 바뀐다. 엄지발가락이 굵어지고 갈라지면서 영장류의 네 손이 된 것이다. 나무 위에 살던 영장류 가운데 영민하게 진화하여 자신감이 생긴 일부가 다시 땅으로 내려와 직립하면서 뒤쪽의 두 손은 두 발로 회귀한다.
그림에서 보듯이 엄지가 유난히 굵고 평평해진 고릴라와 침팬지 그리고 인간의 두 발이다. 직립하여 땅 위를 걸으면서 앞쪽의 두 손이 더 이상 나뭇가지를 잡을 필요가 없어졌다. 두 손에 여유가 생겼다. 인간의 손이다. 이토록 화려하고 강력한 문명을 창출한 원동력이다.
굴절적응이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의 사건이나 사태 속에 무한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화엄경>에서는 이런 이치를 ‘일중해무량(一中解無量)’이라고 노래한다. “하나 속에서 무한을 해석한다”는 뜻이다. ‘일중일체(一中一切)’ 또는 ‘일즉일체(一卽一切)’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나의 사건이나 사태는 무한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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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류의 발. | | | |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사지(四肢)와 오관(五官) 등 낱낱의 기관에는 무한한 용도가 잠재되어 있다. 육기어류의 지느러미가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계속 그 용도를 바꿔갔던 이유는, “하나 속에 무한이 담긴다”는 화엄의 이치가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물속에서는 ‘밀치기’ 땅위에서는 ‘딛기’ 나무위에서는 ‘잡기’로 변한다. 상황에 맞추어 그 용도가 나타났던 것이다. 연기(緣起)한 것이다. 그러다가 나무위의 영장류가 땅위로 내려와서 직립보행하면서 두 손이 해방되었다. 나뭇가지를 잡는 부속기관의 숙명에서 벗어난 것이다.
인간은 이런 손을 모든 일에 쓰면서 짐승의 세계에서 최강의 포식자로 등극하였다. 도구를 만든다. 신호를 보낸다. 박수를 친다. 남을 보살핀다. 음식을 만든다. 약을 바른다. 집을 짓는다.…그림을 그린다. 실을 잣는다. 글씨를 쓴다. 자판을 두드린다. 온갖 도구를 다룬다. 관세음보살님의 손이 천수(千手)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교신문 2846호/ 9월8일자]
김성철 교수(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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