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本來無一物 本來無生死

장백산-1 2013. 4. 4. 12:31

 

 

 

 숭산스님 법어 법문 3

 

     

     

    생야사야(生也死也), 本來  한 物件이 없는데

     

    무엇이 생(生)하고 또 무엇이 있어 죽는단 말인가?

    서산(西山)대사의 게송(偈頌)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닭소리를 들으니 丈夫 하는 일을 모두 마쳤도다.”
    이 장부의 일이란 바로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를 이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생(生)이고 사(死)냐.

    내 '몸'을 가지고 ‘나’라고 生覺하기 쉬우나, 내 몸은 分明 '나'는 아니다.
    다만 '나' 라고 生覺할 뿐, 그러니 먼저 '나' 를 밝히자.

    무엇인가  나의 몸을 끌고 다니는 것, 그것이 어떻게 생긴 物件이냐.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종하처거(死從何處去).”

     

    생(生)이 온 곳이 있다면  가는 곳도 있을 터,

     

    生이란 虛空에 뜬구름과 같다고 했다(生也一片浮雲起). 그러나

     

    恒常 뚜렷이 드러나는 한 物件, 그것은 虛空에 뜬 구름과는 다르다.

    맑고 깨끗해서 生死에 따르지 않는 特性을 지녔다.

    (獨有一物常獨露  湛然不隨於生死)

     

    다만 없는 生死를  있다고 生覺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原來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해와 달과 별도  人間이 그렇게 이름으로 불러서 있는 것이지

    生覺을 내지 않는다면 모든 物件의 이름조차 없다.

    무릇 宇宙森羅萬象의 이름을 生覺으로 지었으니까 그 生覺이 끊어지면

    중생이나 부처님이나 이 주장자 소리나 똑같은 것이다.

     

    “입차문래(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하라.” 이 門안에 들어오면

     

    生覺을 내지 말라. ‘나’라는 物件을 쥐꼬리만큼도 生覺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텅~ 빈 것인가?

     

    生覺 않는 自體란 生覺 以前의 根源의 世界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事物의 本性이 여기에 뿌리를 두고있다.

     

     

     

    티끌 하나 하나가 묘체(妙體)를 지니고 있으며,

     

    마땅히 다 具足되어 있다고한 조사의 말과 같이

     

    森羅萬象의 이름은 各各의 그 本性은 똑같은 것이다.

     

    卽 生覺이 비어 있다는 것은 大宇宙와의

     

    同一體 (혹은 統一體· 全一體· 純一體라고도 한다)化된 것의 이름이다.

     

    生覺을 일으키면 안 되지만 끊으면 된다.

     

    그러면 生覺을 어떻게 끊느냐?.

     

     

    “이 뭣고?”

     

    生覺이 꽉 막히고 커다란 疑心덩어리를 끌고 들어갈 때에는

     

    벌써 하나의 原點에 이른 것이다. 生覺이 끊어진 그 자리이다.

     

    이 原點을 마음이니, 부처니, 眞如· 如來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지만

     

    事實은 이름이 없는 것이다.

     

    大宇宙와 '하나'가 되었을 따름이다.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입을 안 열고 어떻게 對答할 것인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했다. 영산회상에 앉아 1천2백 대중을 향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인 부처님에게 염화미소(捻花微笑)를 했다는

    마하가섭존자처럼 말이다.
    내가 주장자를 들어 보이는 것과 2천여 년 전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인 것은 같은가, 다른가. 森羅萬象은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했다.

     
    그러면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어느 제자가 조주스님에게 물었을 때,

    조주스님은 무(無)! 라고 대답했다는데 이때의 ‘無’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西區 文化는 곧 基督敎文化이다. 이 속에서 모든 思想과 主義가 다 나왔다. 이른바 하나님과의 契約에 依해 人間의 自由와 平等을 爭取한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으며 그 本領인 人本主義 思想은 共産主義라는 社會革命과

    資本主義라는 産業革命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두 갈래의 커다란 社會 變遷이 가져다 준 것은 人間의 機械化와 이로 因한 倫理道德의 墮落이다. 天倫이 끊어진 狀態에서 極度의 個人主義와 營利主義가 판치는 物質文明은 環境公害라는 새로운 對適을 만들어 냈으며 人間性을 탈취당하고 말았다.


    지금 美國의 젊은이들은 입으로는 世界平和를 부르짖으며 뒷전으로는

    가공할 核武器를 만들어 내고 있는 기성세대를 향한 不信이 깊다.

    大自然과 함께 살자는 命題 아래 탈취당한 人間性 回復을 부르짖고 나선

    젊은이들 사이에 東洋의 禪思想이 人氣를 끌고 있는 理由도 여기에 있다.
    이제 禪은 불교의 專用物이 아니다. 종교를 超越해서 누구나 다 反省하고 ‘生覺을 쉰다’는 소승선(小乘禪)의 境地까지는 들어간 셈이다.

     

    “만법이유심조(萬法而唯心造)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인 현상계가 오직 마음의 작용인 것이다.

    시공(時空)조차 고전 물리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絶對的인 것은 아니다. 現在란 存在할 수 없기 때문이며 東西南北이 다를 뿐더러 百 사람이

    무지개를 보고 느끼는 感覺 또한 各各 다른 理由다

    .
    “아유필유 아멸필멸(我有必有 我滅必滅)이다.”
    '내'가 없어지면 宇宙와 나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宇我一如)
    몸 속에 매달렸던 무거운 돌로 꽉 막힌 그 자리에서 문득 깨달았다는

    대법안(大法眼)의 一話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실로 크며

    ‘심즉불 불즉심(心卽佛 佛卽心)’을 금과옥조로 삼던 그 제자 현축도

     “부처란 무엇인가?”라고 다시 묻는 스승의 깨우침에

    무릎을 꿇었다지 않던가.

    모든 事物과의 關係를 定常化시키는 것이 곧 佛敎요, 禪의 本旨이다.

    나를 내 마음속에 끌고 다니지 말고  環境에 執着하지 말라.

    그래야 올바른 生覺을 하게 되는 法.

    見解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싸움질을 하게 되고 定常化가 안 되는 것이다.
    見解를 버리면 즉 ‘나’라는 것을 없애면 大自然의 破壞도 아니하게 되고

    世界平和도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 가전충효님이 올린 법문
    -무진장 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