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空의 冥想'으로 自由로와지기

장백산-1 2013. 4. 23. 21:44

 

 

 

 

한 거사님의 고민(苦悶)은 進級에 대한 不安에 있고,
한 보살님의 苦悶은 事業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있다.

거사님은 토끼 같은 子息들 공부라도 다 시키려면
어떻게든 끝가지 버티면서 進級에 목메지 않을 수가 없다.
또 보살님은 벌여 놓은 事業이 왜 神通치 않은지
날이 갈수록 苦悶만 쌓인다.

 

그런데 어느 날 說法을 듣고,
放下着에 對한, 無執着에 對한,
그리고 空의 冥想에 對한 가르침 대목에서
큰 깨달음이 있었다.

조금 내려 놓으니 答이 없었던 것이,
完全히 내려 놓아 보니  시원한 答이 나왔던 것이다.

 

子息들 공부 시키고, 마누라 月給도 갖다 줘야 하고,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進級도 해야 하고,
특히, 子息 공부 끝날 때 까지는 抛棄할 수 없다고
끝끝내 抛棄할 수 없었던 進級, 職場에 對해
完全히 내려 놓아 보았더니,
그래도 죽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進級 못 하면 우리 家族 다 죽는 줄만 알았고,
다른 解決策이 없을 줄만 알았고,
進級만이 살 길이라고 生覺해 왔는데,
그것만은 끝까지 抛棄할 수 없는 것이라 生覺해 왔는데,
事實,
정녕,
결정코,
그런 것인가?
결코 進級 없인 안 되는가?
하고 냉정하게 물어 보았더니, 그렇지는 않더라고 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進級 까짓거 안 되면 어떻게든 죽으라는 法이야 있겠느냐 하는 마음으로,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는 마음으로 내려 놓아 보았더니,
끝까지 抛棄할 수 없었던 것 같던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기가 한결 수월해지더라는 것이다.

 

보살님도 마찬가지다.
事業 抛棄는 있을 수 없다고, 내가 어떻게 일구어 온 것인데,
어떻게든 한 번 빛을 보고야 말 것이라고,
끝끝내 抛棄할 수 없었던 事業인데,
‘이걸 놓으라고?’
‘絶對 그럴 수 없어’
‘스님이 뭘 안다고 놓으라는거야? 남 事情도 모르면서’
‘그것만은 絶對로 안 된단 말이야’하고 끝까지 抛棄할 수 없었던 事業,
그것을 까짓거 마음으로인데 어때 하고 받아들이고 났더니,
까짓거 놓아볼 勇氣가 생기더란다.

 

그래 내 事業, 내가 젊었을 때부터 일구어 왔고,
어렵게 어렵게 이렇게까지 끌고 왔는데,
한번 크게 成功도 못 하고, 本錢도 못 찾고,
남들에게 成功했단 소리도 못 듣고,
여기서 끝내라고?
絶對 할 수 없을 것만 같더니, 한 번 놓아 보자는 한 生覺에
내려 놓고도 살 수는 있을 것 같더란다.

억울하지만, 그리고 아깝지만, 까짓거 내려 놓을 수도 있겠더란다.
그렇게 내려 놓고 났더니, 그제서야 속이 후련해 지더란다.

 

이제까지 그 事業으로 因해 속끓이고, 골치 썩이고, 괴로워하고,
자식들과 놀아주지도 못하고, 신경도 못 써주고,몸도 못 돌보고, 못 먹는 술도 먹어야 하고,
그 모든 것들이 까짓거 한 번 놓겠다는 마음 내 보았더니,
못 놓을 것도 없고,오히려 속이 후련해지더라고 한다.

 

그런데 더 重要한 事實은,
그렇게 마음에서 짐을 내려 놓고 나면,
實際 抛棄한 것은 아니더라도 마음은 훨씬 便安해 지고,
自由로워지고, 얽매임이 훨씬 줄어들게 됨을 經驗한다.

이것 아니면 안 되겠다던 生覺들이 놓여지면서, 훨씬 餘有가 생기고,
잘 안 되더라도 一喜一悲 하지 않게 되고,
조금 잘 되더라도 쉬 들뜨지 않게 되면서,
조금 더 크게
自身의 事業에 對해 볼 수 있는 眼目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執着하게 되면, 그 執着이라는 좁은 所見에 갇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넓은 視線으로 客觀的으로 自身을 보게 되는
智慧로운 눈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가 될 지는 모를지라도, 내려 놓아야 할 때가 온다면
미련 없이 ‘그래 내려 놓고 말지’라는 큰 한 生覺을 내고 나면
오히려 그 일에 對한 智慧와 洞察과 餘有가 생기는 法이다.

이게 바로
내려 놓아야 더 크게 잡힌다는 道理다.


물론 微妙하게도,
내려 놓으면 더 큰 것을 잡을 수 있겠지 하는 生覺과 計算은 또 다른 어리석음이며,
더 큰 것을 붙잡겠다는 無明일 뿐이다.

完全히 내려 놓아 보면, 想像할 수 없는 큰 功德이 있다.

自由로움이 있고,
智慧가 있고,
餘有가 생겨나고,
洞察과 直觀이 깨어나며,
나만이 아닌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慈悲로움도 생겨나고,
每 瞬間의 現在를 살아갈 수 있는 힘 또한 생기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크게 한 번 내려 놓는,
그래서 本來 아무 것도 없었던

‘무(無)’, ‘공(空)’ ‘Zero (ㅇ)’로 돌아가 보는 冥想이다.

 

 

 

진짜로 事業을 抛棄하는 것도 아니고,
進級을 抛棄하는 것도 아니고,
삶을 抛棄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執着을 내려 놓음으로 因해,
붙잡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는 참된 無所有를 通해,
空의 實踐을 通해
더 큰 智慧와 사랑과 洞察이 열리는  貴하디 貴한 冥想인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내려 놓아야 하는지 조차 모르고,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
놓으려면 어떻게 내려 놓아야 하는지를 모른다.

과연 나는 무엇을 잡고 있고,
또 무엇을 어느 程度까지 내려놓아야 할까?
그리고 執着을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 ‘공(空/ㅇ)의 冥想’이 있다.

 

누구나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하나씩 둘씩 붙잡고 執着하며
執着과 所有의 굴레에 사로잡힌 줄도 모른 채
무거운 執着의 束縛에 갇히곤 한다.

처음엔 작게 始作되었던 執着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다 보면
그것이 어느 새 늘어난 줄도 모르고
執着의 무게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初等學生 時節에는
백 원짜리, 오백 원 짜리 동전 하나만 있어도 행복하다가,
대학생 때 쯤에는 몇 만원 쯤은 있어야 행복해지고,
직장생활 초년생 때는 월급 100만원에도 행복해지지만,
점차 월급도 연봉도 많아지면서
연봉 5,000만원, 7,000만원, 1억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不足하다고 여기는 自身을 發見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慾心과
滿足할 줄 모르는 執着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때때로 ‘空性의 冥想’을 通해
내가 지금 어느 程度의 執着의 굴레에 갇혀 있는지,
내가 執着하고 있는 무게가 어느 程度인지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물론 所有하지도 말라는 말이 아니다.
所有하되, 거기에 所有 당하고 있는 크기가 어느 程度인지
늘 깨어있는 精神으로 알아차리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空性의 冥想은 무엇일까?

말 그대로 ‘0 (Zero/零)’으로, 

卽 ‘무(無)’, 아무 것도 없음의 공(空ㅇ)으로 돌아가 보는 冥想이다.

우리가 처음 이 世上에 왔을 때,
그리고 生을 마치고 떠나가야 할 때,
우리가 本來 나왔던 바로 그 자리가 바로 空의 자리다.

이 나온 空의 자리로 아주 생소하게, 낯설게,
‘나’라는 모든 수식과 定義와 規定들을 完全히 내려 놓고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무아(無我)의 나로 돌아가 보는 것이다.

 

우리가 나온 자리는 어디인가?
처음 우리가 이 世上에 올 때 어떤 存在로 왔는가?

아무 것도 없는 無의 存在로 왔다.
所有한 바도 없었고, 執着한 것도 없었으며,
이루어야 할 꿈도 없었고, 커서 무엇이 되리라는 目標도 없었다.

銅錢  한 닢도 없었고, 돈도, 차도, 집도, 執着할 사람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알몸 하나 달랑 가지고 태어나 每  瞬間瞬間의 삶을 살았을 뿐이다.
過去에 대한 미련이나 後悔도 없었고,
未來에 對한 計劃이나 어떤 두려움도 없었고,
오직 이 瞬間을 누리는 感覺만 있었을 뿐이다.

이 자리가 바로 空의 자리다.
바로 이 空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 보는 것이다.

 

내가 문득 낯선 旅行地에 섰을 때,
히말라야 高地에 홀로 우뚝 서 있을 때,
문득 至今까지 살아 온 삶이 너무나도 낯설고 낯설어,
나의 이름도, 正體性도, 외모도, 학력도, 그 무엇도 잊은 채
그저 廣大無邊한 宇宙空間 속의 空이 된 한 存在를 느끼곤 했다.
그 瞬間이야말로 얼마나 自由스러웠던가.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바랄 것도 없고,
그저 그 어떤 수식으로도 定義할 수 없는 텅~빈 한 存在가 自由로이 서 있었다.

 

空의 冥想을 위해,
먼저 自己 自身에 對한 모든 수식과 정의와 규정들을 미련 없이 내려 놓아 보자.

지금 내가 所有하고 있는 것들의 目錄이나,
나를 規定지을 수 있는 꼬리표들을 하나씩 내려 놓아 보는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財産?
까짓, 그것 쯤 하나도 없다고 假定 해 보라.

내 집, 내 차, 내 職場, 내 位置, 내 學歷, 내 외모,
지금까지 살아 온 나의 삶, 나의 가족, 내 자식,내 꿈, 내 미래 비전,

그 모든 것들이 하나도 없었던 本來의 空의 자리로 잠시 나를 데려가는 것이다.

 

完全히 텅~ 빈 ‘제로(ㅇ)’가 되어 보라.
아무 것도 없는 無의 存在가 되어 보라.
그 무엇도 아닌 내가 되어 보라.
말 그대로 ‘0’, 제로가 되어 보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하나 하나 意識으로 내려 놓아 보고,
다 내려 놓은 뒤의 ‘아무 것도 아닌 나’를 가만히 느껴보고 注視 해 보라.

낯선 旅行地에, 아니 낯선 별 위를  홀로 걷는 나그네가 되어
텅~ 빈 지구별 行星 위를 거닐어 보라.

 

아무 것도 아닐 때,
아무 것도 所有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과연 누구인가?

조금 더 具體的으로 들어 가 보자.

당신의 職業? 바로 그 職業을 잃었고, 가야 할 일터가 없다!
돈? 통장 잔고는 ‘0원’ 가진 거라곤 이 몸뚱이 밖에 없다.
집과 차? 물론 없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죽을텐가?
더 이상 살아 볼 도리가 없다고 生을 抛棄하고 말 것인가?

 

물론 어제까지, 아니 조금 前까지 事業이 잘 되지 않는다고 발버둥치고,
進級하려고 안달하며, 자식 성적 때문에 근심걱정하고,
집을 사려면 아직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던
그 ‘나’는 이제 꿈처럼 흩어지고 없다.

 

事業이 잘 되지 않는다고 발버둥칠 일도 없이
職業도 없고, 일터도 없고, 내 事業도 없다!
進級하려고 안달할 것도 없고
進級할 職場도 없고, 地位도 없다!


자식 성적 때문에 근심 걱정할 것도 없이
자식 學校 보낼 돈도 없어 學校를 다닐 수도 없다.
집을 사려고 돈을 더 벌 것도 없이 아예 집도 모아 놓은 돈도 하나도 없다.

그저 당장에 한 끼 입에 풀칠 할 일만도 버겁다.
당장에 오늘 밤에 어디에서 잘 지가 問題다.

그렇게 無所有의 空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
이제 하나 하나 제로(ㅇ)에서부터 다시 生覺해 보자.

 

이제 당신은 어쩔건가?
그냥 다 抛棄하고 말 것인가?

아닐 것이다.
그럴 수가 없다.
그래도 어쨌든 삶은 계속될 테니까.

그런데 이 最惡이라고 生覺했던
텅~ 빈 무(無), 제로(ㅇ)인 空 속에서
生覺지도 못 했던,
놀라운 빛과
텅~ 빈 無所有의 自由함,
無我의 걸림 없는 툭 트인 삶의 길이 열린다.

 

잘 안 풀리는 事業 때문에,
잘 안 되는 進級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걱정하기에 앞서
‘내 삶의 空性’을 思惟해 보라.

‘제로(ㅇ)’인 空性 앞에서
그 모든 問題는 하나도 問題될 것이 없다.
그 때 비로소 完全한 無執着의 自由함을 만끽하게 된다.

 

아무 것도 없어도 삶은 계속된다.

아니, 奇蹟과도 같이
廢虛 속에서 피는 꽃처럼
전혀 새로운 無限한 삶의 可能性들이 일렁인다.

그 제로(ㅇ)의 텅~ 빈 바탕 위에
무엇이든 쌓을 수 있는 自由함이 서린다.
텅~ 빈 도화지 위에는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이제 기쁘고 幸福한 일만 남았다.
完全한 제로(ㅇ), 無所有의 狀態에서라면
무엇을 하든 그 다음 부터는
어쨌든 제로(ㅇ)에서 하나로, 둘로, 셋으로이어지며

幸福에 겨워질 수 있는 可能性들의 場이 펼쳐지는 것이다.

 

누구나 때때로
이런 空性의 冥想을 實踐해 볼 일이다.

누구나 때때로
自身의 삶에 完全한 無所有, 無我라는 텅~ 빈 옷을 입혀 볼 일이다.

子息과 아내가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우린 지금 돈도, 집도, 차도, 음식도 아무 것도 없다.
거기에 家族 모두 배는 고프고 춥다.
그럼 무엇을 하게 될까?

먼저 당장에 먹어야 하고 먹여야 할 飮食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 때 아버지는 무엇을 해서든
일단 家族을 위한 한 끼의 飮食을 마련할 것이다.

그 한 끼의 飮食이 解決되는 瞬間,
家族 모두는 고픈 배를 달랠 수 있는 幸福感을 만끽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아버지는 막노동이라도,
어머니는 식당일이라도 보려고 바둥거릴 것이고,
아주 작은 몸만 누일 수 있는 작디 작은 空間을 마련하여
아이들을 눕힐 수만 있어도, 家族 모두가 함께 있을 수만 있어도
모두는 幸福해 질 것이다.

 

職場生活을 하는 사람은
進級이 안 될까를 걱정하기 前에,
이 職場에서 完全히 空으로 돌아가는 思惟를 먼저 해 보라.
이 職場이 없다면,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

좋은 집을 살 與件이 안 되는 사람은 그 돈을 걱정하기 전에
집도 돈도 아무 것도 없는 제로(ㅇ)를 思惟해 보라.
아무 것도 없어도
삶은 계속되고,
당신의 幸福을 向한 熱情은 계속될 것이다.

 

과연 執着이란 무엇인가?
나는 과연 무엇에 執着하고 있나?

제로(ㅇ), 空性, 無의 冥想을 通해
비로소 과연 내가 어디에 執着하고 있었는지,
本來 온 곳인 ‘텅~ 빈 空’의 狀態에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쌓아 왔는지,
나는 不足한 사람이 아니라
얼마나 豊饒로운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은 여전히 더 벌어야 하고,
더 나아가야 하며, 끊임없이 쌓고 쌓아야 하는 이가 아니다!

事實 당신은, 이 地球별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붙잡고 執着해 온 것이다!

 

처음 올 때
아무 것도 가져 오지 않았던 한 透明한 存在, 自由로운 存在가,
몇 十 年이 흐른 지금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있고,
그 붙잡은 것으로 因해 괴로워하고 있고,
더 많이 所有한 他人을 보며 自愧感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진짜 궁핍하고 가난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동안 이 生에서 쌓아 올린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던
바로 그 無知가 나를 가난하다는 意識으로 내몬 것은 아닌가.

 

오늘,
처음 이 生으로 旅行을 오던 그 날로 되돌아가,
그 '本來의 텅~ 빈 자리'로 돌아가 보자.

그리고 다시 되돌아 온 뒤,
그동안 이 生에서 내가 붙잡은 것들이 얼마나 많으며,
그것이 얼마나 所重하고 고마운 것들이며,
그것들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宇宙 全切의 도움이 있었는지를
뜨겁게 뜨겁게 感謝 해 보자.

 

그리고 요즘 내가 더 많이 가지려고, 얻으려고, 올라가려고 애쓰던
그 모든 欲望과 執着들이 얼마나 나를 束縛하고 있었는지를 思惟해 보자.

누구나 때때로
내 삶의 無所有, 空性의 冥想을 實踐 해 보라.

그럼으로써
無限히 自由한 나를 되찾게 될 것이다.

事實은 그렇게 아웅다웅하며, 그렇게 앞만 바라보며,
그렇게 所有와 돈을 渴求해가며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事實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이 瞬間
나는 얼마나 幸福한 存在인지, 豊饒로운 存在이며, 사랑받고 있는 存在인지에 對한
無限한 感謝와 찬탄과 驚畏感에 사로잡힐 지도 모른다.

텅~ 빈 그 자리에서 온 우리가
때때로
故鄕을 그리워하듯
우리 마음의 本鄕인 그 텅~ 빈 空의 자리를
때때로 冥想해 보고, 思惟해 보며,
아무 것도 없었고, 아무 것도 아니던
그 自由했던 時節로 돌아가 보는 것,
그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속 시원하고
툭 트인 길인가.

 

텅~ 빈 空의 자리으로 돌아가 모든 것들을 내려 놓아 보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들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 豊饒와 感謝와 慈悲로운 도움 속에서
그동안 이렇게 살아왔다는 事實에
感動, 讚歎, 自足, 驚異로움을 經驗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