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불성인가/숭산스님
선(禪)이란 말이나 단어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말과 단어에 집착하면 본성을 이해할 수 없고,
불성도 얻을 수 없다.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조주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다.
‘없다’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언어이다.
절대가 아닌 모두 상대적이고 분별적이고 개념적인 생각들이다.
부처는 모든 것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조주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그 시대에 살았던 승려들은 경전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그들은 말과 단어에 집착해 있어서 부처가 가리키는 즉각적이고
살아 있는 경험을 놓쳤다. 깨달음과 불성에 대해 단지 토론만 했고,
중생이 과연 깨달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논평만 했다.
부처님은 만물이 불성을 갖고 있다고 했으니 개에게도 불성이 있겠구나.
그러면 개도 부처가 될 수 있나?’
스님들은 언제나 그런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오로지 경전만 읽고 수행은 하지 않아서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개도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 개도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아주 어려운 문제로구나."
그리하여 결국 조주선사에게 묻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위대한 스승들의 말과 단어에 집착하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선병(禪病)을 가지고 있다.
조주의 말에서 또 어떤 특별한 의미를 찾는 것도 그것이다.
무(無)란 무엇인가 이 무라는 것이 나와 같은가, 다른가?
또 생각하고 생각한다.
일본 선방에서 많은 학생들은 하루 종일 ‘무’를 찾는다 .
무우우우……. 하고 생각하며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나는 무가 돼야 해.‘나는 사라져야 해.’
그런 종류의 수행은 뭔가를 만드는 수행이다.
‘무’를 만드는 것이다.
조주선사가 처방한 좋은 약을 써서 오히려 나쁜 병을 만드는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 만공 스님에게 조주의 ‘무’(無)자 공안에 대해 여쭈었다.
"스승님, 조주선사가 말씀하신 ‘무’의 의미를 알고 싶은데요."
"아주 쉽다. 선원 뒤 정원에 서 있어 봐라. 거기에 아주 많은 무가 있다."
만공이 얘기한 무란 먹는 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아주 높은 수준의 가르침이다.
만공은 이 사람에게 무라는 것은 특별한 게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무’ 안에서 어떤 깊은 의미를
파악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실수라는 것이다.
따지지 말라. 생각하지도 말라.
조주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를 놓치지 말라.
"왜 무(無)인가? 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식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결코 무를 이해하지 못하며,
본성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여전히 무를 이해하지 못하겠거든 시장에 가서 무를 보아라.
많은 무들이 너를 가르칠 것이다.
그것들은 선사들의 가르침보다 나을 것이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조주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갑니까?"
그러자 조주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가사를 하나 지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나 나갔다."
아니,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왜 조주선사는 이런 대답을 했는가.
만약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할’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마룻바닥을 “땅!”하고 쳤다면 이해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이다.’
혹은 책상 위 연필을 들고
‘이것은 연필이다.’라고 말해도 그 역시 이해가 된다.
그러나 조주선사는 전혀 엉뚱하고 긴 대답을 했다.
왜 그랬을까. 조주선사는 제자가
어떤 특별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여기엔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야.
그런데 이 하나는 어디로 가나.
여기에 감춰진 의미가 뭐지?’
제자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조주선사는 제자의 이 생각하는 마음을 뚝 자르는
큰 의심을 주었던 것이다.
사실 일곱 근이나 나가는 옷이란 있을 수가 없다.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주선사의 말은 무자 공안과
마찬가지로 질문한 이에게 큰 의심을 던져주고 있다.
‘도대체 스승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 하고 의심해 보는 이것이야말로
조주선사가 지니고 있는 가르침의 기술이다.
그는 제자들의 생각을 끊어내기 위해 말과 단어라는 칼을 사용한다.
생각을 끊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조주선사의 말에만 집착하여 답이 틀렸다고,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면 선사가 이미 당신을 몽둥이로 30방 때렸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불성이란 무엇인가?’ 대답은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고 할 수도 있다.
이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일곱 근의 가사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모든 형태의 대답들은 불성을 지적하는 데 좋고 나쁘고가 없다.
이밖에 얼마든지 다른 대답들이 나올 수도 있다.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들 중 한 사람인 유마거사와 관련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유마거사는 부처님 생전에 깊은 깨달음을 얻었던 사람이다.
한 번은 그가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부처님 귀에 들렸다.
부처님은 유마거사의 안부를 묻기 위해 제자들을 보냈다.
많은 승려와 보살들이 유마거사의 집에 모였다.
서로 문안 인사가 오간 뒤 자연스럽게 법거량이 벌어졌다.
누군가 이렇게 먼저 말을 꺼냈다.
"둘이 아닌 것(不二中道)이 무엇입니까?"
서로들 자신의 깨달음을 말로 표현하려 애썼다.
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선과 악은 둘이 아닙니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오고 가는 것이 다른 게 아닙니다"
위대한 문수보살도 입을 열었다.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둘이 아닙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아주 훌륭한 생각” 이라며 감탄했다.
마침내 사람들이 유마거사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나 유마거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정답이다. 가장 완벽하고 가장 깊은 대답이었다.
입을 열면 이미 두 개를 만드는 것이다.
불성도 이와 같다. 불성을 이해하고 싶으면 입을 열지 말아라.
말과 단어는 불성을 표현할 수 없다.
입을 닫으면 나와 우주는 하나가 된다. 둘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침묵하라. 그러면 내가 신(神)임을 알게 된다” 라고 말한다.
불성도 이와 같다.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데, 이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불성을 알고 싶으면 먼저 이 하나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야 한다.
기억하라,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첫 번째 코스이다.
그러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임제선사는 누가 질문만 하면 ‘할’ 하고 소리를 질렀다.
덕산선사는 방망이로 때렸다.
구지선사는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입을 열면 이미 이분법을 만드는 것이다.
말과 단어는 거기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어떤 행동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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