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꽃동네에 들어간 보살의 피눈물 나는 사랑과 치매 치유법
먼저 장사익의 '꽃구경'에서 피눈물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말 했고, 끝으로 현대판 고려장인
양노원이나 실버타운 같은 老人保護 施設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問題를 提示했다. 오늘은
그 問題의 答으로 短篇小說처럼 좀 길지만 무척 재미난 글을 보내니 끝까지 읽어 보시라.
이 글은 글쓴이의 전자출판 된 [넘새누나 부자되는길]에서 인용하는 글이다.
글쓴이는 登山을 좋아했고 젊었을 때 언젠가 雪嶽山 大靑峰을 오르기 위해 百潭寺에서 봉정암 오르는 길을 택했다. 글쓴이는 걸음이 좀 빠른 편이라 웬만한 친구와 걷는 게 싱거워서 가끔 혼자도 잘 가는데, 그날은 앞에 가던 어떤 스님이 나이가 지긋한데도 꽤나 걸음이 빨라 글쓴이와 同行이 되었다. 얼마를 가다가 스님이 쉬는 곳에서 글쓴이도 같이 쉬었고 우리는 가는 目的地 등을 물으며 인사를 하고 친해졌다.
그 스님은 봉정암에 기도를 드리러 간다고 했다. 글쓴이는 소청봉 산장에서 자야 하는데 그곳은 약간의 돈도 받지만 시설도 그저 그렇거니와 너무 복잡했다.
"스님과 동행해서 저도 봉정암에서 하루 저녁 공짜로 잘 수는 없는지요?" 글쓴이의 본색이 나왔다.
"그곳은 祈禱를 드리는 곳이지 登山客들의 旅館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저도 기도를 드리는 체하면 될 거 아닙니까?"
"체가 아니라 진짜 기도를 드려야죠"
"진짜 기도도 드릴 수 있어요. 般若心經 정도는 외우는데요."
"아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거기서 留하시죠"
"감사할 것 없습니다. 전 기독교의 주 기도문도 외우는데요. 하하"
"하하, 여러 종교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그래야 오늘 같은 날 절에서 공짜로 잘 수도 있고 어떤 때는 교회에서 과자도 얻어먹을 수 있고, 또 살아서 부처님 예수님이 주는 복을 양쪽에서 따블로 받을 수도 있고
또 죽어서 天堂이 만원이면 極樂에도 가고… 하하"
"하하, 그게 아닐 테지만 솔직한 말씀이 좋습니다. 그런데
거사님은 설마 하늘 한쪽에는 극락, 또 한쪽에는 천당이 있다고 生覺하는 건 아니겠죠?"
"當然하죠. 전 예수부처님, 부처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전 종교에 壁이 있어서 예수교가 불교를 비판하거나 불교가 예수교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生覺되어서 둘 다 믿기로 했습니다"
"事實은 거사님 말씀처럼 宗敎에 壁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
"예 바로 전 그걸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지금 저보고 거사님 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前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절에서는 아주머니들 보고 菩薩이라고 부르는데 보살이란 원래 관세음보살 등 부처님 다음 단계로 높은 자리 아닙니까? 그렇다면 모든 부인들이 모두 부처님 바로 아래 단계란 말인데 이거 부인들한테 너무 야양이 심한 것 아닙니까? 그래야 佛錢이 많이 나와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하하"
"하하, 예, 그런 중들도 있긴 하겠지요. 그러나 婦人들은 子息들에게는 充分한 菩薩 資格이 있습니다. 菩薩이란 無限定의 사랑을 베푸는 存在인데 바로 어머니는 子息에게는 그 無限定의
사랑을 베풀거든요."
"예수님이 백번이고 천번이고 無限定 사랑하란 말씀 같네요. 엄마들이 無限定 사랑을 베풀면
그 부인들이 절에 오면 우선 子息이 있느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하면 보살 딱지를 가슴에 하나씩 붙여주고, 아니라고 하면 주지 말아야 하겠네요. 하하"
"하하하하"
글쓴이와 스님과의 對話는 물론 우스개 소리였지만 엄마들이 菩薩 資格이 있다는 것은 그럴 것
같으면서도 글쓴이는 實感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 년이 흘렀다. 시골에 글쓴이의 먼 친척 형님이 계셨는데, 그는 일찍 돌아가시고 아주머니가 외아들을 기르고 논밭 팔아 서울 名門大學까지 卒業시켰으며 亦是 名門大學 出身의 며느리를 맞아 40평 정도의 아파트까지 사서 살림을 차려 줬다. 아들은 좋은 會社에 취직해서 중책을 맞는 자리까지 올라가고 남매까지 두었으며 며느리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자 무슨 연대인가의 중책을 맞으며 남편의 직책에 걸 맞는 봉사 일을 했다.
늙은 아주머니는 여전히 先山과 텃밭을 가꾸며 시골에 살고 있었다.그런데 무슨 開發로 선산과 텃밭 값이 뛰었다 했다. 아들 며느리는 自己네 職位나 社會的 身分으로 지금 사는 40평 아파트는 사회적 신분에 걸맞지 않으니 80평짜리 아파트로 옮겨야 한다고 했고, 아들이야 회사의 외제차가 있으니 며느리도 자신의 신분에 걸 맞는 국산 최고 차라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이참에 어머니도 함께 모시며 孝道도 할 겸 시골 땅을 마저 팔아야 한다고 어머니에게 설득하였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있는 선산만큼은 꼭 지켜야 한다고 했다. 즉 아버지가 묻혀있는 선산을 매일 바라보는 게 자신의 큰 慰安이라고 했다. 그리고 自身은 서울생활 같은 것은 답답해서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結局은 아들의 請을 去絶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問題는 이 할머니가 서울 生活에 견디지 못하는 것이었다. 수도, 깨스, 욕탕, 화장실 등의 쓰는 法을 아무리 알려줘도 깨스와 수도 틀어놓고 다니기가 일쑤고, 목욕 좀 자주 하시래도 안 하자 냄새가 난다고 손자들은 相對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니 허구 헌 날 아들 며느리 손자들한테 구박덩이가 되어 노인성 건망증이 심해지는가 했더니 이건 치매로 변하여 하루가 다르게 더해간다. 동네 노인정에 데려다 줘도 아무도 상대도 안 했고,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 집에 찾아올 줄도 모른다.
치매는 날로 심해져서 80평짜리 이 방 저 방 아무 방 아무데나 다 대소변이고, 이걸 벽에 문지르니 온 식구들이 기절초풍 할 수밖에…이건 가정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정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며느리와 아이들의 提案대로 할머니를 어딘가에 보내자고 結論을 내렸다.요즘은 실버타운인지 뭔지도 있었는데 그땐 그런 것도 없었다. 아들이 있으니 政府에서 하는 養老院도 해당이 되질 않았다. 결국 아들은 혼자 아내의 고급 승용차에 어머니를 태우고 음성 꽃동네를 찾아갔다.
이 '음성 꽃동네'의 유래는 대강 이렇다.
오웅진 신부라 하는 분이 처음 사제가 되어 발령 받은 곳이 이곳 이었다. 당시 그곳 성당은 시골이라 신도수도 적고 매우 피폐해 있었다. 그는 傳道 차 동네를 쏘다니다가 自己 걸음조차 便치 않은 한 거지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老人은 밥을 빌어먹고 있었는데 한 깡통을 얻고도 계속 더 얻고 있었다. 오웅진 신부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여름철이라 음식이 금방 상할 텐데 뭣 하러 저렇게 많이 얻어 가는 것일까? 그의 뒤를 따라가 봤다. 그는 다리 밑 천막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걸음조차 걸을 수 없는 불구자들이 들퍽거렸다. 그 노인은 그 불구자 들에게 밥을 골고루 나눠 먹였다.
"아니 老人께서도 다리가 不便하신데 손수 이렇게 수고를 하시다니요?
"내 다리가 이만하여 빌어먹을 수 있는 것도 다 하느님 恩惠입니다"
오웅진 신부는 피눈물을 흘리며 사제 옷을 벗어 던지고 天主님께 사죄를 했다.
"제가 지금까지 한 짓은 모두 가식이고 위선이었습니다."
오웅진 신부는 그 거지들을 모두 성당으로 데려다 놓고 그 노인과 함께 밥을 빌어 먹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각 자선단체가 돕기 시작해 오늘날 거대한 社會福祉機官이 되었다
한다.
여기의 主人公 老人은 김귀동 할아버지... 그는 일본 와세다 대학까지 나온 인텔리였다. 좋은 직책도 있었고 잘 살기도 했었으나 6.25전쟁으로 전 가족을 모두 잃고는 이 世上이 虛無한 것을 알고는 차라리 거지가 된 것. 그는 지금 돌아가셨으나 그의 銅像은 지금 꽃동네에 세워져 꽃동네를 지키고 있다.
오웅진 신부도 막사이사이 상인지 뭔 큰 賞까지 받았다는데 떡장사를 하다 보면 떡고물이 손가락에 묻었는지 아니면 初心을 잃었는지 얼마 전 報道에는 公金 횡령 등 말이 많았다. 하여간 이 꽃동네는 현재 캐톨릭에서 운영하는 자선단체로 연고가 없는 부랑자들을 수용하는 곳이다.
여기의 자원 봉사단들은 치매 노인들의 대소변부터 더러워진 옷 빨래 그리고 목욕까지 더럽다는 말 한번 안하고 奉使하는 곳이다.여기서도 아들이나 가족이 있으면 받아주질 않는다.
먼저 글쓴이가 말한 어머니를 꽃 동네에 고린장(高麗葬)시키려는 아들은 正門 저 멀리에 차를 세우고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와 옷가지 몇 벌, 그리고 떡 몇 개를 함께 내려놓고는
"어머니 잠시 어디 좀 다녀와야 하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세요.
시장하시면 이 떡을 잡숫고…"
할머니는 해가 西山에 기울 때까지 아들을 기다렸으나 아들은 오지 않았고 시장하여
떡을 먹고 싶었으나 아들이 오면 같이 먹으려고 아껴두고 있었다.
할머니는 결국 꽃동네 사람들에게 發見되었고 그들은 당장 버려진 할머니 라는 것을 알았다.
주소니 전화번호 묻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그렇게 버려진 사람들은 그런 거 記憶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꽃동네에 수용된 할머니는 거기서도 골칫거리였다. 할머니가 거주하는 방에는 썩는 냄새 때문에 다른 수용자들까지 야단이었다. 가끔 자선 단체에서 들어오는 떡이며 과일 등을 할머니에게 주면 먹지를 않고 아들 오면 준다고 어딘가에 감추어두고 잊어버리기 때문에 여름에는 이게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이 할머니가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잘 때까지 하는 일은 아들이 사라진 方向을 바라보며 아들을 기다리는 일이다. 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은 그곳에 갈 수가 없었다.
아들은 글쓴이에게 눈물로 하소연 하길래 글쓴이가 몇 번 面會를 다녀와서 그곳 事情을 좀 안다.
結局 할머니는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남긴 유품은 헌 옷가지 몇 벌과 썩은 과자 몇 개, 그리고
그렇게 아들 오면 준다고 아끼던 금반지 하나… 아들과 며느리는 금반지 하나만은 챙겼다.
이 自己를 버린 아들에게 떡도 먹지 못하고 감춰두며 기다리는 어머니를 보면서 글쓴이는 먼저
스님이 왜 어머니는 菩薩이라 했던가를 實感할 수 있었다.
- 사람이 이 世上에 올 때는 宇宙意識의 一部가 아미노산 어쩌구 하는 단백질, 卽 物質인 땅에
둘러싸여 아기의 몸이 되어 나온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神의 分身이 땅을 두르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卽 사람은 肉身이 精神을 둘러싸서 만들어진 存在이다. 만약 精神만 있고 肉身이
없다면 이는 鬼神이고 肉身만 있고 精神이 없다면 이는 시체나 짐승에 불과 하다.
아기는 처음에는 自身이 누군지도 모르는 純粹 意識을 가지고 이 世上에 온다. 따라서 죽을 때는 흙에서 온 몸은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아기처럼 自身이 누군지도 모르는 純粹意識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가장 幸福한 죽음이다. 그래야 宇宙意識 같은 純粹意識이 宇宙意識으로 그대로 吸收된다. 靈魂인지 뭔지가 있다면 天堂인지 極樂인지에 갔다는 말이 된다.
이게 [眞本 天符經]의 ‘하나, 둘, 셋… 열’의 理論이다.
수련을 많이 한 스님들이나 진실로 기독교를 잘 믿은 신도들, 그리고 어떤 도를 많이 닦은 도인들은 自身이 살았을 때의 富貴榮華, 權力 등을 모두 지워버리고 미련 없이 純粹意識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는 그들뿐만이 아니다.
아무런 宗敎를 갖지 않았다 하더라도 平生을 누군가를 사랑하며 착하게 사셨던 연세가 많으신 노인들은, 이걸 알아 自身의 모든 過去와 미련을 버리고 自身이 할 마지막 일을 整理하신 다음 목욕을 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는 웃는 얼굴로 주무시듯 눈을 감는 분이 많다. 卽 살아있는 자들에게 마지막 사랑의 表現을 그렇게 하는 분들이 글쓴이 주위에 많았다.
그러나 무엇엔가 執着이 남아 있다면 自然攝理는 結局 친절하게도 强制로
自身이 누군지 모르는 어린아기로 돌아가게 한다. 强制로 말이다.
이게 바로 치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치매란 아기처럼 되는 것까지는 좋은데 어떤 미련이 남으면 그 미련에 執着이 되어 심술꾸러기 아이들처럼 된다는데 問題가 있다. 이것은 대개 사랑의 缺乏인데 이는 自身이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줄 수 있는 對相이 없는 데서 오는 現狀으로 꼭 심술꾸러기 아기처럼 된다.
대개 옆으로 삐딱하게 나가는 아이들은 自身이 사랑을 줄 수 있는 對相이 없는 아이들이다. 즉 누군가가 이 아이를 귀여워했다면 이 아이는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機會가 있어서 定常的인 아이로 자랐을 텐데 自身이 사랑할 相對가 없으니 못된 심술짓만 골라서 한다.
生命의 養食은 먹거리가 아니라 바로 '사랑'이고, 이는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 할머니는 시골에 있을 때는 차라리 무엇엔가 사랑을 할 수 있는 對相이 많았다. 동네 할머니와 對話도 하며 그들과 友情을 나누었고 터 밭에 채소도 심으며 그들에게 精誠껏 사랑을 베풀면 이놈은 탐스럽게 자라 할머니에게 즐거운 사랑을 되돌려주었다. 또 아들, 손자가 올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는 希望도 있고 또 그들에게 줄 고추라도 심으며 한시도 손놀림을 쉬지 않으면 이 고추는 탐스런 열매로 報答을 한다. 老人들이 한시도 손을 놀리지 않아야 치매가 오지 않는 原因도 이 손끝
놀림이 醫學的으로 頭腦細胞를 活性化 시키기 때문이다. 卽 우리의 記憶力 등은 머리 대뇌세포에만 있는 것 같지만 實은 全身 어느 器管 하나라도 記憶力 등과 關係가 없는 器管이 없다.
예를 든다. 학생이 학교에서 단어를 외울 때, 즉 VICTORY를 외울 때 어떤 학생은 손으로 쓰면서 외우고 어떤 학생은 입으로 ‘뷔아이씨티오알와이’를 중얼거리며 외운다. 몇 十 年이 흐른 다음 그 단어를 쓸 때, 입으로 외운 넘은 입으로 중얼대야 그 單語를 쓸 수 있고 손으로 써서 익힌 넘은 손으로 서 봐야 그 單語를 쓸 수 있다. 이는 손이나 입 모두 記憶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證明되며 따라서 우리의 모든 身體 器管은 모두 記憶力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그 기관 중에 가장 많이 기억력을 저장하고 있는 기관이 바로 大腦皮質이고, 여기에 自身이 사랑할 수 있는 對相이 있는 記憶도 있으며 이를 다시 즐겁게 在現하면 대뇌피질의 記憶力까지 活性化된다. 따라서 사람은 老人이 될수록 손 발끝 놀림을 하여 이를 精神의 놀림으로 通하게 해야 치매가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서울에 올라오면서부터 이 사랑을 베풀 對相을 송두리 채 빼앗겼다.
自己가 사랑하며 할 수 있는 일거리는 아무데도 없었다. 그냥 사육만 당한 것이다.
父母를 便히 쉬게 하는 것이 孝道가 아니다. 그가 사랑할 수 있는 對相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이는 일거리를 많이 만들어 막 시켜먹는 것도 하나의 孝道 方法이다.
위의 아들은 不孝子가 아니었다. 다만 이것을 錯覺하여 어머니를 사육만 하는 것만이 효도인 줄 알았고, 그 결과 어머니를 치매 환자로 만들어 더러워진 어머니를 원망하고 미워만 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치매는 더욱 심해졌다.
사람이 나이가 먹어 치매가 걸리면 밥은 더 먹고 배설은 더 많이 한다. 엄청 많이 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 사람은 스트레스 같은 게 없으니 위장도 건강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위를 조절하는 컴퓨터가 고장 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할머니는 아침밥을 금방 먹고도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며느리 년이 밥도 주지 않아 배고파 죽겠으니 밥 좀 달라고 하여 밥을 주면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아무데나 배설을 한다.
自己 子息의 똥은 더럽지 않다. 그러나 남의 자식 똥은 더럽다. 부모의 똥은 더 더럽고 냄새도 더 난다. 왜 일까?
꽃동네 자원 봉사단들은 오는 사람이 거의 또 온다. 처음 온 사람들은 치매노인들의 배설물이 더러워 치우지도 못하고 다음부터는 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큰 決心을 하여 다시 오고 또 자주 오다 보면 처음에는 더러웠던 것이 자주 하다 보니 그냥 하나의 일인 것뿐 나중에 손을 씻으면 그만인 것이다. 여기서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란 말은 할 필요도 없다.
무슨 연대니 무슨 自然保護니 하여 社會에 奉使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自己가 먼저 해야 할 奉使를 못하면서 그런걸 한다면 이건 가식이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면 절대 되지 않는다. 어떤 사회적 신분이나 체면보다도 가장 우선되어야 할 건 自身의 義務이고, 이 중 가장 重要한 것은 自己에게 베풀어준 恩惠를 아는 것이다.
父母의 恩惠도 모르는 사람은 앞으로 事業을 해서 自己에게 돈을 벌게 해준 손님들의 恩惠도 모를 테니 이런 사람은 이 글을 그만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손님의 恩惠를 모르면서 돈 벌겠다는 사람은 절대로 돈을 많이 벌어 富者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이 글은 쇠귀에 경 읽기가 될 테니 말이다.
이 치매 現狀을 現代醫學으로 腦細胞가 죽고 어쩌구 하는데, 結局 현대의학의 治療濟는 아직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이는 病이 아닌 自然 現狀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이런 치매에 걸려서 대소변을 못 가린다면 먼저 말한 꽃동네나 요즘 실버타운으로 고린장(高麗葬)을 시키기 前에 우선 아들이나 며느리가 直接 父母님을 마치 自己 子息에게 하듯이 每日 깨끗이 목욕시키고 그가 좋아할 일거리를 줄 일이다.
어린 孫子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좋은 方法이다. 하루에 단 한 시간, 아니 단 10분이라도 좋다. 물론 처음에는 아이도 할머니에게 가지 않으려 하고 치매 할머니도 아이보기가 어렵겠지만, 치매의 最高 藥은 바로 아기들의 新鮮한 生氣와 재롱이다. 또 어느 程度가 되면 할머니에게 아기의 기저귀와 목욕도 부탁한다. 처음에는 초보운전자에게 맡긴 것처럼 맡긴 사람이 더 不安하겠지만, 할머니는 平所에 子息을 기를 때 하던 經驗이 되살아나 금방 익숙해지며 또 自身이 사랑을 베풀 수 있는 機會가 생기니 하루가 다르게 치매는 治療가 된다.
옛날 젊은 女性들은 될 수 있는 한 시어머니를 모시지 않는 데로 시집을 가려고 했다.
그러나 요즘 약은 젊은 여성은 시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시집을 가려고 한다. 그 이유는 시어머니를 모시려고 하는 게 아니라 시어머니에게 自己가 낳을 아이를 맡겨놓고 職場生活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어머니도 약았다. ‘내가 내 새끼들 키우기도 힘이 들었는데 니네 새끼들까지 내가 키워줄 것 같으냐?’ 결국 딴 살림을 한다. 多幸히 活達한 性格에 좋은 취미생활을 하며 좋은 친구를 사귀면 좋겠지만 그것도 집에 돌아오면 혼자가 되어 불당 할매처럼 천정만 쳐다보며 우울하게 된다. 이것도 치매의 原因이다.
大家族 制道였던 옛날 할머니들은 젊은 것들은 모두 밭이나 논으로 일을 하러 가니 자신이 아기들을 돌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데, 자신은 너무 늙어 힘이 없어 죽겠는데도 손자들은 떼를 쓰며 기어오른다.
귀찮다고 볼기짝을 때려가며 하루 종일 손자들과 싸움질인데 그래가면서도 그 孫子가 없으면 살질 못했고, 結局 치매 없이 一生을 살다가 結局은 그 孫子의 무릎에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孫子가 커서 걷기를 시작하면 데리고 돌아다니며 팽이도 만들어주고 연 만드는 법도 가리키며 칡뿌리도 캐먹고 송사리 잡는 방법도 알려주어 이놈은 할아버지가 귀찮을 정도로 따라 다니지만, 이놈은 할아버지에게 귀염 받을 짓만 하기 때문에 할아버지도 이놈이 없인 못산다. 물론 이렇게 큰 아이들은 삐딱하게 나갈 수도 없고, 할아버지도 치매 같은 게 뭔지도 모른다.
글쓴이가 시골에 있을 때 동네에 孝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國民學校 선생이었는데 친구들이 그가 어머니한테 어떻게 효도를 하는지 궁금하여 그 집에 몰려갔다. 이 효자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엄마! 내 발부터 씻어줘!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발에서 땀이 났단 말이야!"
"이런 철딱서니 하군… 넌 언제나 철이 들래? 네 친구들이 슝보는 줄도 모르고…"
그러나 結局 어머니는 마치 下女처럼 세수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와서 아들의 발을 닦아주었다.
"엄마! 오늘 내 친구들하고 온다고 했는데 막걸리랑 호박 된장찌개는 다 준비됐겠지? 빨리 가져와"
친구들은 기가 막혔다. 이건 효자가 아니라 개불쌍놈이다. 친구들이 저녁을 먹으며 그 理由를 따져 물었더니 효자는 한숨을 한번 쉬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내가 어머니 앞에서는 이런 애들로 돌아가지 않으면 어머니는 기뻐하질 않으시니 어쩌겠나?"
부모와 딴 살림을 하더라도 시간이 있는 대로 하루에 단 한 시간이라도 아기를 부모에게 데리고가 부모와 싸우게 해야 한다.
부모가 치매에 걸린다는 것은 모두 子息의 錯覺과 無關心 責任이다. 또 이미 걸렸다 하더라도 이런 努力들을 해보지도 않은 채 父母님을 고린장부터 시킨다면 이는 事業을 하더라도 成功하지 못한다. 또 이렇게 父母에게 아기처럼 關心을 가지면 그 家庭이 福 받는 것도 좋지만 그 對價를 얼마 있지 않아 自身이 받게 된다. 즉 이런 것만 보고 큰 子息들은 얼마 후 自身이 치매에 걸렸을 때에 똑같이 하기 때문이다. 孝子 집안에 孝子가 나는 것도 이와 같은 原理이고, 不孝를 하면 반드시 自身도 不孝를 받는다
이렇게 뼈를 깎는 苦痛이 있더라도 잘만 해내면 이는 苦痛이 아니라 自己 子息을 기르듯 즐거움이 될 것이며, 이 家庭은 地獄이 아니라 天國이 되는 것이 되고, 福이란 놈은 이런 집만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眞情한 사랑이란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스스로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흔히들 남을 사랑하라고 한다. 그러면 그도 당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건 거짓말이다. 우선 남을 사랑하는 게 어떻게 하는지도 事實은 모른다.
또 어떻게 하는지 안다 해도 그건 위선에 불과하다. 위선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엄마는 아기를 사랑한다. 왜 사랑하는가? 자기가 낳았으니까? 그러나 주워온 아이도 키우다 보면 사랑하게 된다. 왜?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지만 지가 사랑 받을 짓을 한다. 아기는 처음에는 엄마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 능력이 없다. 그냥 제가 사랑 받을 짓을 할 뿐이다. 그래서 사랑을 받는다. 쉬를 하고 기저귀가 젖었거나 배가 고프면 울어댄다. 아무리 친 엄마라도 이때에는 사랑의 감정이 생지지 않는다. 그러나 기저귀를 갈아주고 젖을 먹이면 방글방글 웃는다.
이때 엄마는 그냥 녹아버린다.
누구나 아기를 사랑한다. 그러나 우는 아기는 사랑하지 않는다. 아기는 항상 우는 것은 아니다. 쉬를 했거나 배가 고프면 운다. 그리곤 그것이 해결되고 누군가와 눈동자가 마주치면 다시 방글방글 웃고 예쁜 짓을 한다. 卽 아기는 相對에게 사랑의 感情을 이끌어낼 줄 아는 技術이 있다. 따라서
眞情한 사랑이란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나를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요즘 젊은 戀人들은 自己 愛人에게 나만을 사랑해 달라고 하는데,
사랑이란 어떤 부탁이나 어떤 강요로 될 일이 아니니 헛소리 하고 있는 것이다.
相對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게 하면 사랑은 마치 메아리처럼 왔다 갔다 하여 結局은 누가 먼저 누구를 사랑했는지도 모르고 누가 누구를 사랑했는지도 모르게 된다. 이것이 참사랑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부모님에 계시고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고 싶다면 부모님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게 해야 한다. 즉, 자신이 대통령이 됐더라도 부모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어 응석을 부려야 하며, 나이가 70이 됐더라도 90먹은 부모에게 볼기짝 맞을 짓을 해야 한다. 이것이 부모 치매 豫防이고 孝道이며, 이런 家庭이야말로 天國이고 정말 富者가 될 것이다.
또는 http://cafe.daum.net/chunbuinnet -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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