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이어서 말씀드리기 전에 요거 잠깐, 내용을 잠깐 보시겠습니다. 그 비터 프랭클(Victor Frinkl)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 들어보셨을 텐데요, 비터 프랭클은 精神科 醫士면서 유태인이었는데 나치 치하에 수용소에 보내졌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아내 형제들이 가스실에 끌려들어가서 죽게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됐죠. 그래서 말 그대로 아주 최악의 괴로움의 상황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죽음의 수용소’에서 라는 책을 보면 비터 프랭클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이 책에서 보면 나치강제수용소에 끌려들어가서 부모님과 형제 아내를 모두 잃게 되고, 모든 소유를 빼앗기게 되고, 그야말로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과 핍박 공포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되죠. 그야말로 사람이 인간이 격을 수 있는 最惡의 狀況을 아마 겪고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터 프랭클이 봤을 때 지금 나의 외적인 상황은 말 그대로 최악인겁니다. 더 이상 행복의 가능성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싶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인 거죠. 더 이상 외적으로 괴로울 수는 없을 정도로 본인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여기 있는 많은 사람이 아까 거의 때로는 자살도 하고 때로는 정신병이 걸리기도 하고 끌려들어가 죽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최악의 없는 고통을 느끼게 되었었겠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입니다. 비터 프랭클이 이런 최악의 상황, 우리가 괴롭다 나는 이것 때문에 괴롭고 나는 저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우리 삶에서 괴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일어날 수 있는 괴로운 상황가운데 아마 최악의 상황일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비터프랭클이 생각해 보니까 자신은 최악이고 더 이상 괴로움 외에는 내 인생엔 없다. 라고 생각이 되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外部狀況을 바꿀 수 있는 길은 하나도 없는 겁니다. 도저히 외부 상황을 바꾸어가지고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나에게 행복은 불가능한가? 봤더니 꼭 그렇지는 않더라는 거죠. 뭔가 봤더니 自己 마음을 바꿈으로서 지금 이 狀況에서 최악이라고 여기고, 최악이라고 解釋하고 있는 나의 마음을 바꿈으로서 내 態度를 바꿈으로서 또 다른 自由를 獲得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엄밀히 따져보면 狀況에서 오는 自由보다 가장 偉大한 自由는 眞情한 自由는 마음의 自由라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상황이 아무리 자유로워도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죠? 구속받는 사람이 있죠? 스스로를 구속하고 스스로 苦痛 속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터 프랭클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 정말 우리가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자기 마음을 바꿈으로서 행복해 질 수 있는 可能性을 엿볼 수 있게 되었는데요, 이 비터 프랭클은 나중에는 그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주변사람들에게 당신을 어떻게 이롭게 의연하고 이런 상황 속에서 평화로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 너무 놀라워했다 그러고, 심지어 나중에는 간수들조차 이 사람은 스승으로 삼으면서 이 사람에게 아주 놀라워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를 배우고 이렇게 했다는 그렇게 이야기에 나옵니다.
그래서 비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의 최악의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고. 人間은 어떤 狀況에서도 幸福을 選擇할 精神的인 自由家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 행복과 평화는 外部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內面의 문제라는 것을 自覺하게 되었다는 거죠. 우리 함께 요거 한번 읽어 봐주시겠습니까? [행복은 미래를 향해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단순히 선택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누리고 만끽하라.] 정말 행복을 보면 정말 이 말이 맞는데 우리가 실천이 안 될 뿐인 거죠. 행복은 미래를 향해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 행복할까? 라고 생각했을 때, “야, 내 자식이 대학만 좋은데 가면 나는 행복할거야.” “좋은데 취직만 하면 행복할거야.” “돈은 얼마나 벌면 그때 가서 행복할 것이다.”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있으면 난 행복할 것이고,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려면 난 행복할 것이다.” 라고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언제나 추구해있다는 거죠. 지금 이 순간에 있는 행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행복을 선택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어떻게 되고 나면 그때 가서 행복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내가 그렇게 설정해 놓은 미래의 행복을 향해서 미친 듯이 달리기를 하고 있죠?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이. 너무나도 빠르게 빠르게 달려가면서 속도전을 내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사실은 행복은 미래를 향해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단순히 선택하는 것이다. 卽 “어떤 條件이면 행복할 수 있을 거 같아?” 라고 물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러이러한 상황이면 난 행복할 것이라고 여기겠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은 “너는 행복을 선택할거니? 말거니?” 이걸 물을 수 있다는 거죠. 행복을 선택할건가? 말건가? 우린 이것을 決定할 수 있을 뿐입니다.
미래에 무엇이 되고 말고, 뭔가 소유를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난 행복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만 決定하면 된다는 거죠. 왜냐하면, 행복은 지금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어디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의 행복을 누리고 만끽하는 사람만이 더 많은 행복을 끌어올 수 있다는 거죠.
이게 행복을 느끼는 마음상태가 되면 마음 안에서 마음의 에너지 波長이 행복이 물결치는 波長으로 바뀐다는 거죠. 그러면 이 주변에, 이 우주법계에 내 안에 있는 행복의 파장이 우주법계 끝까지 傳達이 되고 傳波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共鳴의 法則에 따라서 내안에서 幸福의 波動이 물결치면 이 宇宙 法界에서 共鳴으로서 같은 波長이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점점 더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내 인생에 자꾸 벌어진다는 거죠.
그런데 “나중에 이걸 이루고 나면 그때가 행복할 거야.” 라고 생각하면, 지금은 그걸 이루지 못한 상황이거든요? 이루지 못했다는 生覺, 이루지 못했다는 마음을 지금 演習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不足, 缺乏, 이런 것들을 演習하는 거죠. 그러니까 행복은 점점 더 요원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내 인생에 등장하는 겁니다.
지금 이 瞬間에 행복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永遠히 幸福해질 수 없다고 합니다. 행복은 미래와는 아무 相關이 없다는 거죠. 행복은 삶을 대하는 하나의 態度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가 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행복해지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 하는 거죠. 왜 그러냐하면 모든 狀況은 그것 自體로는 中立的입니다. 좋거나 나쁜 상황은 없죠. 다만 그 상황에 대한 나의 解釋이 좋거나 나쁠 뿐인 겁니다. 괴로운 상황은 없다. 괴롭다고 生覺할 뿐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내가 解釋하는 데로 나의 삶이 나의 未來가 創造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내가 계속 해서 否定的으로 解釋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 - -, 나에게 처한 상황은 中立的인데, 이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의 습관입니다. 습관. 내 안에 있는 필터.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否定的이라고 生覺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否定的인 필터로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그렇게 끊임없이 否定的인 마음으로 世上을 바라보게 되면, 내가 바라보던 方式대로 世上이 만들어집니다. 삶이 創造되어진다는 거죠. 요거 한번 잠깐 보겠습니다. (...) 동일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肯定的인 態度를 가지게 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가 안 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同一한 狀況인데 어떤 사람은 엄청난 스트레스호르몬이 분비가 되고 있습니다. 엄청난 큰 고통과 스트레스를 겪고 있어요. 그런데 동일한 상황을 같이 겪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전혀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가 안 되는 겁니다.
실제 스트레스를 받지않는 그런 사람도 있는 거죠. 이 책 혹시 아시는가 모르겠는데요, [꽃으로 때리지 말라]는 책에 보면 이러한 사진이 한 장 나옵니다. 큰 아이가 바깥에서 햇볕을 쨍쨍 내려쬐는 곳에서 쓰러져서 죽어가는 것처럼 쓰러져 있더라는 거죠. 그래서 잭 캘리라는 사진작가가 이 아이를 사진으로 막 찍었습니다. 사진으로 막 찍었더니 이 아이가 눈을 뜨는 거예요. 죽은 줄 알았는데 눈을 뜨니까 좀 미안해서 이 아이한테 자기가 먹다 남은 사과 반쪽을 줬다고 그럽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아주 힘없이 바라보더니 그 사과반쪽을 보더니 깜짝 놀라더니 이걸 들고 막 먹을 줄 알았는데. 이 아이가 지금 몇 주가 됐는지 엄청 오랫동안 음식을 제대로 섭취한 적이 없는, 그래서 거의 죽기 直前의 아이인 거예요.
그런데 이 사과 반쪽을 보더니 허겁지겁 먹을 줄 알았는데 먹지 않고 그 사과를 들고 옆으로 힘없이 걸어가더랍니다. 그래서 쫓아갔더니 작은 움막으로 들어가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움막으로 따라 들어갔더니 그 움막에 동생인데 엄마아빠는 이미 돌아가셨고, 이 아이가 쓰러져서 죽어가고 있는데, 이 동생을 끌어안고서는 사과를 입에 넣어주니까 동생이 사과를 씹어 먹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중에는 자기가 입으로 씹어가지고 동생 입에다가 이렇게 뱉어주고 그래도 안 씹으니까 머리를 잡고 턱을 잡고 강제로 이렇게 왔다갔다 씹게 해주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반은 그렇게 해주고 반은 자기가 먹을 줄 알았는데, 자신이 먹지 않고 전부다 씹어서 아이한테 전부다 이렇게 넣어주더래요.
그래서 이 아이한테 모든 것을 다 나눠주는 겁니다. 나중에 며칠 있다가 잭 캘 리가 다시 마을을 지났는데 보니까 이 兄은 이미 그때 죽어있었고, 동생은 그때까지 살아있더라고 그런 이야기가 있었는데, 사실은 우리의 根源的인 性稟은 이와 같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때 所有하지 않고 있을 때, 無限한 慈悲와 사랑이 우리 根源의 바탕이 되어있다는 거죠. 이 아이가 여기서 어떤 慾心이나 이런 것들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때, 所有하지 않을 때, 우리의 根源에서는 돕고자 하는 에너지. 돕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누구나 정말 힘든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나면 첫 일으키는 생각이 “아~ 無條件 도와야 되겠다.”는 生覺이 먼저 일어나는 게 當然하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 도와야 되겠다는 生覺이 일어나지만, 두 번째로 따라서 연이어서 “야, 얘가 뭐 이렇지 않을까? 저렇지 않을까? 이것도 다 計算된 게 아닐까? 내가 이렇게 주면 오히려 돕는 게 아니지 않을까? 내가 뭔 돈이 있다고 돕느냐?” 온갖 分別心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첫 마음이 挫折이 되게 되는 거죠.
이와 같이 우리들은 根源的으로 無限한 慈悲와 사랑 속에서 이렇게 있는 存在죠. 우리 根源的인 어떤 배경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소유하지 않을 때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執着하고 欲望하고 願하면 願할수록 자비와 사랑은 오히려 사라지는 겁니다. 제가 예전에 태국에 갔었을 때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태국 왕들이 왕을 잡으려고 가족들이 왕족들이 전부다 어떤 섬에 포카라에 있는 어떤 작은 섬에서 이렇게 연회를 즐기고 있었데요.
그런데 그 섬으로 가가지고 그 아들 하나가 왕자 하나가 따발총을 가지고 와서 형제자매 친척 뭐 왕족들 전원을 그냥 그 자리에서 다 죽였다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다 죽이고 그 사건을 자기 사람들로 해서 딱 덮어버린 거예요. 미궁으로. 그러고 실제 그 사람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드라고요. 우리 歷史에서 보면 自己가 王이 되기 위해서 때로는 父母도 죽이고 兄弟도 죽이고 子息도 죽이고 해가면서 王位에 오르는 境遇를 많이 볼 수가 있죠.
이것처럼 오히려 우리가 많은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많이 가지면 많이 가질수록 더욱더 精神的인 挫折을 맛보게 되고, 더욱더 精神이 피폐해지고, 그래서 더욱 더 더 많은 것을 願하게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봤을 때 여기에 계신 분이 부모님을 죽인다. 자식을 죽인다. 이런 것을 想像할 수 있습니까?
이거는 質問 自體도 할 수 없는 이건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가능한 경우가 있다는 거죠. 이게 가능한 경우가 바로 너무 過度한 慾心과 과도한 執着이 우리에게 왔을 때, 과도하게 소유하게 되었을 때는 그것이 가능하게 된다는 거죠. 과도하게 가지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우리 삶에서 벌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로또가 당첨되고 나면 오히려 家庭이 파탄이 되고 이러는 것들을 보실 거예요. 이거 한번 보시면요. (...) 로또에 당첨이 돼서 그냥 갑자기 하루아침에 15억을 벌었어요. 15억을 벌었으면 어마어마하게 부자가 갑자기 된 건데, 저의 아버님께서 평생 노가다를 하시면서 작은 토건업을 운영을 하셨는데 토건사업 하시면서 많이 벌 때는 꽤 많이 벌기도 하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자식이 6이 되다보니까 동시에 대학 대학원을 6명이 같이 다닐 때가 있었을 정도로 그러셨는데, 지금 농사를 짓고 사시거든요. 이제.
시골에 농사짓고 사시는데 재산이 없으셔요. 보니까 이거 다 해도 한 2억 뭐 2~3억 다 팔아도 집이랑 땅이랑 다 나중에 판다고 해도 2~3억 밖에 안 되시는 거 같다. 이러더라고요. 보세요. 이렇게 일반들은 평생을 벌어도 평생을 벌어도 2~3억 밖에 못 버는 사람도 있을 텐데 이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15억을 벌었는데도 불구하고 쓸 돈이 없다. 이게. 이거 뭐 쓰려고 하면 돈 같지가 않아서 너무 어중간하게 당첨됐다는 거예요. 되려면 한 100억 되고, 안되려면 말아야 되는데 어중간하게 15억밖에 당첨이 안 되니까 이거 조금조금 쓰려니까 돈이 휙 나가더라는 거죠. 15억이 어중간한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게 된다는 거죠. 그리고 옷 하나 사면 2~3백만 원이라고 이런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15억이라서 그럴까요? 120억 땅값이 떴는데 100억이 넘은 겁니다.
120억 땅값이 갑자기 확 떠서 120억을 한 번에 벌은 겁니다. 그런데 행복해지셨냐고 물으니까 염장 지르냐? 지금 엉망진창이다. 그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自殺한 이유가 뭐냐 하면요, 돈이 안 될 때는 자식들을 찾아도 안 오다가 땅값이 떠가지고 120억이 되놓으니까 자식며느리 손자할 것이 없이 전부다 쫓아와서 싸우는 거예요. 이 돈 네가 갖냐? 내가 갖냐? 내가 몇%를 가져야 된다. 네가 몇%를 가져야 된다. 네가 한 게 뭐가 있냐? 이러면서 형제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을 해가면서 비참하게 싸우는 겁니다. 그 모습을 차마 못 보겠어서 얼마나 심하게 싸웠으면 아버지가 그걸 못 보고 自殺을 해버렸어요. 우리가 부모님이 재산 얼마 안 남겨줬다. 이건 축복입니다. 축복. 정말. 정말 그래요.
재산 얼마 안 남겨 준 부모님이 계실 때는요, 그 자식들이 어떻게 하는지 제가 보니까요, 부모님이 재산 안 남겨주고 돈이 없는 부모님들은요, 심지어는 밥 먹을 돈 조차 별로 없는 부모님들은 그 자식들이요, 두 명이 됐든 3명이 됐든 4명이 됐든, 그 자식들이 어떻게 됐든 돈을 못 버는 아이들도 어떻게도 5만원 10만원 20만원씩이라도 하여간 조금씩 조금씩 해서 드려요. 부모님들한테. 부모님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용돈을 드립니다. 부모님이 줄 거 바랄 것도 없죠. 줄 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자꾸 사랑을 베푸는 나눠드리는 거예요. 부모님께. 그런데 부모님이 돈이 많고 가진 게 많아서 상속할게 많으면 이 자식이 주기는커녕 10원 한 장 결코 안주죠. 주기는커녕 싸운단 말이에요. 이게 우리가 재산남긴 게 한 1억쯤 되면 이야 한 천만 원 밖에 안 된다 그럴 때는 자식들이 싸울게 뭐있겠어요? 싸워봐야 몇 백 안 남으니까.
그런데 부모님이 한 100억 남겼다. 이러면 첫째 둘째가 싸우겠어요? 안 싸우겠어요? 싸웁니다. 조금만 형한테 형 들이받으면 10억 받을 거 한 2~ 30억 받을 거 있다면 내가 평생 벌어도 안 되는 돈을 조금만 싸우면 벌 수 있다. 그러면 사우고도 남죠. 그런데 사실 이게 모두가 마음의 문제거든요. 우리 삶이라는 것은. 이 마음이 서로가 상처가 되고 서로가 이렇게 틀어지고 나면 그것처럼 사실은 괴로운 게 없죠. 돈이 문제가 아니죠. 가만히 보니까 저도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어떤 경우에는 누가 한 만원만 빌려갔는데 만원이 뭐에요? 몇 천원만 빌려갔다가도 아주 기분 나쁘게 안 갚으면서 누가 그 얘기를 했을 때 “치사하게 그런 거 가지고 그러냐?” 그러면서 기분 나쁘게 띵겨가면, 한 몇 천원 가지고도 기분이 확 상하잖아요. 사람이.
그런데 1~2천만 원 몇 억씩 큰돈을 탁 줬어도 그 사람이 와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얘기하고 정말 참회하고 이렇게 하면 그냥 한마음으로. “그래 그 천만 원 까짓것 안 갚아도 돼.” 이렇게 얘기도 하거든요. 사람들은 보면. 누구나. 그러니까 이 마음이 풀어지게 되면 물질은 사실은 큰 문제가 아니게 되는 거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그 물질에 더 그만큼 목을 매죠. 이번에 170억입니다. (...) 170억이 당첨이 됐는데 천생배필이라고 생각했던 아내하고 돈 때문에 지지고 볶고 싸워서 이혼 당하고 온갖 안 좋은 모습 다 보고, 그러고 났더니 지금 10원 한 장 없이 무일푼이 됐는데, 지금이 가장 행복하고 지금이 제일 편하다. 지금 이대로 살면 되겠다. 그냥 노가다 뛰든 뭘 하든 열심히 한달 벌어서 한 달 다만 얼마라도 받으면 그거로 쓰고 살면 되니까 지금이 오히려 속편하고 행복하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 정말 많거든요.
이것처럼 정말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죠. 우리 이 세상에 보면 다섯 살 미만의 어린아이가 하루에 3만5천명이 죽어간다 그럽니다. 오늘 하루 3만 5천명이 죽을 예정이고, 어제 하루에 이미 3만5천명이 죽어갔다는 거죠. 어린 아이만 하더라도. 어른까지 하면 5만에서 7만 명 이상이 매일매일 이렇게 죽어간다고 그럽니다. (...) 아까 책에 보면 소말리아에 13세밖에 안 되는 소년들이 소말리아에는 보통 다이아몬드 광산이 많이 있다 보니까. 서로 뺏으려고 온갖 이런 저런 테러집단들에서 그 마을을 점령하고 그런답니다. 이쪽 집단에서 남자아이들 12살 13살만 넘어가서 총만 들 수 있으면 다 끌고 간데요. 그래서 총을 쏘는 걸 가르쳐서 그 마을을 가서 점령하도록 아이들을 소년병들을 막 투입 시킨다는 거에요.
그 마을에 소년병들이 12~ 13살 된 소년병들이 그 마을에 와서 총으로 쏴서 그 마을을 점령을 했어요. 그런데 그 마을에는 여성분들, 할머님들, 그리고 애기들밖에 없는 거죠. 얘네들이 장악하기 쉬웠겠죠. 장악을 했는데, 이 아이들이요, 12살 밖에 안된 아이들이 총을 들고 마을에 있다가 본진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 [꽃으로 때리지 말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기다리고 있는데 저 쪽에서 임신한 아주머님이 지나가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12살 밖에 안 된 애들이 “야, 모여 봐. 모여 봐.” 하고 서는 “야, 좀 저 아줌마 뱃속에 아들일까? 딸일까? 내기하자.” 그래서 10원 20원 사탕 하나 두 개, 이렇게 내기를 하고서는 끌고 와가지고 배를 찢어서 애기를 꺼내서 이렇게 아들인지 딸인지 보고 방치시켜서 둘 다 죽게 만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고 그 아이들도 수스로 그렇게 하고 나서도 나중에 거기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스스로의 트라우마로 남아서 고통을 받고. 그러니까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고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이런 충격적인. 그러니까 기아와 배고픔으로만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엄청난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아픔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지금 너무나도 많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아와 전쟁, 공포, 질병,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루에 7~8만 명이 사망을 하고 있다고 그럽니다. 썩은 물을 먹고 기생충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 이렇게 충격적인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이 지금도, 지금 이순간도, 우리 곁에는 너무나도 많죠.
우리 눈에 당장 그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이 세상에는 그렇게 사는 삶이 많은데. 우리들이 가만히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면 그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이런 상황에 비한다면 비할 수가 없는 그런 괴로움 있잖아요. 만약에 이렇게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절망하고 또 그 공포에 시달리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을 만약에 우리네 장병들이 그걸 물어봅니다. 장병들한테, “얘네들을 만약에 데려다가 우리나라 여러분하고 똑같이 군 생활을 시키면 얘네들 기분이 어떨까?” 그렇게 물어보면, 이 아이들이 그럽니다. “야, 이거 완전 천상세계인거죠. 극락세계 같이 느낄 거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다는 거예요. 장병들이 내가 지금 군 생활 하는 것을 힘들다고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얘네들과 비교한다면 얘네들이 군에 와서 이런 정도의 삶을 살면 이건 정말 아마 극락세계같이 느낄 겁니다.
왜냐하면 한 달 두 달 평생 동안 밥 한 끼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고, 올바로 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고, 물 먹어도 깨끗한 물 한번 먹어본 적이 없고, 한 몇 주 동안 그 독초나 먹고 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던, 그런 엄청난 공포 속에 살던 아이들이 매일 삼시세끼 밥을 먹을 수 있고, 물먹고 싶을 때 마음대로 물을 먹을 수 있고, 병났을 때 하다못해 약이라도 먹을 수 있고,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아무리 최악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최악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일지라도, 우리가 그냥 지금처럼 우리가 살 수만 있다면 이렇게 삼시세끼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극락세계와도 같고 천상세계와 같은 행복인 겁니다. 우리는 지금이 불행이다. 괴롭다. 답답한 일이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겐 이것이 극락세계라는 거죠.
그렇다면 그 狀況 自體가 괴로운 게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 아이들한테 묻습니다. 군 생활이 괴로운 게 맞니? 하면, 괴로운 게 맞다고 그래요. 그러면 이게 絶對的으로 괴로운 게 많니? 하고 물어봤을 때, 처음에 맞다 그러는데. 이것과 따져봤을 때는 군 생활은 그 自體가 괴로움인 것이 아니라 그거 自體는 얘네들이 봤을 때는 極樂世界의 條件인겁니다. 천상세계와도 같은 엄청난 조건이었던 거예요. 3끼를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자체로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행복이었던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當然한 幸福을 幸福이라고 여기지 않고 괴로움이라고 生覺하고 더 비싼 거, 더 많은 돈, 더 많은 것을 얻지 못하는 것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條件은 그것 自體로는 언제나 中立的인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지금 이 조건도 극락세계와 같을 수가 있어요. 제가 아이들 상담하면서 만나봤던 아이들 중에 지금 나는 이제 군인밖에 안된 20대 초반밖에 안됐는데 빚이 지금 천만 원이라고, 정말 괴롭다고, 죽고 싶다고 하는 아이들도 있고요. 빚이 벌써 한 5천만 원이나 돼서 괴롭다고 죽겠다는 아이들도 있어요. 어떤 아이는 1억에서 2억 3억 되는 아이들도 봤는데, ** 미치거든요. 그런데 제가 상담했던 어떤 아이는요, 빚이 한 300억 정도 이 아이가 진 빚이. 어떻게 됐나 봤더니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가 망하게 되시고 좀 아주 안 좋게 되셨는데, 그거를 자신이 안 떠안을 수 있는 게 되는데, 본인이 그걸 모른 것도 있고, 어떻게 어떻게 되어서 법적으로 어쩔 수 없이 그걸 자신이 이렇게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답니다.
그저 아버지가 딱 망해가지고, 아버님이 이미 가셨는데 그것이 그대로 自己가 떠안게 되는, 참 어이없는 狀況이 된 거에요. 이 친구는 처음에는 그냥 自殺하는 거 외에는 아무 方法이 없다. 죽는 거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처음에는 생각을 계속해서 할 수 밖에 없겠죠. 그건 평생 어떻게 300억이나 되는 돈을 값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린 그 정도 벌 수 있다고 상상도 못하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러더라고요. 그건 그거고 300억은 300억이고,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지금은 그냥 군 생활만 하면 되는 거더라는 거예요. 나가서도 내가 일단 그거는 그거고, 내가 일단 지금 이 瞬間에 살기만 하면 되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친구가요, 어느 瞬間부터 영어공부를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그 문제는 일단 그 문제고 일단 나는 일단 여기서 죽지 않을 거면 어쨌든 한발 한발 이라도 나아가야지. 무조건 포기만 해서는 되지 않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있다는 거예요. 마침 또 거기 있던 우리 그룹에 있던 친구하나가 그 아이는 자신은 돈을 버는 게 소원인데 돈을 천조를 벌고 싶다는 거예요. 천조. 그러면서 천조 자신은 벌수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어요. 그 친구는 아주. 저는 몇 백억 친구는 봤어도 천조를 벌겠다는 친구는 저도 처음 봤는데. 얘가 그런 얘기를 하면서 自信感을 가지고 못하는 게 어디 있느냐? 法師님이 얘기하지 않았느냐? 마음먹어서 안되는 게 어디 있냐? 천조를 벌겠다 이런 얘기를 옆에서 비웃더니만 이게 한바탕 웃더니 얘도 이제 생각이 달라진 거예요. 까짓것 300억이면 천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안된다고 지금 생각하니까 이제 난 평생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게 왜 안 되리라는 생각만 내가 할 필요가 있느냐? 하고 마음을 돌이켜 먹고 工夫를 시작하는 아이를 봤어요. 그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條件은 그것이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조차 사실은 최악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사실은 최적의 최상의 조건일 수 있어요. 제가 상담을 했던 어떤 친구는요, 私債業者가 와가지고 때리는데, 이건 뭐 무시무시하게 때리고, 돈 그렇게 많은 돈도 아닌데, 몇 천만 원 가지고 그걸 못 갚아서 엄청나게 때리고 고통 받고 이랬었거든요. 그런데 그 고통을 본인은 돈이 없으니까 감당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다른 사람은 보니까 똑같은 사체업자가 쫓아오는 상황인데 이 사람은 몇 억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몇 억 때문에 그 고통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몇 천만 원 때문에 저 사람은 저렇게 고통 받지? 저거 정도야 그냥 어떻게든 하면 될 거 같은데.” 십지만 본인은 그 몇 천만 원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것 때문에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겁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은요, 그것 자체로서 좋거나 나쁘거나 지옥이거나 고통이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기로 解釋할 뿐인 것이지. 그것이 지옥이라고 해석하고, 이것이 큰 고통이라고 해석 할 뿐인 것이지 그것 자체로는 아무 문제도 사실은 없는 것일 수가 있죠. 그래서 絶望스러운 狀況은 없습니다. 절망하는 사람이 있을 뿐인 거죠. 어떤 상황도 그 상황자체가 절망적이라거나 그 상황 자체가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온다거나 그렇지는 않다는 겁니다.
내 마음에서, 내 마음에서 그것을 絶望으로 느끼기를 選擇하는, 내가 행복하지 않기를 選擇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그거 自體로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그렇다고 해서 比較해서 남들보다 比較해서 나으니까 그걸 위안으로 삼아라.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남들보다 비교해서 비교우위를 행복으로 삼아라. 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남들과 비교될 수 있는 그런 모든 條件들은 空虛하다는 거죠. 그 條件 속에서 오는 행복, 條件 속에서 오는 불행은 眞情한 것이 아닙니다. 眞情한 價値가 아닙니다. 남들과 比較해서 행복하다고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나약한 精神世界를 反映할 뿐인 거에요. 내가 남들보다 못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돈을 못 벌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生覺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精神을 代辯할 뿐인 거죠.
우리는 남들의 조건과는 전혀 상관없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 거냐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는 독자적으로 나 혼자서 스스로 中心을 잡아. 우뚝 설 수 있습니다. 사실은 정말 많은 사람들의 거의 90% 이상일 수도 있어요. 대학을 안 좋은데 가거나 뭐 좀 원하는 게 안 되거나 원하는 직장에 못가거나 원하는 직장에 취직을 못하거나 이랬을 때 그거 싫어하는 이유가 대부분은 다른데 있다고 생각하는데 事實은 남들의 視線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사실은 시골에 가서 농사지어도 괜찮아요. 나에겐 행복하겠어요. 나는 자장면 배달해도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그거로 행복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의 視線 때문에 남들이 “야, 이런 대학 나왔는데 이거밖에 못해? 이거밖에 취직 못했니?” 하고 비웃을까봐. 남들의 視線이 두려워서 기어이 執着을 하고 慾心을 내려놓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죠.
그런데 왜 우리 삶을 남들에게 저당 잡혀서 그것은 내 삶의 主導權을 相對方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主人이 되어서 내 삶의 主導權을 行使를 해야 되는데, 남들에게 내 삶의 主導權을 다 넘겨주는 거예요. “네가 나를 그렇게 辱하니까 나는 그래. 부끄러운 사람이다.” 認定해 버리는 겁니다 남들의 判斷을.
나도 나 自身을 判斷하기 어렵고, 그 누구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判斷할 수 없는데 어떻게 相對方의 말을 信賴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無視하라는 얘기는 아니죠. 무시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거기에 휘청거리고 휘둘릴 필요는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自己中心을 잡으면 自器 안에 어떤 內面에 딱 뿌리를 내리게 되면 外部的인 狀況과 전혀 相關없이, 外部에서 그 어떤 좋은 條件이든 나쁜 條件이든 남들이 욕을 하던 칭찬을 하든 相關없이 내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中心을 딱 잡고 뿌리를 내려서 그 어떤 거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外部的인 狀況 條件, 여기에 그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自己中心을 잡을 수가 있어요. 그럼 眞情한 當當한 主人公으로 自身의 人生을 살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當當한 主人公이 되어서 主人의 삶을 살려고 왔지, 客처럼 남들의 말에 휘둘려 가면서, 주변 狀況에 視線에 휘둘려 감겨서, 環境이나 條件이나 돈이나 經濟力이나 이런 것들에 휘둘려 가면서, 奴隸처럼 휘청거리며 살기위해서 이 世上에 온 存在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自己中心을 딱 잡고, 지금 이 자리 이 瞬間에서 幸福을 選擇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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