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主人公이 되어 부처와 당당히 맞절을 해야 絶望에 빠진 民衆에 對한 慈悲로 출발한 것이 禪宗 不立文字, 모든 權位 否定 미륵에게 所願 빌지 말고 스스로 부처 되는 게 佛敎 동산(東山)의 법연(法演) 스님이 말했다. 哲學者의 눈에 佛敎만큼 아이러니한 것도 없습니다. 制度라는 側面에서 불교는 神을 숭배하는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석가모니나 미륵 등 부처들이나 그들의 말에 절대적으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同時에 불교는 一切의 超越的인 權位를 根本的으로 解體하여 人間에게 解放과 自由의 可能性을 附與했던 가장 革命的인 思惟 形式이기도 합니다. 이런 아이러니, 아니 모순을 확인해보려면 가까운 사찰에 한 번 들려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공손하게 108배를 올리는 너무나도 평범한 이웃들을 쉽게 볼 수 있을 겁니다. 분명 이것은 초월자에게 자신의 절절한 소망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反面 이렇게 간절한 기도 행위를 마친 분들이 사찰을 떠나려고 할 때, 스님들은 합장하며 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보살님! 성불(成佛)하세요.” 정말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요. 부처를 마치 神이기라도 하듯 崇拜한다는 것과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것, 이 두 가지는 質的으로 다른 것입니다. 물론 불교의 核心은 치열한 노력으로 스스로 부처가 되는 데 있습니다. 만약 부처를 숭배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라면 불교는 기독교와 구조적으로 구별될 수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 숭배는 잘해야 일종의 방편(方便, upa- ya)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다시 말해 부처를 숭배함으로써 스스로 부처가 되기에 역량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나마 선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근기(根機, indriya)라는 槪念이 불교에서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근기’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마 ‘끈기가 없다’거나 ‘끈기가 있다’는 상투적인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끈기’라는 말은 바로 ‘근기’에서 유래된 것이지요. 보통 상근기(上根機)니 하근기(下根機)라는 말을 불교에서 자주 사용합니다. 上根機가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면 下根機는 성불하기에 자질이 충분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그렇지만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벌어집니다. 下根機는 주어진 선천적인 한계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와 관련된 해묵은 논쟁이 대승불교 전통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일천제’는 ‘성불할 수 있는 역량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상근기가 귀족이나 적어도 평민 계층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下根機는 일자무식의 천민 계층을 가리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천제는 성불할 수 없다는 주장은 하근기인 일반 민중들에게는 절망스런 선언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構造主義 人類學者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는 1955년에 출간된 자신의 주저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에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文字야말로 계급과 권력이 발생하는 기원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文字가 출현하면서 文字를 독해할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않는 계층으로 사람들이 분화된다는 것입니다. 精神勞動과 肉體勞動 사이의 오래된 위계적 분업 체계가 발생한 것도 사실 文字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것은 단지 과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적용되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우리의 부모들은 지금도 자신의 아이들을 더 많이 가르치려고 혈안이 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위에 君臨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역설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레비스트로스의 통찰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文字를 강조하는 순간, 上根機와 下根機의 區分은 强化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반면 文字의 重要性을 弱化시키는 순간, 上根機와 下根機 사이의 간극은 좁아들게 됩니다. 사실 文字로 이루어진 이론을 강조하는 순간, 下根機, 卽 民衆은 絶望에 빠지게 될 겁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불교가 慈悲라는 이념을 표방할 수 있겠습니까. 3. 선종은 성불의 새로운 패러다임 ‘不立文字’를 외치는 순간, 선종은 성불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합니다. 그것이 바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수행 방법입니다. ‘문자’에서 ‘마음’으로 패러다임을 이동한 선종(禪宗)의 독특한 전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根本的인 變化는 敎宗 내부에 잠복해 있던 위계질서, 그러니까 ‘부처-경전-경전해독자’라는 위계질서를 전복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나시나요. 운문(雲門, ?~949) 스님은 교종에 속한 스님들이 들었다면 경천동지할 사자후를 토했던 적이 있습니다. “마른 똥 막대기(乾屎橛)!” 부처의 말인 經典이 否定되려면, 부처를 가만히 두어야 되겠습니까. 쓰레기통에 후련하게 던져 넣어야지요. 그래야 살아있는 우리의 마음 하나하나가 활발발(活潑潑)하게 살아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제 드디어 법연(法演, ?~1104) 스님이 주장자를 들고 굳건히 지키고 있는 ‘무문관(無門關)’의 45번째 關門을 뚫고 들어갈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주장자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法演 스님은 우리의 대답을 재촉합니다. “석가(釋迦)도 미륵(彌勒)도 오히려 그의 노예일 뿐이다. 자! 말해보라. 그는 누구인가?” 잘 알다시피 석가는 불교의 창시자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 BC563?~483?)를, 미륵은 싯다르타의 사유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는 불교 이론가 마이트레야(Maitreya, 270?~350?)를 가리킵니다. 불교에서는 싯다르타뿐만 아니라 미륵도 부처로 추앙되는 사람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미륵은 싯다르타보다 더 종교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이 세상에 극락정토가 이루어지면, 인간세계에 다시 내려온다고 믿어졌던 부처였으니까요. 깨달았다는 것, 그래서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自身의 삶을 主人公으로 살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당연히 석가모니나 미륵, 혹은 그들이 남긴 글에 依存한다는 것은 逆說的이게도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는 證據일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瞬間이겠습니까. 寺刹에 올라가시면, 이제 석가모니불이나 미륵불에게 절을 하십시오. 물론 그 절은 一方的인 崇拜의 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멋진 맞절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쇳덩어리나 나무토막이라서 석가모니불이나 미륵불은 이미 當當한 主人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절을 할 수 없을 테지만, 너무 無禮하다고는 탓하지 마십시오.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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