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仍不雜亂隔別成/ 잉불잡란격별성 - 뒤섞이지 않고 제 모습을 이루네~~~

장백산-1 2013. 7. 7. 15:21

제14구 仍不雜亂隔別成(잉불잡란격별성)  뒤섞이지 않고 제 모습을 이루네

 

인연(因緣)의 條件에 따라서 모든 것이 存在한다고 하면 즉, 연기법에 의하면 이 세상 모든 것들, 우리들,
우주삼라만상만물은 獨立的인 개체로서의 고장된 實體가 없기 때문에 각각 스스로 正體性을 갖지 못하고
뒤섞여 있어서 언뜻 보면 매우 혼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의 환경과의 因緣關係에 따라서 각각의 개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끊임 없이 變하기 때문에
오히려 각각의 正體性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무상(無常), 무아(無我)로서의 變化만이 삶, 현실, 세상 일 수
있으며 그런 끊임없는 變化 속에서만 각각의 개체가 제 모습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한 치도 별개의 제 모습을 버리지 않고 순간순간의 時間이 그대로 십세(十世)의 全切 시간이 되면서도
순간순간에 하나하나는 각각의 自己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서까래가 집이라는 全體를 함께 이루는
總相이지만 서까래 모습으로서 總相인 것과 같습니다. 한 瞬間이 영겁의 무량한 모든 時間을 담고 있다고
해서 뒤죽박죽된 時間이 아니라 自己 時間 그대로를 순간순간 分明하게 나타내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나무 한 그루라도 그 나무가 存在하게 된 것은 宇宙法界가 그 나무가 存在할 수 있는 因緣과 條件을
形成했기 때문입니다. 宇宙法界가 한 그루의 나무 속에 그 因緣의 힘을 그대로 보냈기 때문에 한 그루
나무이면서 동시에 그 나무에는 宇宙法界의 全切 情報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무의
모습을 버리고 宇宙法界의 氣運만을 나툰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華嚴世界의 부처님 즉, 우주전체 바탕으로서의 부처님, 法身佛을 비로차나불(毘盧遮那佛)이라
이름하지만 법신으로써의 부처님의 얼굴은 중생의 수만큼이나 아주 多樣하다는 말입니다. 自己가 있는
時間과 空間을 여의지 않고도 온 世界에 두루 나툰다고 이야기 하는 華嚴의 가르침도 여기에 그 까닭이
있습니다.

 

나뭇잎은 나뭇잎의 모습대로 毘盧遮那佛이 되어 비로자나부처님의 世界를 나투고, 나비는 나비대로 제
모습을 하면서 毘盧遮那佛인 겁니다. 온 世界의 事物과 衆生들이 한 치도 제 모습을 버리지 않고, 지금
여기 있는 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法身佛이며 법신부처로서의 빛을 나투고 있으며 이 빛은 서로가
서로에게 법신부처가 되게 하고 있는 겁니다.

 

事實 이와 같은 世界는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중에 "와서 보라" 라는 말에 나타나듯 實踐을 通해 우주의
본질이 證得됐을 때 우리들, 이 세상 모든 것들, 우주삼라만상만물은 본래부터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세상인 겁니다. 진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禪을 화엄(華嚴)의 實踐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華嚴의
이해가 이해로 그쳐서는 華嚴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華嚴이 그대로 삶의 全部가 됐을 때만
華嚴이 華嚴이며 實踐된 禪으로서의 華嚴입니다. 坐禪의 모습으로 이 이야기를 展開해 봅시다. 房 안에
한 좌선 수행자가 앉아 있다고 합시다. 이때 우리가 그 狀況을 華嚴의 生覺으로 把握해 봅시다.

 

앉자 있다고 하는 禪 수행자의 세계는 그 사람과 房과의 因緣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때 우리는 사람을
中心으로 해서 앉아 있다고 生覺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앉아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앉아 있을 어떤 곳,
즉,지금 여기에서의 房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修行者가 앉아 있다는 말과 房이 앉아 있다는 말은 한
치의 誤差도 없이 같은 말입니다. 房과 앉아 있는 修行者가 없으면 앉아 있다는 行爲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修行者가 앉아 있다고 말을 함은 그 事實을 正確히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房이 앉아 있다고
함도 그 事實을 正確히 傳達한 것이 아닙니다. 房과 修行者가 함께 앉아 있다고 함도 물론 잡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는 앉아 있는 事實에 依해서 앉아 있는 房과 앉아 있는 修行者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앉아 있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앉아 았다고 하는 行爲가 이루어지기 前에는
앉아 있음이 없었으며, 앉아 있음이란 그 밖의 다른 行爲에 相對하여 이름 붙였기 때문에 다른 行爲가
前提되지 않으면 그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卽 걸어 감, 서 있음 등에 依해서 앉아 있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앉아 있음을 또한 서 있음이라고 해도 아무런 差異가 없습니다. 앉아 있음은 무엇의 앉아 있음
이 아니라 宇宙法界의 모든 活動의 因緣이 앉아 있음으로 나툰 것이면서도 앉아 있음을 허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앉아 있다고 부르기 以前에 본래부터 이미 앉아 있음으로 存在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言語로 表現하기 以前에 본래부터 이미 그대로 앉아 있음일 뿐으로 이 또한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앉아 있음은 어떤 하나의 事實을 指稱하지만, 實在에 있어서는 그 自體가
宇宙의 모든 모습의 나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言語表現 以前에 眞如自性, 진성, 법성이
自身의 텅~빈 바탕 모습을 固執하지 않고 우주공간 모든 곳에서 그것 自體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 모든 것들, 우주삼라만상만물이 뒤섞여 있어도 混亂스럽지 않고 各各의 모습 있는
그대로 全切이면서 同時에 自己 즉, 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禪의 實踐은 이 대목에서 言語 以前에
그저 앉아 있음이지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 서 있는 모습이며 이 行爲를
하고 있는 主體도 나이면서 너이며 너이면서 房이 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뜻을 가지고서 分明한
意思疎通을 하고 있다고 生覺하는 우리의 日常言語 生活로는 결코 이 자리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또한 日常의 言語를 방편으로 삼아서 이 자리, 이 事實을 가리키고 있으니 言語에 對한
올바른 理解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말이지만 동시에 규정되고 限定되지 않는 言語에 對한 眼目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규정되고 限定되지 않는 眼目을 텅~빈 공간마음의 自己表現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들, 一切가 眞如自性의 나툼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삶의 根據가 되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의 全切가 되고 있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表現입니다.

 

좌선(坐禪) 앉아 있음만이 아니고 행선(行禪) 걷는 行爲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걷는 것기도
하지만 동시적으로 땅이 걷는 것이며 걷는다는 行爲 그대로 앉아 있음이요 말함입니다.

 

어떻게 이 行爲를 總體的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할(喝)이나 방(棒)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와 같은 理解가 또한 禪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差異가 있으니, 禪은
시비 分別 비교 판단 해석하는 분별심, 분별意識으로 이루어진 하늘과 땅 만큼이나 差異가 있으니,
分別意識으로 이루어진 언어(言語)와 사유(思惟) 以前이란  禪은 業이 모두 消滅됐음을 이야기합
니다. 言語와 思惟의 世界가 그대로 衆生의 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禪의 現場性과 卽興性 等을 이야기할 때 그 內用은 아집(我執) 법집(法執)의 모든 煩惱가
다 사라진 곳에서 나온 完成[波羅蜜] 된 삶 입니다. 깨어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꿈속에서나 깊은
잠 속에서도 한 톨의 煩惱 씨앗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을 成就하기
以前은  모두가 衆生으로서 업(業)에 매여 사는 업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가 되기 바로 前의 境地에 오른 修行者인 금강유정(金剛兪定)도 衆生이라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單純한 새로운 見解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一切의 生覺 妄想 煩惱 즉, 분별심 분별의식를 모두 벗어난 意識에서 삶, 현실,

세상의 모습을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보며 이 현실, 삶, 세상 속  이 모든 것들에서 각각의 모든

菩薩의 同體大悲心이 타나나고 있음을 말합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