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은 움직임이 없고 본래 고요하다

장백산-1 2013. 7. 7. 21:47

 

 

 제2구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고 본래 고요하다

 
생멸(生滅), 동정(動靜)을 全切的으로 사는 것
다시 말하면 制限된 時空을 쫒는 業相을 떠난 것이 고요한 삶입니다.
법성(法性)으로 원융(圓融)하게 사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 본래(本來)  고요함입니다.
이는  修行을 通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금 여기 이 瞬間에서의 우리들의 本來 모습입니다.
 
 
무아(無我), 무상(無相)의 연기법(緣起法)
 
앞서 이야기했듯이 마음과 대상(對象)은 나눌 수 없는 하나로, 對相은 마음에 依해 있게 되며 마음은 對相에 依해 認識作用을 합니다. 이때는 마음이 對相  全切를 껴안고 있으며 對相도 마음을 껴안고
있습니다. 단지 그 접점(接點)에서 마음은 마음으로, 對相은 對相으로 나투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상즉(相卽)과 상입(相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相卽과 相入에서 보면 對相  그대로가 마음이고 마음 그대로가 對相입니다. 곧 形相을 떠나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形相 그대로가 마음입니다. 形象도 마음을 떠나 있지 않고 마음 그대로가  形象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마음이고 대상은 대상입니다. 마음이 全切를 나타내는 말이 되고 對相이 全切를
나타내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마음이라고 해서 對相에 상대(相對)되는 마음이 아니고 對相이라고 해서

마음에 相對되는 것이 아닙니다.

 

 

作用面에서 마음은 自己를 나툴 때 반드시 對相 認識을 通합니다. 이럴 때 마음은 對相 속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또 對相은 마음에다 자기 形象을 비춰서 무엇인가를 알게 합니다. 이때에는 對相이 마음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關係가 상입(相入)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全切를 나타내고 對相이 全切를 나타내는 面에서 보면 마음 그대로가 對相이며 對相
그대로가 마음인 것, 곧 마음이 對相 속에서 對상이 되고 對相이 마음 속에서 마음으로 되는 것을

상즉(相卽)이라고 합니다. 

 

마음과 對相의 關係 뿐만 아니라 모든 事物들의 相關關係도 마찬가지입니다. 낱낱의 事物은 그 속에 모든 氣運을 받아 제 모습을 나투면서 스스로도 온 힘을 다해 제 氣運을 이웃에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相卽相入으로 한 법계(法界)를 살아가는 것을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하고 대다라니(大陀羅尼)라고도 합니다. 相卽相入 되어 있는 緣起法界에서 모든 法은 自己의 모습이면서 相對의 모습으로
함께 삶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緣起의 大陀羅尼法을 나타내는 말이 삼법인(三法印)입니다. 곧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는 時空을 超越해 있는 우리 삶을 나타내며 그 곳에서의 온갖 是非分別을 떠난
寂靜한 삶을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因緣의 만남에 依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잠시라도 結晶된 自己 모습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變하고 있으니 이를 無我, 無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無常의 궁극(窮極), 곧 變化의
끝은 時空의 길이를 갖지 않는 것, 내포(內包)와 외연(外延)이 없는 것, 變化 그 自體가 時空을 벗어나

있는 것으로 진여공성(眞如空性)이며 열반적정(涅槃寂靜)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無常한 變化의 움직임이 오히려 日常의 움직임을 벗어나 있고 움직임 밖에 있는 것이 오히려 日常의 움직임으로 나타납니다. 곧 잠시라도 固定된 時空으로 자취를 남기지 않는 無我, 無常의

緣起法이야말로 眞情한 變化며 움직임이며, 이 變化가 바로 涅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무상(無常)과 불변(不變), 부동(不動)과 동(動)은 손바닥의 앞뒤와 같은 것이 아니라
完全히 같은 모습이 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무상과 적정(寂靜), 무아와 해탈(解脫)은 矛盾처럼
보이지만 삶의 眞情한 모습인 연기실상(緣起實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모든 法이란 相卽과 相入, 무아(無我)와 적멸(寂滅), 無常과 不動의 統一된 場에서의
모든 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無常과 無我는 日常에서 나타나는 主觀과 客觀, 움직임과 고요함을
否定함이 아니라 삶의 本來 모습을 말합니다. 無我, 無常의 본디 모습에서 보면 모든 法이
움직임이 없는 本來 고요함입니다.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을 使用하고는 있지만 이는 움직임과 상대하여 움직이지 읺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움직임과 고요함 밖에 있으면서 움직임과 고요함을 나타내고 있는 根本
모습을 不動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앞서 말한 不生不滅에서 生과 滅이 同時이기 때문에 생상(生上)이나 멸상(滅上)으로 봐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움직이면서 고요하며, 고요하면서 움직임이 實相의 本來 모습이기 때문에
동상(動相)과 정상(靜相)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동정(動靜)이 동시(同時)이면서 움직임으로
고요함으로 나툴 뿐입니다. 動靜이 全切로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부동(不動)이라고도 적(寂)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不生不滅, 부동부정(不動不靜)이
바로 지금 여기 이 瞬間의 우리 모습입니다. 이를 '本來 고요함'이라고 합니다.
 
時空 속의 움직임만을 無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不動不靜의 無常한 모습이 고요한 우리이며,
지금 여기 이 瞬間에 있는 우리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고요히 한다고 하는 말은 움직이는 마음을

고요함으로 돌이키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동상(動相)과 정상(靜相)을 쫒는 것이 움직이는 마음이며 이 相이 없는 마음이 고요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움직임을 그쳐 고요함 속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 더 큰 움직임이라고 <신심명(信心銘)>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生滅, 動靜을 全切的으로 사는 것, 다시 말하면 制限된 時空을 쫒는 업상(業相)을 떠난 것이 고요한
삶입니다. 법성(法性)으로 圓融하게 사는 것이 不動이며 本來 고요함입니다. 이는 修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금 여기 이 瞬間에서의 우리들 本來 모습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깃발인 三法印에서의 無常, 無我, 涅槃寂靜을 말하고 있습니다.
無常, 無我가 涅槃寂靜의 자리이기 때문에 '본래(本來)'라고 합니다. 만일 修行을 通해 얻어진다면
새롭게 생기는 것이지 本來가 아닙니다.
 
無常, 無我, 涅槃은 새롭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無常, 無我, 涅槃이 아닌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멸(生滅)이 함께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동정(動靜)이 함께하는

부동부정(不動不靜)의 연기중도(緣起中道)의 삶으로 圓融한 모습이 바로 우리 삶의 本來 모습입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둥글고 奧妙한 法 眞理의 모습이여

    고요뿐  動作없는 森羅의 바탕이여
     이름도  꼴도 없고 一切가 다없거니
     아는 이  聖人이고 凡夫는 왜모르나
     妙하고 깊고깊은  玄妙한 眞性이여
     제자리  벗어난듯 世界를 나툼이여
     하나에 모두 있고 모두에 하나 있어
     하나가 곧  全切이고 全切가 곧 個體이니
     한  티끌  작은 속에 世界를 머금었고
     낱낱의  티끝마다  宇宙가 다 들었네
     限없는  긴 時間이 한 生覺 一念이고
     刹那의  한 生覺이 無量한 긴 劫이니
     三世와  九世十世  엉킨듯  한덩이듯
     그러나  따로따로  뚜렷한  妄想이여
     初發心 했을 때가 부처를 이룬 때고
    生死와 涅槃 境界 바탕이 한몸이니
    있는듯 理事分別  痕然히 없는그곳
    遮那佛  普賢님의 大人의 境界로세
    석가님 海印三昧  그 속에 나툼이여
    쏟아진 如意 眞理 그 속에 不思議여
    虛空을  메워오는 거룩한  法비로서
     제나를  중생들로  온갖願  얻게했네
     行者여  돌아가라  眞理의  故鄕으로
     妄想을  쉬고 가라  헛길을 가지말라
     교묘한   絶對方便 그 길로  찾아가라
    如意珠  노자얻어  부처님  고향으로
     끝없이 쓰고쓰는 陀羅尼의 無盡寶로
     佛國土  法王宮을  한바탕 꾸미고서
     中道의   解脫罪에  앉으면 깨달으리
     옛부터  그랬었네  이름이  부처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