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다

장백산-1 2013. 7. 7. 23:44

 

 

 

 

제1구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고
 
법성(法性)으로 사는 삶이란
'나'와 '너'가  相互 包攝과 調和를 이루면서
한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연기(緣起)의 世界입니다.
 
緣起의 世界를 사는 것을 지혜(智慧)라고 하며
이때에는 저절로 자비(慈悲)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삶 全切가 智惠와 慈悲로 가득 찬 모습이
法性이기 때문입니다.
 
 
연기(緣起)로 하나된 삶, 법성(法性)
 
自己[別業]와 集團[共業]의 觀点으로 世界를 限定시키는 데서 오는 갈등과 不滿足인 업(業)의 束縛에서

해탈(海脫)로 이끄는 가지가지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잃지 않고 每 瞬間 드러내 보이며 實踐하는 것이 解脫에 이르는 수행(修行)입니다.

 

 

그리고 修行의 完成인 解脫은 무아(無我)로서 집착(執着)을 다 비운 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解脫의 삶은 修行으로 새롭게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앞에 現實로 드러나 있습니다.

 
지금 법성게(法性偈)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 이 만남의 장(場)도 自己 없음의 緣起法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이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 서로 다른 個體로 完全히 나누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이야기하고 있는 場에서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場面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場面이 나뉨 以前의 하나된 場으로 있으며, 이 場으로서의 回復이

無我의 緣起法인 自己 本來面目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修行이면서 同時에 삶의 本質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너가 全切를 이루는 部分으로서의 나와 너는 아닙니다. 나 그대로 全切이며

너 그대로  全切인 데서 나와 너가 하나가 된 場이 無我의 緣起의 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自己 없음의 緣起法을 쉽게 經驗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世界입니다.

눈을 감고 떠올리면 나타나는 生覺, 꿈, 禪 수행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映像들이 좋은 예입니다.

 

生覺이나 꿈, 禪 체험 등이 반드시 認識 主觀과 認識 對相으로 나뉘어져 나타나는 듯하지만 마음 밖에는

 

따로 對相이 있지 않습니다. 마음의 한 世界일 뿐, 삼매(三昧) 體驗에서 보면 지금 分明히 마음 밖에 있는 것처럼 여겨기는 마음이란 認識 主觀이 아닌, 主客으로 나뉘어지기 以前의 하나된 場으로서의 온전한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自己 없음의 三昧야말로 삶을 如實히 아는 것이며, 解脫의 바탕이 됩니다.

앞서 말한 이야기에서 하나의 場이란 이야기 삼매를 뜻합니다. 이때에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빈 마음이 이야기를 담아 듣는 사람의 빈 마음으로 들어가고, 듣는 사람의 빈 마음의 氣運이 이야기하는 사람의 빈 마음으로 들어가서[相入], 이야기하는 사람의 빈 모양을 이루고 듣는 사람의 빈 모양을 이루어 하나[相卽]가 됩니다.
 
우리가 삶을 如實히 보기 위해서는 삼매 체험이 필요하지만 삼매 체험은 반드시 특수한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時空間에서 人間과 人間, 人間과 環境 等의 關係는 언제나 三昧 속에서 함께 하고 있는 때문입니다. 모든 것들은 나뉘어져 있는 듯 各各인 것 같으나 잠시도 나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緣起法으로 調和로운 하나의 世界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삶을 法性이라고 합니다.

法性 그것은 삶의 온전한 모습이며 지금 全切가 그대로 三昧인 緣起의 모습으로 無我를 나타내는 創造的인 삶입니다.

 

이 삶은 自己 없음의 열린 마음에서 서로가 서로를 포섭하되[相入], 自己의 모습으로 自己 없음을 나투는 데서 동일[相卽]합니다.

 
이와 같은 關係는 어느 한 쪽이 一方的이지 않고 相互 同等한 位置에서 포섭하고 포섭되고 있습니다. 相互 포섭되고 있는 것을 상입(相入)이라 하며, 포섭된 氣運, 곧 나 속의 너가 나로 살아나고 너 속의 나가 너로 살아나는 것이 상즉(相卽)입니다.
 
이 關係에서 보듯 나는 너의 氣運을 받아서 나가 되고, 너는 나의 氣運을 받아서 너가 되어 서로를 온전히 살게 하는 生命의 場이 곧 연기(緣起)의 상입상즉(相入相卽)입니다. 제 모습으로 서로를 無限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삶의 根本이 무상무아(無常無我)로 텅~비어 있으면서도  오히려 텅~비어있음으로    因해 삶의 제 모습을 지켜갈 수 있음을 뜻합니다.
 
법성(法性)으로 사는 사람이란 너와 나가 相互 포섭과 調和를 이루면서 한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緣起의 世界입니다. 緣起의 世界를 사는 것을 智慧라고 하며 이때에는 저절로 慈悲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삶 全切가 智慧와 慈悲로 가득찬 모습이 法性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삼매를 통해서 드러나는 우리들의 眞實한 삶의 모습이며, 바른 삶으로 사는 것이 法性이 우리에게 드러난 모습입니다. 따라서 法性으로 사는 사람, 곧 삼매로 사는 사람은 앎 그대로가 每 瞬間 全切로 있는 것이지 그와 같은 삶이 앎의 對相으로 理解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융(圓融)한 삶
 
이와 같은 三昧의 삶을 또한 圓融한 삶이라고 합니다. 이 삶은 마음을 지우고 유위차별(有爲差別)의 時空을 벗어나 무위(無爲)의 삶을 살며, 時空을 벗어난 無爲의 삶에서 時空의 差別을 나투면서 사는 삶입니다.
 
우리 삶의 온전한 모습인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란 시공(時空)을 超越하여 時空 밖에 있는 삶의 흐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無常이란 한 瞬間도 一定한 모습으로 繼續되지 않는, 더 以上 나눌 수 없는 時間, 길이를 갖지 않는 時間,

時間이라고 하지만 時間 밖에 있는 時間의 變化입니다. 時間 밖의 時間인 無常의 變化가 진여(眞如)이며

空性의 모습이 됩니다.

 

無我란 모든 法은 그 自體만으로 獨立되어 結晶된 實體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法은 相互 關係에서만이 제 모습을 나투면서 時空間을 만들고 있습니다. 無常과 마찬가지로 無我도 또한 空性을 말하며, 이것이

삶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眞如입니다.

 
이와 같이 時空 밖에 있으면서 時空 그대로를 나투는 공(空)으로서의 無常, 無我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眞如, 空性, 여래(如來)의 모습을 나투면서 差別이 있다고 <금강경(金剛經)>에서는 말했습니다.

 

 

일어남이 바로 사라짐

 
生과 滅을 通해 무위법(無爲法)으로 있는 差別心을 살펴봅시다.
 
생(生)이란 '어떠한 것'이 일어남을 이야기하고, 멸(滅)이란 '어떠한 것'이 사라짐을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어떠한 것'이라는 명사(名詞)를 사용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生과 滅이라는 동사(動詞)가 恒常 同伴하고 있음에 注意해야 합니다. 名詞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名詞가 가리키는 것이 無常이며 無我인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生滅은 無常으로 時空을 超越하여 벗어난 眞如, 空의 끊임 없는 自己 變化입니다. 그리고

나타난 自己 變화가 그대로 眞如, 空의 表現인 것에서의 生滅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색(色) 그대로 공(空)이며, 空 그대로 色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認識은 固定된 對相 없이는 成立되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면 認識이 對相을 固定하면서 實體를 만들기 때문에 生滅 그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인 眞如를 잃고, 생상(生相 : 生의 名詞化)과 멸상(滅相)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眞如인 無常의 흐름이 時空의 制限된 認識으로 업화(業化)하여 그대로의 모습을 알지 못하고 結晶된 상(相), 곧 자성(自性)을 갖게 됩니다.

 
自性을 갖게 되면 마음이 닫히고 煩惱가 뿌리를 내립니다. 여기에서 生도 없고 滅도 없는 時間 밖의 永遠性만을 세우게 되고 現實의 삶이 그 眞情한 意味를 喪失하게 됩니다.
 
그러나 自性을 갖지 않는 生滅의 無常한 찰나(刹那) 그대로 空性의 自己 表現일 때,

지금 이 자리의 우리의 日常이 解脫의 모습으로 肯定되면서 生生하게 살아있는 선(禪)의 表現이 됩니다.

 

禪은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삶, 곧 無常 그대로 영원성(永遠性) 언제 어디서나 살아감을 말합니다. 모든

중생의 根本이 無常, 無我의 텅~빈 열린 마음, 진여(眞如)이기 때문에 禪의 삶인 해탈(解脫)이 可能하며

역대 모든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께서 증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本來 마음은 언제나 텅~비어 열려 있는 解脫이 根本이며 自性을 갖지 않습니다. 自性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無常, 無我로 전찰나(前刹那)와 후찰나(後刹那)에 變함 없는 同一한 自己의 모습을 이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밝고 어둠에 따라 눈의 因緣 條件이 變하지 않는다면 본다는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生覺이 일어난 瞬間 이것을 明確히 지켜 보아 無常으로 알아차릴 때, 衆生의 制限된 時空인 닫힌 마음이 상(相)을 갖지 않게 돠고 時空을 超越하여 全切로 살게 됩니다. 이것은 일어남이 바로 사라짐임을 보는 것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하나의 事實이 아닙니다.

어떤 事件이 일어남은 宇宙 全切의 因緣 條件이 그 事件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한 瞬間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하나의 事件에서 법계(法界)를 보는 것이며, 그 事件 自體로서 無常, 無我를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因緣 條件은 잠시라도 멈춤 없는 變化로써 生이 그대로 滅이며 滅이 그대로 生이면서 그것이 宇宙法界의 生이며 滅입니다.

 

곧 生도 生滅이며 滅도 生滅입니다. 따라서 同時 生滅이라고 해야 한 刹那를 온전히 表現한 말이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라지는 쪽에서 보면 불생(不生)이요, 사라지는 것 같지만

일어나는 쪽에서 보면 불멸(不滅)이 됩니다.

 
우리의 삶이란 이와 같이 생과 멸이 同時에 함께 하는 총체적인 흐름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와 같이 나타내는 모양 있음도 그대로 모양 없음을 同伴하고 있는 것이요, 죽어 消滅될 것 같지만 그 消滅이 바로 모양을 나타내게 됩니다. 逆說的이게도 自己 모습의 正體性을 유지하기 위하여 變化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無常한 變化만이 우리들이 삶의 根本 모습인 眞如 空性을 나타내는 方法입니다.
 
따라서 태어남과 죽음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眞如 空性의 가장 微妙한 나툼인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普遍的인 認識態度는 一定한 時空에서의 固定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닫힌 마음이고 업(業)입니다. 한 生覺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不生不滅의 텅~빈 모습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닫힌 마음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삶의 全切가 무엇인지 明確히 알아차려 참다운 삶의 모습을 如實히 나툴 때

同時 全切의 調和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이때 비로소 完全한 是非分別이 사라지게 되어 圓融한 삶이 됩니다. 圓融한 삶, 是非分別이 사라진 삶은

是非分別을 꿰뜷어 보는 무심(無心), 무념(無念)에서 業의 種子까지 사라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是非分別 가운데 흔들림 없는 마음, 자아(自我)를 세우지 않는 마음속에서 이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더욱 自身을 살펴야 합니다.

 
 
나눌 수 없는 삶의 어울림
 
   
우주법계(宇宙法界)는 연기관계(緣起關系)의 한 모습으로 生命을 나투고 있고 우리의 삶이란 宇宙法界의 한어울림 가운데 서로가 제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상(無常), 무아(無我)인 緣起關係에서 各者의 모습은 宇宙法界의 部分이면서 同時에  全切의 因緣을 結定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곧 各者의 모습을

이루는 이 法界 全切로 貫通하고 있고 法界의 因緣으로 各者의 모습을 이루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뭇생명들의 氣運이 重疊되어 있되 제 모습으로 나투는 중중무진세계(重重無盡世界)라고 합니다.

이를 비유하면 시방(十方/宇宙)이 거울로 된 房 가운데 촛불을 켰을 때 그 불이 十方에 繼續해서 겹쳐(중첩) 있는 것과 같으며, 제석천(帝釋天)에 四方으로 限없이 뻗쳐 있는 그물, 곧 인드라網의 그물 코마다 박혀 있는 寶石에 다른 그물 코의 모든 寶石이 反射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制限된 時空의 어느 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理解입니다. 自기 없음이 如實히 드러나는 삼매(三昧)를 通해서 잘못된 理解가 完全히 사라질 때, 서로가 無限한 生命의 場을 演出하면서 重重無盡世界를 나툽니다.
 
이 모습은 서로가 서로에 對해서 중심(中心)이면서 주변(周邊)이며 주인(主人)이면서 객(客)입니다. 이런 關係는 철저히 自己로 살되 同時에 自身의 모든 것을 펼쳐 다른 이를 살게 합니다. 이때 비로소 生死를

벗어나고  生에서도 死에서도 無限히 펼쳐진 삶이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生으로서의 삶만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삶의 本來 모습을 잃고 죽음으로 이끌게 됩니다. 삶과 죽음은 나뉠 수 없는 生命의 躍動이며 이 過程을 通해서 永遠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無常으로 나툰 眞如의 時空을 超越한 모습에서의 삶과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이 그대로 眞如 空性이며 여기에는 삶과 죽음, 眞如 空性이라는 이름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눌 수 없는 生命의 躍動을 나누는 데서 죽음은 始作되니 오늘 人類 全切가 環境汚染으로 生命을 위협받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서구(西歐) 思潮가 힘을 갖고 난 以後 지금까지 環境이란 人間에 의해서 정복되는 객(客)으로만 生覺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環境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環境으로 보면 環境 스스로가 主人입니다. 죽음으로 몰린 環境은 다시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主客이 同時에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主人이면서 客이고 客이면서 主人으로

한世界를 이루고 있는 重重無盡世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宇宙의 中心이면서 同時에 周邊인 客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을 如實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主客을 함께 봐야 합니다. 客으로서 主人을 볼 때는 客의 位置에 自己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하고 主人으로서 客을 볼 때는 主人의 位置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主人이면서 客으로 있는 데서 비주(非主)가 되며, 客이면서 主人으로 있는 데서 비객(非客)이 됩니다. 主人도 아니요, 客도 아닌 데서 主人과 客으로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緣起 中道
 
석가모니부처님 時代의 印度를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갑시다.
 
부처님 시대 以前부터 인도 사회는 아리안 족(族)과 드라비다 族으로 代表되는 差別된 階級과 地位의 지속, 나아가 時代에 따라 더욱 細分된 階級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된 계급의 차별에 의한 삶의 방식이 인도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巨大 國家의 成立과 더불어 새로운 社會秩序가 요구됩니다. 이에 따라 이미 성립돼 있던 宗敎,

思想 등도 變化해야 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밖의 종교, 사상들도 새롭게 일어나게 됩니다.

 

부처님 以外의 가르침은 대체로 存在의 永遠性을 主張하는 상주론(常住論)과 因果의 理致를 否定하는 단멸론(斷滅論)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만 이 思惟의 배경은 結定論입니다. 곧 결정된 사유의 틀에 의해서 모든 중생의 삶이 연역되는 것이나, 이는 實存의 우리 모습이 아닙니다. 결정된 사유(思惟)의 틀에 의해서 오늘날까지도 사회의 질곡이 더욱 가중되고 있는 현실에서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常住論과 斷滅論의 가르침이 한 片에 치우친 것이라 하시면서 연기중도(緣起中道)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비우고, 곧 모든 生覺의 틀을 버리고 우리의 삶을 지켜보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도 이와 같은 결정된 생각의 틀에 매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마음을 비우고 實存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염처수행(念處修行)입니다. 이 수행을 통하여 緣起實相을 깨닫게 되니 치우침 없는 중도(中道)의 바른 길이었으며, 결정론을 주장하는 다른 종교, 사상 등과는 다른 새로운 길이 었습니다.
 
緣起中道의 삶이란 서로가 自己 모습만을 固執하지 않으며 因緣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살게 하는 법성(法性)이며 원융(圓融)이며 무상(無常)이며 무아(無我)이며 무애(無碍)입니다. 무자성(無自性)인 一切가 緣起의 한어울림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며 이 關係를 떠나서는 各各의 삶은 根據가 없아지고 맙니다. 삶의 根據가 緣起法이라 함은 個個人의 삶뿐만 아니라 認識 主體로 알고 있는 마음도 또한 그 自體로서는 存立 根據를 갖지 못함을 뜻합니다. 
 
 
두 거울이 서로 비추듯
 
앞서 이야기 했던 꿈, 생각, 삼매 속의 映償 등은 말할 것도 없으며 마음 바깥에 따로 存在하고 있다고 生覺하는 一切의 對相도 그 自體로서 存立 根據가 없습니다. 그것들도 認識 主體인 마음과의 相關關係에서만

그와 같이 보이고 들릴 뿐 마음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認識 對相을 본다고 하는 것은 實體로서의 對相을 보는 것이 아니라

認識 主體인 마음에 依해서 그렇게 보여지도록 對相化된 自己 마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對相이 마음으로 하여금 對相을 닮아서 作用하도록 하는 對相의 反映이 認識 主體인 마음의 作用이라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음이 對相을 만들기도 하고 對相이 마음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 말은 마음과 對相이 認識의 場에서 하나임을 뜻합니다. 이들 중 어느 하나가 먼저 있고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이 派生될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과 對相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對相을 떠나서 存在할 수 없으며

對相도 마음을 떠나서 存在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다고 하는 것은 對相이면서 同時에

自己 마음이며, 自己 마음이 同時에 對相이 되어 있는 관계입니다.

 

이것을 옛 스님들께서는 두 거울이 마주 보고 서로를 비추고 있다[兩鏡雙照]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對相도 마음에 따라 갖가지 다른 느낌과 認識이 있을 수 있으며, 수많은 對相에 따라 마음의 作用도

千差萬別입니다. 한 瞬間도 認識의 場에서 일어나는 關係 속의 變化인 앎은 一定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變化는 時空을 떠나 있으면서 時空으로 나투고 있다고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時空의 制限을 떠나 時空의 밖에 있으며 無限소(小)와  無限대(大)를 同時에 담고 있으므로,

制限 時空만을 認識의 對相으로 삼을 때는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根本 變化인 緣起法을 낱낱의 個別로 나누고 認識主體와 認識客體로 나누는 것을 分別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分別이 일어나는 瞬間이 自身의 眞情한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瞬間이며 스스로 歪曲과 疎外를 부르게 됩니다.
 
마음과 對相이 한삶임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나 對相의 實體가 있다고 여기는 瞬間 分別이 일어나면서

마음과 對相이 타자화(他者化)돠고 必然的으로 고(苦)가 發生하게 됩니다. 分別이 일어나는 瞬間

삶은 苦와 不滿足의 連續이니 自身의 眞情한 삶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는 對相을 바르게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됩니다. 分別은 단지 對相, 나와 너로 갈라 놓을 뿐 아니라 우리를 눈 뜬 장님, 들리는 귀머거리로 만듭니다. 그래서 나무의 소리, 흙의 소리, 이웃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합니다.

 
거꾸로 分別이 그치는 瞬間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되니 이것은 圓融한 삶, 하나된 삶이라고 합니다.

時空의 制限을 넘어 마음과 對相이 걸림 없는 全切로 사는 것입니다. 두 거울이 서로를 마주 비추듯

對相이면서 同時에 마음이고 마음이면서 同時에 對相임을 分明히 알아차려서 자타(自他)의 分別을

떠나 사는 것을 두 모습이 없다고 합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